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멸 감독은 “영화 <지슬>을 통해 ‘4·3’은 냉전시대에 국가가 무고한 주민들을 죽인 양민학살이라는 올바른 역사인식이 이뤄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19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오 감독은 <지슬> 개봉 준비를 위해 다시 제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국제영화제 잇단 수상 ‘지슬’ 오멸 감독
오멸(42) 감독은 흰색 점퍼를 벗어 옆 의자에 올려놓았다. “최근 다녀온 미국 선댄스영화제 쪽에서 초청받은 감독들에게 준 점퍼”라고 했다. 사진기자 앞에 앉은 그가 웃으며 말했다. “영화제용 점퍼인데, 조금 비싼 브랜드의 옷이라네요. 혹시 이 옷이 나온 사진을 보고 돈 없이 영화 찍은 척하더니 비싼 옷 입고 다닌다고 할까봐….”
저예산 영화를 찍는 감독들은 추레한 옷만 입고 다니란 법도 없지만, 실제로 그가 영화 <지슬>을 넉넉한 환경에서 만든 건 아니다. 제작비 2억5000만원 중 제주영상위원회(2500만원), 4·3평화재단(1000만원)이 준 지원금 외에 주변의 후원금과 집 보증금까지 끌어다 쓴 감독 개인의 빚이 제작의 밑천이 됐다. “카메라·조명장비 등을 육지에서 빌려오는 비용만도 3000만원이 넘었다”고 한다.
1948년 제주 4·3항쟁의 슬픔을 다룬 이 영화는 지난달 27일 세계 최고 권위의 독립영화축제인 선댄스영화제에서 외국영화 부문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당시 그는 영화제 쪽이 숙박비 등을 지원하는 기간만 소화하고, 개인적으로 체류비를 추가로 쓰지 않은 채 시상식 전날 돌아왔다. 귀국하는 도중, 그는 일본 나리타공항 터미널1과 터미널2를 오가는 셔틀버스를 타고 가다 <지슬> 배급사한테서 뜻밖의 전화 한 통을 받은 뒤 끊었다. 그는 “셔틀버스에 같이 있던 촬영감독에게 ‘우리 대상 받았대’라고 소식을 전했다”고 했다.
일본 공항 버스 안에서 두 사람이 조촐한 축하를 나눴지만, 선댄스영화제 쪽은 “심사위원들이 모여 이 영화를 대상작으로 선정하는 데 1분도 걸리지 않았다”며 <지슬>의 수상에 예우를 표했다.
오 감독은 ‘4·3은 냉전시대에 미군정이 가담한 양민학살’이라는 목소리를 품은 이 영화가 미국에서 열린 선댄스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이유를 이렇게 짚었다. “인간 목숨을 죽이는 학살에서 전해지는 아픔과 통증을 누구나 똑같이 느끼는 것 같아요. 4·3의 현장에 미국인을 갖다 놓아도, 프랑스인을 갖다 놓아도, 이 사람 저 사람을 섞어 놓아도 똑같이 아프고 울음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요.”
그는 “비록 미국인 전체가 아니라 미국 예술인들이 이 영화를 인정한 것이지만, ‘이 사람들, 의외로 건강한 면도 있네’란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그는 우리 자신으로 눈을 돌렸다. ‘제주 섬에서 일어났던 어떤 이야기’쯤으로 밀쳐냈던 ‘우리’의 모습과, 임기 내내 4·3 위령제에 한번도 오지 않은 이명박 정부의 외면도 떠올렸다.
“오히려 그동안 우리는 4·3을 이념적으로 바라보며 제주, 그들만의 이야기라며, 또 작은 이야기라며 묻어버렸죠. 순박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어떠한 질문도 받지 못한 채 빨갱이로 몰리며 잔인하게 죽은 양민학살이었습니다. 당시 제주 주민 3만명 이상이 처참하게 죽었어요. 제주 사람 대부분이 4·3의 아픔과 연결되어 있죠. 이들의 통증에 관심을 보여야 해요.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했듯, 그런 양민학살이 우리나라에 있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 역사를 제대로 인정해줘 제주 사람들을 그 역사에서 헤어나올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끝나지 않은 세월’로, 대답 없는 역사로 놔두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제목은 <지슬>이지만 부제목은 ‘끝나지 않은 세월 2’다. 오 감독의 절친한 선배이자, 2005년 세상을 떠난 김경률 감독이 4·3에 관해 만든 영화 <끝나지 않은 세월>(2005)을 잇는 작품이란 뜻이기도 하다.
