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영 감독이 20일 오후 서울 인사동의 한 식당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정지영 영화감독
12월19일 대선 결과가 나올 때쯤, 다음날 인터뷰 약속이 슬그머니 걱정이 되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 멘토단에서 활동해온 정지영(66) 감독과의 인터뷰가 제대로 잘 진행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 음식점에서 만난 정 감독은 예상대로 선거 결과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막판 여론의 추이를 볼 때 문 후보가 5%포인트 이상으로 이길 것으로 확신했다”고 한다.
“어젯밤 술을 많이 마셨고, 잠을 제대로 못 잤어요. 저는 솔직히 아직도 이해가 안 돼요.”
무엇이 칠순을 바라보는 노장 감독을 이렇게 정치와 선거에 몰입하게 했을까? 오랜 공백 끝에 13년 만에 세상에 내놓아 흥행이나 작품성 면에서나 화제를 모은 <부러진 화살>과 <남영동 1985>는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대자본에 의해 기획·생산·유통되는 상업영화가 아니라, 소자본의 자체 제작 방식으로 불신받는 사법부를 파헤치는 법정드라마, 군사정권 시절 자행된 고문의 실상을 외면하지 말고 정면으로 응시하고 감당하자고 촉구하는 듯한 인권영화 속에는 한국 사회의 야만의 역사와 모순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정 감독은 <남영동 1985> 개봉을 앞두고는 “박근혜 후보가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이 영화가 대선에 영향을 끼쳤으면 좋겠다”며 현실정치에 적극 뛰어드는 듯한 발언도 했다.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인터뷰는 선거 이야기부터 영화에 대한 관점, 한국의 영화판에 대한 인식, 노장 감독으로서 영화 만들기에 이르기까지 2시간 넘게 종횡무진 이뤄졌다.
인터뷰/김도형 기획위원 aip209@hani.co.kr
대기업서 투자·제작·상영 다 하는
‘수직계열화’로 다른 영화는 소외
‘남영동 1985’도 상영 시간대 밀려
‘진열장’에 없는 영화 누가 보겠나 -이번 대선에 깊숙이 관여했는데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세요? “인터뷰를 기분 좋게 해야 하는데 화를 내면서 하게 생겼어요.(웃음) 오늘 여기서 송년회 하기로 했는데 그야말로 망년회가 되어버렸어요. 납득이 안 갑니다.(웃음) 대한민국 국민 50% 이상이 박근혜 후보를 선택한 것이 의아해요. 어떻게 그런 선택이 있을 수 있을까요? 50~60대가 집중적으로 박 후보를 선택했다고 하는데 그 세대가 어떻게 일사불란하게 그럴 수가 있는가? 나도 60대인데…. 나이 들면 보수화된다고 하더라도….” -문 후보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다는 결과로 들리는데…. “이제 박근혜 후보에게 기대하는 것은 ‘잘살아보자 중산층 70% 달성’보다는 문 후보가 내세운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 경시입니다. 일등만 사람이고 꼴찌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박 후보의 참모들이 얼마나 절박성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그만큼 한국의 상황은 암담해요.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희망이 없어요. 우리 때엔 꿈이 있었어요. 작년에 대학 강단(고려대 미디어학부)을 그만두었는데 아이들이 불쌍해 죽겠어요. 생활이 오직 스펙 쌓고 학점관리뿐이에요.” -<남영동 1985>는 관객이 얼마나 들었나요? “기대한 것은 100만명이었어요. 부산영화제 시사회를 보고 그 가능성 충분했다고 봤어요. 그게 착각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영화 마니아였구요. 기자들도 일반인들과 다른 사람이구요. 