영화 <아르고>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아르고>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다. 재미있는 영화라는 건 인정한다. 다한증 환자도 아닌 내가 손에 땀 좀 쥐었으니 재미있는 영화인 게 맞다. 공황장애도 아닌 내가 갑자기 맥박이 빨라지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순간도 몇 번 있었으니 재미있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그래, 막판 공항 장면에서는 제법 ‘쪼는 맛’도 대단했단 말이다!
하지만 <아르고>만큼 재미있는 영화는 많지 않나? 모름지기 작품상 수상작이란 오삼불고기와 같아서, ‘재미’와 ‘의미’가 오징어와 삼겹살처럼 엇비슷한 비율로 섞이는 게 이 바닥의 관례인바, <아르고>처럼 그저 재미만 도드라지게 볶아대는 영화라면 이건 아카데미용 오삼불고기가 아니라 그냥 극장 흥행용 오징어불고기가 아니겠냔 말이다.
그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회원 6000여명이 <아르고>를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지 추측해보았다. 할리우드에서 영화 만드는 모든 스태프가 어쩜 그렇게 한결같이 <아르고>를 사랑할 수 있는지, 대체 이 작품의 어떤 점에 매료된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그 ‘생각’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아르고>가 뭔 영화인지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1979년 11월4일. 이란의 시위대가 수도 테헤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점령한다. 대사관 직원 52명이 한꺼번에 인질로 잡힌 그날, 운좋게 미리 대사관을 빠져나가 캐나다 대사의 사저에 숨어든 미국인 6명이 있었다. 자, 이제 미국 정부는 이 6명을 이란 밖으로 몰래 빼내야 한다. 토니 멘데스(벤 애플렉)라는 시아이에이(CIA) 요원이 묘안을 짜냈다. 영화!
에스에프(SF) 영화 찍는 할리우드 영화 스태프인 척, <스타워즈>의 외계 행성 같은 분위기를 만들려면 이란 사막의 이국적인 풍경을 꼭 찍어야 하는 척, 그래서 자신이 영화 제작자인 양 이란에 잠입한 뒤 인질들도 각각 영화감독, 카메라맨 따위 스태프인 척, 한마디로 ‘위 캔 척’! 다 같이 가짜 여권 들고 공항 가서 유유히 민간 항공기로 빠져나오는 계획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을 말이 되게 만들어 준 사람들이 있었다. <혹성탈출>로 아카데미 분장상을 받은 특수분장 전문가 존 체임버스(존 굿맨)와 그의 할리우드 친구들. <아르고>라는 가짜 에스에프 영화를 실제 제작중인 영화처럼 속이는 데 앞장선 사람들.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비밀요원을 도와 음지의 6인에게 마침내 양지를 선물한 영웅들. 벤 애플렉 감독의 <아르고>는 우리가 모르고 있던 바로 그 할리우드 무명 용사들의 실제 활약상을 그린 영화다.
영화가 어쩌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막연한 믿음. 영화가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순진한 기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품게 되는 그 ‘믿음’과 ‘기대’가 <아르고>에서 잠시 실현된다. 영화 만드는 게 꽤 쓸모있는 일이고 그런 쓸모있는 일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나도 꽤 쓸모있는 인간이 아닌가 하는 즐거운 착각을 하게 만든다. 허구의 영화로 실제의 역사를 바꾼 통쾌한 이야기에 환호하면서, 그 허구의 예술에 마음 빼앗겨 평생 철들지 못한 모든 영화인들은 스스로 쓰담쓰담, 자기 인생 힘내라고 토닥이게 되었을지 모른다. ‘너 지금 제법 근사한 일을 하고 있는 거야’, 그렇게 자기 최면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듭니까?”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어른이 된 파이가 자신을 찾아온 작가에게 묻는다. 작은 구명보트 위에서 서로를 죽이는 이야기? 호랑이와 함께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이야기? 작가가 답한다. 호랑이가 등장하는 버전이 “더 나은 이야기”라고. 아카데미상 투표권을 가진 할리우드 영화인들에게도, 영화라는 거짓말로 한 시대를 멋지게 속여넘긴 <아르고>의 ‘영화 같은 실화’가 “더 나은 이야기”였을 뿐이다. <제로 다크 서티>나 <링컨>처럼 그냥 ‘실화 같은 실화’보다는.
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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