19일 서울시내 카페에서 만난 오멸 감독은 선댄스영화제가 끝난 뒤 <지슬> 작품을 초청한 네덜란드 로테르담영화제, 프랑스 브줄아시아영화제를 다녀온 직후였다. 그는 13일 브줄영화제에서 한국 최초로 장편 경쟁 부문 대상(황금수레바퀴상)까지 받았다. 국내 평론가들도 “영화적 기적”(김영진), “60여년 전의 사건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을 온전히 현재의 사건으로 만들어내는 영화”(변성찬)라는 극찬들을 내놓는다. 선댄스영화제 쪽은 “강력하지만 부드러운 <지슬>은 인간의 진실한 감정에 강하게 몰입하게 만든다”고 평하고 있다. 선댄스·브줄영화제 당시 외국 관객들이 감독에게 찾아와 “이런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맙다”며 눈물을 흘린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혹시 평단이 좋게 얘기한 작품들이 대개 대중성과 거리가 멀더라는 편견을 가진 이들을 위해 덧붙여 설명할 것이 있다. 이 영화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관객상도 받았고, 서울독립영화제 2회 특별상영 모두 매진을 기록했으며, 네이버 등 온라인 포털사이트 평점도 10점 만점에 9점을 넘기고 있다.
‘대체 뭔 영화이기에’라고 느껴질 <지슬>의 영화 제작은 제주 출신 오 감독이 몇 해 전, 제주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에 있는 ‘큰넓궤’라는 동굴을 둘러보면서 시작된다. “제주 억새의 움직임도 슬픈 춤 같고, 스치는 제주 바람 소리도 울음으로 들리곤 했다”던 그는 이곳에서 1948년 동광리 주민들이 아우성치는 소리와 눈물의 환영을 느낀다
군인들 피해 동굴에 숨은 주민끼리
옥신각신하는 모습 등 웃음 자아내
선댄스쪽 “강력하지만 부드러워”
제례형식으로 무고한 영혼들 위로 “무조건 사살하라는 미군정 소개령을 피해 주민들이 이 동굴에 숨어들었는데, 그들을 찾아낸 군인들이 동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주민들이 고추 연기를 피웠다고 합니다. 주민들은 살기 위해 부채질을 하면서 고추 연기를 밀쳐내며 눈물을 흘리고, 바깥의 군인들은 죽이려고 총을 쏘면서 고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시대의 아이러니 같았죠.” 1948년 4·3항쟁은 해방 정국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집회가 제주에서 열린 것을 계기로 해 남한 군인·경찰이 주민들을 폭도라며 집단학살한 비극을 말한다. <지슬>은 총부리를 피해 동굴에 숨어든 주민들의 무고한 죽음을 비추며, 제주 섬에 갇혀 부유하던 당시의 슬픔을 우리 앞에 불러세운다. ‘지슬’은 제주 말로 땅에서 나오는 열매 혹은 감자를 뜻하며, 영화에서 생존을 위한 양식과 죽음의 공포를 견뎌내는 희망의 상징으로 쓰인다. 그는 “나 자신도 어렸을 때부터 4·3을 불편한 진실로 여겨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큰고모가 4·3 때 돌아가셨다는 얘기도 이 영화를 찍고 난 뒤 아버지한테 들어서 알았는데, 아마 아버지도 아픔을 가슴에 묻어두고 온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제주 사람들과 4·3의 슬픔은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한해 한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4·3을 알 수밖에 없었으며, 언젠가 내가 영화로 만날 얘기”라고 느꼈다고 했다. 장편영화를 연출해 영화계에 입문한 지 5년 남짓 된 그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찍은 <어이그 저 귓것>, <뽕똘>, <이어도>를 연출한 뒤에야 2011년 겨울 <지슬> 촬영에 들어갔다. “4편째에 <지슬>을 찍은 건, 영화 촬영 시스템을 터득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내가 못 찍으면 4·3의 역사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부담이 됐던 거죠.” 