마케팅 측면에서 너무 솔직하게 대답한 탓도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찍을 때 목표는 관객들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어요. ‘이렇게 힘들게 우리가 이뤄낸 민주주의를 절대로 소홀히 하지 말자, 한번 아픔을 겪어봐라, 그럼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하지 말고, 한 사람의 고난의 시기와 후일담,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만 포커스 맞춰서 홍보했으면 나았을 텐데…. 솔직하게 접근하다 보니까 관객들이 부담스러워한 것 같아요.” -김근태 전 의원을 모델로 한 극중 주인공인 박원상(김종태 역)씨는 돋보였습니다. “200% 제 역할을 했죠. 찍으면서 ‘박원상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만약 다른 사람이 했다면 100% 중간에 도망갔을 거예요. 고문영화가 왜 세계적으로 없는 것인지 찍으면서 알았어요. 잠깐씩 고문이 나오는 영화는 있어도 적나라한 영화는 없었어요.” -물고문 장면에서 실제 고문을 받으면서 30초 이상 견뎠다면서요? “얼굴에 수건을 얹어놓고 물을 붓는 장면에서 나도 당황하고 배우도 당황했어요. 해보니까 괴로워서 몸부림치는 게 진짜인 거예요. 코를 막고 별짓을 다 해봤어요. 마지막으로 37초짜리를 찍었는데 여러가지 시행착오 끝에 코 안에 실리콘을 바르고 나서야 코로 물이 안 들어가서 배우가 겨우 견뎠어요. 그러고서 그 긴 컷을 찍을 수 있었어요. 박원상이 없었으면 찍을 수 없는 영화였어요.” -영화 속 이근안 역과 실제 이근안이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김근태씨는 수기에서 인간백정 같았다고 묘사했는데 영화는 자기 직업에 충실한 프로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이근안은 오히려 ‘내가 저렇게 나쁜 놈은 아니다’고 이야기하던데요.(웃음) 다른 고문경찰과의 차별화도 작용했어요.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임철우 작가의 <붉은 방>이란 소설을 장선우 감독이 영화화하려다 엎어져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집에서는 말할 수 없이 자상한 가장이고 소시민인데, 작업실에서는 180도 달라지는 거죠. 그러던 차에 지난해 말 김근태 전 의원이 죽고 나서 <남영동 1985>를 만들게 됐죠. 다른 수사관들은 밥벌이 일인데 이근안한테는 실제 애국하는 일이며, 자기는 전문가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리려고 했어요.” -이근안은 최근 펴낸 책을 통해 시대가 달라져서 그렇지, 자신의 행위는 애국 행위라고 강변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도 피해자예요.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권력 하나가 인간을 그렇게 망가뜨린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영화를 보면 결말 부분이 조금 애매합니다. 김근태씨가 나중에 장관이 돼서 이근안을 면회 가서 용서를 한 것인지 아닌지 불투명한 듯합니다. 이근안은 언론 인터뷰에서 용서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만…. “그것은 이근안이 자신이 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석을 한 거로 봅니다. 김근태가 ‘당신도 피해자요’라고 한 모양인데 그것 자체가 용서가 아니라는 것이죠. 김근태씨는 면회하고 나온 뒤 용서를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장관이고 고문기술자는 감옥에 있는데 내가 왜 용서를 못하느냐’고 괴로워한 것이었어요. 용서를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으로 저는 그렸어요. 이근안씨가 쓴 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검토해 보려고요. 이근안 입장에서 들여다보고 객관적 입장에서 찍으려고 해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든 한 인간이 파괴되어 있는 모습을 그리고 싶습니다.” ‘부러진 화살’ 흥행 성공했지만