영화엔 집에 두고 온 돼지가 밥은 잘 먹는지 걱정하는 할아버지, 다리가 아파 ‘너희들만 먼저 가라’며 혼자 집에 남은 어떤 할머니, 동굴에 같이 숨지 못한 동네 처녀를 좋아한 청년의 순정들이 담겨 있다. “그때의 사연들을 많이 모았지만, 사건과 정서가 이해된 이후론 사연들을 더 모으지 않고 드라마를 써내려갔어요. 가슴 아픈 사연이 너무 많아, 사연을 접할 때마다 영화에 다 담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죠.” 영화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함축한 사진 한장 한장을 보듯, 장면 하나하나에 슬픔과 아픔을 꾹꾹 눌러담아 허투루 쓰인 장면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예컨대 처녀를 좋아한 청년이 불안과 울분을 안고 제주의 ‘오름’(언덕) 능선을 따라 뛰어오를 때, 감독은 그 언덕을 처녀의 젖가슴 이미지로 바꿔놓는 화면 연출을 보여준다. “제주 오름이 실은 슬픔들이 묻힌 무덤과 같은 공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제사를 지내는 제례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감독은 “해외 영화제에 나가면 관객들이 영화 마지막에 희생자들이 숨진 곳곳마다 ‘지방’(제사 지낼 때 망자의 혼을 모시려고 쓰는 종이)을 태우는 장면의 의미를 곧잘 묻는다”고 했다. “영혼을 불렀다가 그들을 다시 돌려보내고 평안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말하지요. 이 영화는 무고하게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싶은 마음을 담고 있으니까요.” 영화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꽤나 무거운 영화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동굴에 숨은 주민들끼리 서로 윽박지르거나 옥신각신하는 모습들이 웃음도 자아낸다. 감독은 제주 말로 연기하는 배우들의 대사들을 스크린에 표준어 자막으로 옮겨놓는다. 그는 영화에서 해학이 엿보인다는 반응들에 대해 이런 설명을 내놓았다. 문화적 자부심·역사의식 위해
3월1일 제주서 세계 최초 개봉
상영관 잡기 어려워 공동체 상영도
“독립영화, 매맞을 기회라도 줬으면” “4·3의 트라우마를 가진 제주 분들도 영화를 볼 텐데, 무거운 마음으로 보는 것보다 웃길 땐 웃고, 또 같이 가슴 아파하고 울면서 영화를 보기를 원했죠.” 익히 알려졌듯 이 영화는 흑백영화다. “제주를 아름다운 색으로 기억하지만, 컬러색 뒤에 아픔이 있다는 것을 무채색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오 감독은 “전공이 한국화여서 무채색에 익숙하다”고 말하는데, 사실 제주 영평동에서 태어난 그는 제주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미대생 출신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예술적 갈망을 집중적으로 표출하는 장르를 약 10년 주기로 바꿔왔다. 사회에 대한 불만과 예술을 갈구하는 욕망이 혼재된 시기였던 20대 청춘 시절엔 미술에 푹 빠져 있었고, 30대엔 ‘제주 머리에 꽃을’이란 거리예술제를 8년여 기획·연출했고, 2004년부터 시작한 ‘자파리연구소’에서 창작연극을 만들어 한국·일본 마을을 돌며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영화 영상에 눈을 돌렸고, 2010년 장편 <어이그 저 귓것>이 제천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으며 영화계에 ‘오멸’이란 이름을 등장시켰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미술을 끊고, 연극을 하다가, 다시 영화만 한다는 식으로 구분하는 시선에 대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어떤 이야기와 정서를) 다루는 방식이 미술이었다가, 연극이었고, 이제 영화가 된 것뿐이죠. 내 필통에 긴 펜도 있고 짧은 붓도 있다면, 이번엔 긴 펜을 꺼내고 다음엔 짧은 붓을 꺼내 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른바 ‘영화 제도권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래서 그의 첫 장편 <어이그 저 귓것>을 연출할 때는 “내 능력의 한계 때문에 과연 내가 영화를 끌고 갈 자격이 있는가 싶어 운 적도 있다”고 한다. 그 순간, 그는 이렇게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제 영화엔 핸드헬드(카메라 흔들어 찍기)가 많지 않은데, 아직도 촬영 방식이나 장비의 숙련도가 부족하다는 걸 느낍니다. 그럼 내가 영화 창작의 기술을 더 공부할 것인가, 감독으로서 삶을 더 성찰할 것인가를 택해야 한다면 삶을 더 성찰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감독은 어떤 이야기와 사건을 제대로 해석하고, 그 본질이 왜곡되지 않도록 하는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촬영의 기술은 스태프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거든요.” <지슬>은 3월1일 제주에서 먼저 개봉하고, 3주 뒤인 21일부터 서울을 비롯한 전국 확대 상영에 나선다. 그가 “세계 최초 개봉을 제주에서 하는” 이유가 있다. “제주는 그간 국가의 수단으로 활용된 섬이었죠. 옛날엔 유배지로, 4·3 땐 살육의 섬으로, 이젠 관광지로, 또 군사기지(강정마을)가 되었죠. 또 연극이나 영화 일로 서울에 올라오면 제주를 지역이란 말로 배제한다는 느낌을 받곤 했어요. 제주의 문화 수준을 약간 밑으로 보는 거죠. <지슬>이 제주 이야기이니까 당연히 제주에서 먼저 개봉하고 싶었고, 제주 주민들에게 세계 최초 개봉이란 문화적 자부심도 주고 싶었습니다.” 인간에게 가해지는 학살의 아픔
외국인도 똑같이 느끼는 것 같아
이런 영화 찍어줘 고맙다며 눈물도
4·3위령제 외면한 MB정부와 대비 고모가 4·3때 돌아가셨단 얘기
영화 찍은 뒤 아버지에게 들어
제주민 3만여명 학살당한 역사
제대로 인정해줘야 아픔 치유돼 특히 그는 제주에서 <지슬>이 흥행바람을 일으켜, 제주 사람들이 4·3에 대한 전국적 관심의 불씨를 지피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제주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얼마큼 보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나올 것 같아요. 이 영화가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세우는 발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제주엔 저예산 영화를 안정적으로 틀어줄 독립영화 전용관이 없어 상영관을 빌려야 한다. 3월1일부터 3주간 ‘씨지브이(CGV) 제주’에서, 이후엔 영화문화예술센터(옛 코리아극장)로 옮겨 제주에서 두 달 동안 상영한다. 그는 “제주에서 극장 대여비용만 1300만원 정도 들 것 같다”고 말했다. 복합상영관(멀티플렉스)을 잡기 어려운 현실에서 그는 독립영화인들과 함께 직접 상영관 배급에 나서 이 상황을 헤쳐나가려고 한다. 제주독립영화협회 공동대표이기도 한 그는 지역별 독립영화협회 관계자들과 같이 해당 지역 문화회관 등을 잡아 <지슬>의 ‘공동체 상영’을 시도한다. 공동체 상영을 하면 일반 극장보다 관람료를 약간 싸게 받을 수밖에 없어 영화 수익을 합당하게 올릴 수 없는 한계도 있다. 그는 “상영관을 잡기 위해 (멀티플렉스와) 지속적인 싸움을 벌이는 대신, 풀뿌리 지역으로 스며들어 찾아가려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물론 그는 이것이 근본적인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좋은 작품을 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 해요. 