그렇게 만들어야 상영해 준다는
논리로 전환될까봐 안타까워
작품 다양성 늘려 삶의 질 높여야 -밀폐된 공간에서 90% 이상을 찍었는데요. “유혹이 많았죠. ‘너무 갑갑하다, 가족들 모습이 보이는 것도 좋지 않으냐’는 이야기도 있었죠. 그런 유혹을 다 물리쳤어요. 고집을 꺾지 않은 것이 ‘관객과 같이 갇히자, 그게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냐’고 생각했죠.” -실화를 다룬 법정드라마인 <부러진 화살>은 의외로 재밌다는 평가가 많았어요. “350만명이 들었죠. 올해 청룡영화제 감독상도 받았구요. 그 영화 만들 때 돈을 빌려서 했습니다. 처음 2억 예상했는데 안성기씨가 캐스팅되는 바람에 5억 정도 늘었어요. 내가 원래 재미있는 캐릭터를 잘 못 그리는데 영화가 재미있었던 이유는 실제 두 캐릭터가 굉장히 재미있었기 때문이에요. 실제 주인공인 김명호 교수는 영화의 안성기보다 더 막무가내 인물이에요.” -노장 감독으로서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이야기 들어보면 알겠지만 제가 나이 들어 보입니까? 애 같죠.(웃음) 운이 좋았죠. 영화를 13년 못했다가 영화를 했을 뿐인데 재기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사이에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을 8년간 준비하다 엎어졌고요. 촬영 단계까지 갔다가 엎어진 것도 있었죠.” -그사이에 한국 영화산업 자체가 대자본 위주로 크게 달라졌습니다. “변해도 많이 변했죠. 올해 한국 영화가 1억명 관객을 돌파해 파티까지 했는데, 파티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기업 수익률이 올해 최고로 좋다고 하는데 수익률이 구조조정, 비정규직 양산을 통해서 얻은 것이지 생산성이 높아진 결과가 아닌 것처럼, 한국 영화 1억명 돌파도 마찬가지예요.” -정 감독에 대해 1988년 직배영화 상영 영화관에 뱀을 풀기도 한 감독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화감독이라는 게 지성인인데 그런 야만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느냐며 비난을 많이 받았죠.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당시 상황이 그만큼 절박했어요.” -노무현 정부 때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운동에 앞장섰는데요. 지금도 스크린쿼터가 유지됐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신인감독 한 작품 한 뒤 사라져버려
A급 배우 캐스팅해야 데뷔도 가능
멀티플렉스 한 곳만이라도 한달만
독립영화 상영하도록 해줬으면 “한국 영화가 발전하면서 스크린쿼터가 필요없는 상황까지 온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72일 의무상영 남아있는 스크린쿼터는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제 한국 영화가 없어질지 모르잖아요. 미국 영화 때문에 자국 영화 없는 곳 많아요. 많은 영화인들이 직배영화 상영 반대투쟁부터 시작해서 스크린쿼터 투쟁을 통해서 ‘우리가 영화를 잘못 만들어서 이렇게 됐다’는 각오를 하게 되고 자기 작업에 열심히 투신하게 됐습니다. 1993년 스크린쿼터 싸움 시작할 때 관객점유율이 10%였습니다. 최근에 <영화판>이란 다큐멘터리에서 제가 인터뷰이로 유명 감독과 배우들 만나 인터뷰하면서 ‘한국 영화의 동력은 무엇인가’를 캐다 보니까 ‘그게 영화인들의 열정’이더군요. 한국 영화인들이 가지고 있는 열정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해요. 그게 한국 영화의 힘 아니겠느냐는 것이에요. 그런데 박근혜 집권으로 상황이 어렵게 됐죠. 씨제이, 롯데가 가지고 있는 수직계열화를 빨리 깨야 하는데 어렵게 됐습니다. 문재인 후보는 깨기로 약속했거든요.” -수직계열화의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자기가 투자하고 자기가 제작해서 상영까지 한다는 것이죠. 그 안에서 돌리면 손해날 것 하나도 없었요. 그런데 어떤 경우는 다른 영화는 희생하는 것이거든요.