국가가 예산을 지원해서 저예산·독립영화 상영관을 확대해 좋은 작품인데도 극장에 걸리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문화적 성숙을 위해 길게 보고 투자하는 것이 필요해요. ‘출전(상영)의 기회’를 줘야 합니다.” 그는 영화 <지슬>에서 제주도 말을 모르면 유머를 이해할 수 없는 언어적 유희들을 줄였다고 했다. <어이그 저 귓것>을 상영했을 때 “제주 사람들은 ‘어이그 저 귓것’(“어이그, 저 귀신이 데려가야 할 바보 같은 녀석”)이란 말을 해도 웃는데, 서울 관객들은 이해하지 못했던 체험이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건 <어이그 저 귓것>이 소규모 개봉관이나마 상영 기회를 잡아 관객의 공개적인 반응을 살펴볼 수 있었던 덕이다. 그래서 세계 최고 독립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한국의 독립영화 감독의 입에서 이런 소박한 바람이 나오는 것이다. “(저예산 독립영화도 극장에서 제대로 상영돼) 매 맞을 기회를 줬으면 해요. (극장에서) 실패할 경험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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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신각신하는 모습 등 웃음 자아내
선댄스쪽 “강력하지만 부드러워”
제례형식으로 무고한 영혼들 위로 “무조건 사살하라는 미군정 소개령을 피해 주민들이 이 동굴에 숨어들었는데, 그들을 찾아낸 군인들이 동굴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주민들이 고추 연기를 피웠다고 합니다. 주민들은 살기 위해 부채질을 하면서 고추 연기를 밀쳐내며 눈물을 흘리고, 바깥의 군인들은 죽이려고 총을 쏘면서 고추 연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시대의 아이러니 같았죠.” 1948년 4·3항쟁은 해방 정국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집회가 제주에서 열린 것을 계기로 해 남한 군인·경찰이 주민들을 폭도라며 집단학살한 비극을 말한다. <지슬>은 총부리를 피해 동굴에 숨어든 주민들의 무고한 죽음을 비추며, 제주 섬에 갇혀 부유하던 당시의 슬픔을 우리 앞에 불러세운다. ‘지슬’은 제주 말로 땅에서 나오는 열매 혹은 감자를 뜻하며, 영화에서 생존을 위한 양식과 죽음의 공포를 견뎌내는 희망의 상징으로 쓰인다. 그는 “나 자신도 어렸을 때부터 4·3을 불편한 진실로 여겨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큰고모가 4·3 때 돌아가셨다는 얘기도 이 영화를 찍고 난 뒤 아버지한테 들어서 알았는데, 아마 아버지도 아픔을 가슴에 묻어두고 온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제주 사람들과 4·3의 슬픔은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까닭에 “한해 한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4·3을 알 수밖에 없었으며, 언젠가 내가 영화로 만날 얘기”라고 느꼈다고 했다. 장편영화를 연출해 영화계에 입문한 지 5년 남짓 된 그는 제주도를 배경으로 찍은 <어이그 저 귓것>, <뽕똘>, <이어도>를 연출한 뒤에야 2011년 겨울 <지슬> 촬영에 들어갔다. “4편째에 <지슬>을 찍은 건, 영화 촬영 시스템을 터득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내가 못 찍으면 4·3의 역사가 제대로 조명받지 못할 수 있기 때문에 부담이 됐던 거죠.” 영화엔 집에 두고 온 돼지가 밥은 잘 먹는지 걱정하는 할아버지, 다리가 아파 ‘너희들만 먼저 가라’며 혼자 집에 남은 어떤 할머니, 동굴에 같이 숨지 못한 동네 처녀를 좋아한 청년의 순정들이 담겨 있다. “그때의 사연들을 많이 모았지만, 사건과 정서가 이해된 이후론 사연들을 더 모으지 않고 드라마를 써내려갔어요. 가슴 아픈 사연이 너무 많아, 사연을 접할 때마다 영화에 다 담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죠.” 