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고르는 경우도 많거든요. <남영동 1985>도 상영 1주일 만에 씨지브이에서 오전 11시 반과 밤 12시50분 상영으로 밀려났어요. 자기들이 만든 영화 2편만 열어놓고요. 김기덕 감독이 이야기한 것도 이런 거죠. 상품이 진열장에 없는데 사람들이 무슨 재주로 상품을 골라요? 맨날 관객들에게 사과와 오렌지나 짜장면만 제공하면 관객들을 먹다 질리죠. 현재 수식계열화 체제는 다양성 훼손, 보편적 획일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죠.” 한국영화 성장한 것 사실이지만
‘72일 의무상영’ 스크린쿼터 유지 필요
차기작은 분단에 관한 영화 될듯
박 당선인 ‘사람’에 신경 써줬으면 -이런 한국 영화산업의 시스템 속에서도 흥행작도 내고 화제작도 내고 했습니다. “칭찬과 응원은 즐겁긴 한데 그것이 자칫하면 ‘<부러진 화살> 봐라, 잘 만드니까 극장에서 얼마든지 문 열어주는 것 아니냐’는 논리로 전환되는 게 너무나 안타까워요. <부러진 화살>이나 <워낭소리>는 천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합니다. 독립영화가 현재 무지하게 많이 생산되는데 멀티플렉스 한곳만이라도 한달만 상영해 달라는 거죠. 관객의 선택이 넓어져야만 궁극적으로 삶의 질이 높아집니다.” -동년배 감독들이 대부분 영화를 만들지 못하잖아요. “대기업 시스템이 문제예요. 50대가 넘어가면 감독이 퇴물이 되어가고 있잖아요? 남아 있는 60대 감독은 검증받은 사람이잖아요. 쉽게 좋게 만들 감독 대신에 신인을 선택합니다. 신인 선택하는 것은 모험인데 10명 중 1명이 살아남아요. 한 작품 하고 대부분 사라져버려요. 조금만 연마한 뒤 데뷔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데 에이급 배우 캐스팅하면 감독 데뷔시켜 주어요.” -차기 작품은? “머릿속에 있어요. 1년 쉬려고 했는데 내가 생각하는 정권이 아닌 정권이 들어서면서 1년 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년 하반기부터 움직일 생각입니다. 차기작은 분단에 관한 영화를 만들려고 해요. 어린아이가 본 시선으로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데 잘될지 모르겠어요.”
정지영이 말하는 정지영 “관객들 좀 싫어할 소재로 관객들 많이 만나려 하죠”
“대학(고려대 불문과)을 졸업하고 충무로 영화 연출부에서 나이 서른에 영화 일을 시작했어요. 7년 만에 감독이 됐죠. 그때 이미 결혼을 했는데 3년 만에 영화감독 데뷔한다고 집에다 큰소리를 쳤어요. 대한민국 모든 정치·사회·문화사가 그 전후가 다른 것처럼 저도 그 전후의 작품세계가 달라졌어요. 빨치산을 그린 <남부군>, 월남전을 다룬 <하얀전쟁> 등 사회적 메시지가 있는 작품이 1987년 이후에 나왔죠. 문화방송에서 2년간 각종 장르의 작품을 했는데 윤흥길 원작 소설 <완장>을 다룬 작품을 베스트셀러 극장에서 방영해서 주목을 받았고요. 순천향대학에서 3년간 계약교수로 일한 뒤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에서 강의교수로 3년간 일하다 정년퇴임했습니다. 영화감독은 경제적 문제만 해결되면 정말 괜찮은 직업입니다. 작품 현장에 들어가면 허락받은 독재자입니다. 감독의 소리가 떨어져야 모든 스태프가 움직이거든요. 저는 옆의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하는데 대부분 감독들은 그렇게 안 해요. 저는 영화를 통해 대중과 만나게 하려는 사람이거든요. 작가나 예술가라고 생각 안 해요. 항상 이렇게 하면 이해가 가능할까 점검하고, 시나리오 쓸 때부터 주위에 물어보죠. 그런 측면에서 나 같은 사람들은 3대 국제영화제를 포기해야 해요. 하지만 철저하게 관객들을 즐겁게 하는 오락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관객들이 조금 싫어할 것 같은 소재를 선택하면서 관객을 많이 만나려고 하니까 이런 영화 만들기가 오히혀 제일 어려운 것 같아요.(웃음)”
대기업서 투자·제작·상영 다 하는
‘수직계열화’로 다른 영화는 소외
‘남영동 1985’도 상영 시간대 밀려
‘진열장’에 없는 영화 누가 보겠나 -이번 대선에 깊숙이 관여했는데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이세요? “인터뷰를 기분 좋게 해야 하는데 화를 내면서 하게 생겼어요.(웃음) 오늘 여기서 송년회 하기로 했는데 그야말로 망년회가 되어버렸어요. 납득이 안 갑니다.(웃음) 대한민국 국민 50% 이상이 박근혜 후보를 선택한 것이 의아해요. 어떻게 그런 선택이 있을 수 있을까요? 50~60대가 집중적으로 박 후보를 선택했다고 하는데 그 세대가 어떻게 일사불란하게 그럴 수가 있는가? 나도 60대인데…. 나이 들면 보수화된다고 하더라도….” -문 후보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다는 결과로 들리는데…. “이제 박근혜 후보에게 기대하는 것은 ‘잘살아보자 중산층 70% 달성’보다는 문 후보가 내세운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대한민국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 경시입니다. 일등만 사람이고 꼴찌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박 후보의 참모들이 얼마나 절박성을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그만큼 한국의 상황은 암담해요.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희망이 없어요. 우리 때엔 꿈이 있었어요. 작년에 대학 강단(고려대 미디어학부)을 그만두었는데 아이들이 불쌍해 죽겠어요. 생활이 오직 스펙 쌓고 학점관리뿐이에요.” -<남영동 1985>는 관객이 얼마나 들었나요? “기대한 것은 100만명이었어요. 부산영화제 시사회를 보고 그 가능성 충분했다고 봤어요. 그게 착각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영화 마니아였구요. 기자들도 일반인들과 다른 사람이구요. 마케팅 측면에서 너무 솔직하게 대답한 탓도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찍을 때 목표는 관객들을 아프게 하는 것이었어요. ‘이렇게 힘들게 우리가 이뤄낸 민주주의를 절대로 소홀히 하지 말자, 한번 아픔을 겪어봐라, 그럼 민주주의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말을 하지 말고, 한 사람의 고난의 시기와 후일담,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만 포커스 맞춰서 홍보했으면 나았을 텐데…. 솔직하게 접근하다 보니까 관객들이 부담스러워한 것 같아요.” -김근태 전 의원을 모델로 한 극중 주인공인 박원상(김종태 역)씨는 돋보였습니다. “200% 제 역할을 했죠. 찍으면서 ‘박원상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만약 다른 사람이 했다면 100% 중간에 도망갔을 거예요. 고문영화가 왜 세계적으로 없는 것인지 찍으면서 알았어요. 잠깐씩 고문이 나오는 영화는 있어도 적나라한 영화는 없었어요.” -물고문 장면에서 실제 고문을 받으면서 30초 이상 견뎠다면서요? “얼굴에 수건을 얹어놓고 물을 붓는 장면에서 나도 당황하고 배우도 당황했어요. 해보니까 괴로워서 몸부림치는 게 진짜인 거예요. 코를 막고 별짓을 다 해봤어요. 마지막으로 37초짜리를 찍었는데 여러가지 시행착오 끝에 코 안에 실리콘을 바르고 나서야 코로 물이 안 들어가서 배우가 겨우 견뎠어요. 그러고서 그 긴 컷을 찍을 수 있었어요. 박원상이 없었으면 찍을 수 없는 영화였어요.” -영화 속 이근안 역과 실제 이근안이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김근태씨는 수기에서 인간백정 같았다고 묘사했는데 영화는 자기 직업에 충실한 프로 같은 인상이었습니다. “이근안은 오히려 ‘내가 저렇게 나쁜 놈은 아니다’고 이야기하던데요.(웃음) 다른 고문경찰과의 차별화도 작용했어요.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임철우 작가의 <붉은 방>이란 소설을 장선우 감독이 영화화하려다 엎어져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집에서는 말할 수 없이 자상한 가장이고 소시민인데, 작업실에서는 180도 달라지는 거죠. 그러던 차에 지난해 말 김근태 전 의원이 죽고 나서 <남영동 1985>를 만들게 됐죠. 