영화는 메시지를 강렬하게 함축한 사진 한장 한장을 보듯, 장면 하나하나에 슬픔과 아픔을 꾹꾹 눌러담아 허투루 쓰인 장면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예컨대 처녀를 좋아한 청년이 불안과 울분을 안고 제주의 ‘오름’(언덕) 능선을 따라 뛰어오를 때, 감독은 그 언덕을 처녀의 젖가슴 이미지로 바꿔놓는 화면 연출을 보여준다. “제주 오름이 실은 슬픔들이 묻힌 무덤과 같은 공간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이 영화는 제사를 지내는 제례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감독은 “해외 영화제에 나가면 관객들이 영화 마지막에 희생자들이 숨진 곳곳마다 ‘지방’(제사 지낼 때 망자의 혼을 모시려고 쓰는 종이)을 태우는 장면의 의미를 곧잘 묻는다”고 했다. “영혼을 불렀다가 그들을 다시 돌려보내고 평안을 기원하는 것이라고 말하지요. 이 영화는 무고하게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싶은 마음을 담고 있으니까요.” 영화에 관해 이렇게 설명하고 보니 꽤나 무거운 영화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동굴에 숨은 주민들끼리 서로 윽박지르거나 옥신각신하는 모습들이 웃음도 자아낸다. 감독은 제주 말로 연기하는 배우들의 대사들을 스크린에 표준어 자막으로 옮겨놓는다. 그는 영화에서 해학이 엿보인다는 반응들에 대해 이런 설명을 내놓았다. 문화적 자부심·역사의식 위해
3월1일 제주서 세계 최초 개봉
상영관 잡기 어려워 공동체 상영도
“독립영화, 매맞을 기회라도 줬으면” “4·3의 트라우마를 가진 제주 분들도 영화를 볼 텐데, 무거운 마음으로 보는 것보다 웃길 땐 웃고, 또 같이 가슴 아파하고 울면서 영화를 보기를 원했죠.” 익히 알려졌듯 이 영화는 흑백영화다. “제주를 아름다운 색으로 기억하지만, 컬러색 뒤에 아픔이 있다는 것을 무채색으로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오 감독은 “전공이 한국화여서 무채색에 익숙하다”고 말하는데, 사실 제주 영평동에서 태어난 그는 제주대에서 한국화를 전공한 미대생 출신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예술적 갈망을 집중적으로 표출하는 장르를 약 10년 주기로 바꿔왔다. 사회에 대한 불만과 예술을 갈구하는 욕망이 혼재된 시기였던 20대 청춘 시절엔 미술에 푹 빠져 있었고, 30대엔 ‘제주 머리에 꽃을’이란 거리예술제를 8년여 기획·연출했고, 2004년부터 시작한 ‘자파리연구소’에서 창작연극을 만들어 한국·일본 마을을 돌며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영화 영상에 눈을 돌렸고, 2010년 장편 <어이그 저 귓것>이 제천국제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으며 영화계에 ‘오멸’이란 이름을 등장시켰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미술을 끊고, 연극을 하다가, 다시 영화만 한다는 식으로 구분하는 시선에 대해 고개를 저었다. “제가 (어떤 이야기와 정서를) 다루는 방식이 미술이었다가, 연극이었고, 이제 영화가 된 것뿐이죠. 내 필통에 긴 펜도 있고 짧은 붓도 있다면, 이번엔 긴 펜을 꺼내고 다음엔 짧은 붓을 꺼내 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른바 ‘영화 제도권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래서 그의 첫 장편 <어이그 저 귓것>을 연출할 때는 “내 능력의 한계 때문에 과연 내가 영화를 끌고 갈 자격이 있는가 싶어 운 적도 있다”고 한다. 그 순간, 그는 이렇게 마음을 다잡았다고 했다. “제 영화엔 핸드헬드(카메라 흔들어 찍기)가 많지 않은데, 아직도 촬영 방식이나 장비의 숙련도가 부족하다는 걸 느낍니다. 