다른 수사관들은 밥벌이 일인데 이근안한테는 실제 애국하는 일이며, 자기는 전문가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인물로 그리려고 했어요.” -이근안은 최근 펴낸 책을 통해 시대가 달라져서 그렇지, 자신의 행위는 애국 행위라고 강변하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 사람도 피해자예요.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권력 하나가 인간을 그렇게 망가뜨린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영화를 보면 결말 부분이 조금 애매합니다. 김근태씨가 나중에 장관이 돼서 이근안을 면회 가서 용서를 한 것인지 아닌지 불투명한 듯합니다. 이근안은 언론 인터뷰에서 용서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만…. “그것은 이근안이 자신이 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석을 한 거로 봅니다. 김근태가 ‘당신도 피해자요’라고 한 모양인데 그것 자체가 용서가 아니라는 것이죠. 김근태씨는 면회하고 나온 뒤 용서를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장관이고 고문기술자는 감옥에 있는데 내가 왜 용서를 못하느냐’고 괴로워한 것이었어요. 용서를 안 한 것이 아니라, 못한 것으로 저는 그렸어요. 이근안씨가 쓴 책을 한번 보려고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검토해 보려고요. 이근안 입장에서 들여다보고 객관적 입장에서 찍으려고 해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든 한 인간이 파괴되어 있는 모습을 그리고 싶습니다.” ‘부러진 화살’ 흥행 성공했지만
그렇게 만들어야 상영해 준다는
논리로 전환될까봐 안타까워
작품 다양성 늘려 삶의 질 높여야 -밀폐된 공간에서 90% 이상을 찍었는데요. “유혹이 많았죠. ‘너무 갑갑하다, 가족들 모습이 보이는 것도 좋지 않으냐’는 이야기도 있었죠. 그런 유혹을 다 물리쳤어요. 고집을 꺾지 않은 것이 ‘관객과 같이 갇히자, 그게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냐’고 생각했죠.” -실화를 다룬 법정드라마인 <부러진 화살>은 의외로 재밌다는 평가가 많았어요. “350만명이 들었죠. 올해 청룡영화제 감독상도 받았구요. 그 영화 만들 때 돈을 빌려서 했습니다. 처음 2억 예상했는데 안성기씨가 캐스팅되는 바람에 5억 정도 늘었어요. 내가 원래 재미있는 캐릭터를 잘 못 그리는데 영화가 재미있었던 이유는 실제 두 캐릭터가 굉장히 재미있었기 때문이에요. 실제 주인공인 김명호 교수는 영화의 안성기보다 더 막무가내 인물이에요.” -노장 감독으로서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이야기 들어보면 알겠지만 제가 나이 들어 보입니까? 애 같죠.(웃음) 운이 좋았죠. 영화를 13년 못했다가 영화를 했을 뿐인데 재기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사이에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을 8년간 준비하다 엎어졌고요. 촬영 단계까지 갔다가 엎어진 것도 있었죠.” -그사이에 한국 영화산업 자체가 대자본 위주로 크게 달라졌습니다. “변해도 많이 변했죠. 올해 한국 영화가 1억명 관객을 돌파해 파티까지 했는데, 파티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기업 수익률이 올해 최고로 좋다고 하는데 수익률이 구조조정, 비정규직 양산을 통해서 얻은 것이지 생산성이 높아진 결과가 아닌 것처럼, 한국 영화 1억명 돌파도 마찬가지예요.” -정 감독에 대해 1988년 직배영화 상영 영화관에 뱀을 풀기도 한 감독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화감독이라는 게 지성인인데 그런 야만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느냐며 비난을 많이 받았죠.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요. 당시 상황이 그만큼 절박했어요.” -노무현 정부 때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운동에 앞장섰는데요. 지금도 스크린쿼터가 유지됐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신인감독 한 작품 한 뒤 사라져버려