그럼 내가 영화 창작의 기술을 더 공부할 것인가, 감독으로서 삶을 더 성찰할 것인가를 택해야 한다면 삶을 더 성찰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감독은 어떤 이야기와 사건을 제대로 해석하고, 그 본질이 왜곡되지 않도록 하는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촬영의 기술은 스태프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거든요.” <지슬>은 3월1일 제주에서 먼저 개봉하고, 3주 뒤인 21일부터 서울을 비롯한 전국 확대 상영에 나선다. 그가 “세계 최초 개봉을 제주에서 하는” 이유가 있다. “제주는 그간 국가의 수단으로 활용된 섬이었죠. 옛날엔 유배지로, 4·3 땐 살육의 섬으로, 이젠 관광지로, 또 군사기지(강정마을)가 되었죠. 또 연극이나 영화 일로 서울에 올라오면 제주를 지역이란 말로 배제한다는 느낌을 받곤 했어요. 제주의 문화 수준을 약간 밑으로 보는 거죠. <지슬>이 제주 이야기이니까 당연히 제주에서 먼저 개봉하고 싶었고, 제주 주민들에게 세계 최초 개봉이란 문화적 자부심도 주고 싶었습니다.” 인간에게 가해지는 학살의 아픔
외국인도 똑같이 느끼는 것 같아
이런 영화 찍어줘 고맙다며 눈물도
4·3위령제 외면한 MB정부와 대비 고모가 4·3때 돌아가셨단 얘기
영화 찍은 뒤 아버지에게 들어
제주민 3만여명 학살당한 역사
제대로 인정해줘야 아픔 치유돼 특히 그는 제주에서 <지슬>이 흥행바람을 일으켜, 제주 사람들이 4·3에 대한 전국적 관심의 불씨를 지피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제주 사람들이 이 영화를 얼마큼 보느냐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나올 것 같아요. 이 영화가 제대로 된 역사의식을 세우는 발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제주엔 저예산 영화를 안정적으로 틀어줄 독립영화 전용관이 없어 상영관을 빌려야 한다. 3월1일부터 3주간 ‘씨지브이(CGV) 제주’에서, 이후엔 영화문화예술센터(옛 코리아극장)로 옮겨 제주에서 두 달 동안 상영한다. 그는 “제주에서 극장 대여비용만 1300만원 정도 들 것 같다”고 말했다. 복합상영관(멀티플렉스)을 잡기 어려운 현실에서 그는 독립영화인들과 함께 직접 상영관 배급에 나서 이 상황을 헤쳐나가려고 한다. 제주독립영화협회 공동대표이기도 한 그는 지역별 독립영화협회 관계자들과 같이 해당 지역 문화회관 등을 잡아 <지슬>의 ‘공동체 상영’을 시도한다. 공동체 상영을 하면 일반 극장보다 관람료를 약간 싸게 받을 수밖에 없어 영화 수익을 합당하게 올릴 수 없는 한계도 있다. 그는 “상영관을 잡기 위해 (멀티플렉스와) 지속적인 싸움을 벌이는 대신, 풀뿌리 지역으로 스며들어 찾아가려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했다. 물론 그는 이것이 근본적인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좋은 작품을 틀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 해요. 국가가 예산을 지원해서 저예산·독립영화 상영관을 확대해 좋은 작품인데도 극장에 걸리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문화적 성숙을 위해 길게 보고 투자하는 것이 필요해요. ‘출전(상영)의 기회’를 줘야 합니다.” 그는 영화 <지슬>에서 제주도 말을 모르면 유머를 이해할 수 없는 언어적 유희들을 줄였다고 했다. <어이그 저 귓것>을 상영했을 때 “제주 사람들은 ‘어이그 저 귓것’(“어이그, 저 귀신이 데려가야 할 바보 같은 녀석”)이란 말을 해도 웃는데, 서울 관객들은 이해하지 못했던 체험이 도움이 됐다”고 했다. 그건 <어이그 저 귓것>이 소규모 개봉관이나마 상영 기회를 잡아 관객의 공개적인 반응을 살펴볼 수 있었던 덕이다. 그래서 세계 최고 독립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한국의 독립영화 감독의 입에서 이런 소박한 바람이 나오는 것이다. “(저예산 독립영화도 극장에서 제대로 상영돼) 매 맞을 기회를 줬으면 해요. (극장에서) 실패할 경험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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