A급 배우 캐스팅해야 데뷔도 가능
멀티플렉스 한 곳만이라도 한달만
독립영화 상영하도록 해줬으면 “한국 영화가 발전하면서 스크린쿼터가 필요없는 상황까지 온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72일 의무상영 남아있는 스크린쿼터는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언제 한국 영화가 없어질지 모르잖아요. 미국 영화 때문에 자국 영화 없는 곳 많아요. 많은 영화인들이 직배영화 상영 반대투쟁부터 시작해서 스크린쿼터 투쟁을 통해서 ‘우리가 영화를 잘못 만들어서 이렇게 됐다’는 각오를 하게 되고 자기 작업에 열심히 투신하게 됐습니다. 1993년 스크린쿼터 싸움 시작할 때 관객점유율이 10%였습니다. 최근에 <영화판>이란 다큐멘터리에서 제가 인터뷰이로 유명 감독과 배우들 만나 인터뷰하면서 ‘한국 영화의 동력은 무엇인가’를 캐다 보니까 ‘그게 영화인들의 열정’이더군요. 한국 영화인들이 가지고 있는 열정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해요. 그게 한국 영화의 힘 아니겠느냐는 것이에요. 그런데 박근혜 집권으로 상황이 어렵게 됐죠. 씨제이, 롯데가 가지고 있는 수직계열화를 빨리 깨야 하는데 어렵게 됐습니다. 문재인 후보는 깨기로 약속했거든요.” -수직계열화의 문제점은 무엇인가요? “자기가 투자하고 자기가 제작해서 상영까지 한다는 것이죠. 그 안에서 돌리면 손해날 것 하나도 없었요. 그런데 어떤 경우는 다른 영화는 희생하는 것이거든요.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고르는 경우도 많거든요. <남영동 1985>도 상영 1주일 만에 씨지브이에서 오전 11시 반과 밤 12시50분 상영으로 밀려났어요. 자기들이 만든 영화 2편만 열어놓고요. 김기덕 감독이 이야기한 것도 이런 거죠. 상품이 진열장에 없는데 사람들이 무슨 재주로 상품을 골라요? 맨날 관객들에게 사과와 오렌지나 짜장면만 제공하면 관객들을 먹다 질리죠. 현재 수식계열화 체제는 다양성 훼손, 보편적 획일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죠.” 한국영화 성장한 것 사실이지만
‘72일 의무상영’ 스크린쿼터 유지 필요
차기작은 분단에 관한 영화 될듯
박 당선인 ‘사람’에 신경 써줬으면 -이런 한국 영화산업의 시스템 속에서도 흥행작도 내고 화제작도 내고 했습니다. “칭찬과 응원은 즐겁긴 한데 그것이 자칫하면 ‘<부러진 화살> 봐라, 잘 만드니까 극장에서 얼마든지 문 열어주는 것 아니냐’는 논리로 전환되는 게 너무나 안타까워요. <부러진 화살>이나 <워낭소리>는 천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합니다. 독립영화가 현재 무지하게 많이 생산되는데 멀티플렉스 한곳만이라도 한달만 상영해 달라는 거죠. 관객의 선택이 넓어져야만 궁극적으로 삶의 질이 높아집니다.” -동년배 감독들이 대부분 영화를 만들지 못하잖아요. “대기업 시스템이 문제예요. 50대가 넘어가면 감독이 퇴물이 되어가고 있잖아요? 남아 있는 60대 감독은 검증받은 사람이잖아요. 쉽게 좋게 만들 감독 대신에 신인을 선택합니다. 신인 선택하는 것은 모험인데 10명 중 1명이 살아남아요. 한 작품 하고 대부분 사라져버려요. 조금만 연마한 뒤 데뷔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데 에이급 배우 캐스팅하면 감독 데뷔시켜 주어요.” -차기 작품은? “머릿속에 있어요. 1년 쉬려고 했는데 내가 생각하는 정권이 아닌 정권이 들어서면서 1년 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년 하반기부터 움직일 생각입니다. 차기작은 분단에 관한 영화를 만들려고 해요. 어린아이가 본 시선으로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데 잘될지 모르겠어요.”
정지영이 말하는 정지영 “관객들 좀 싫어할 소재로 관객들 많이 만나려 하죠”
정지영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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