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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애니

사실 제거한 끔찍한 세상

등록 2023-12-02 10:00수정 2023-12-02 11:47

[한겨레S] 주일우의 뒹굴뒹굴 만화
기억 전달자

서울 종로도서관은 비탈에 자리 잡고 있어서 제법 숨을 할딱이며 올라가야 한다. 13살 방학, 방학 내내 여기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당시엔 도서관이 독서실 역할을 해서 새벽부터 공부할 자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도서관 프로그램에 가는 길이라 줄을 서지 않고 들어갈 수 있어 우쭐했다. ‘나는 책을 읽으러 도서관에 간다.’ 입시에 매달려 이런 시간을 갖지 못하는 딸아이가 애달프다.

그때 읽었던 책들은 모두 기억에 또렷하다. 그중에서도 유독 자꾸 눈에 밟히는 책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다. 헉슬리는 멋진, 완벽한 세상을 상상했다. 아니, 완벽한 세상을 상상하는 것에 대한 비판을 했다. 당대의 지식을 끌어모아 이야기를 만들었다. 능력을 일찍 평가해서 맞는 일을 정하고, 그 일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해주는 사회. 일하다 짬이 나면 즐거움을 안겨주는 약물을 먹고 시간을 보내니 시름을 앓을 겨를이 없다. 언뜻 보면 매력적이지만 뭔가 찜찜한 결말이다.

개운치 않은 느낌의 원인은 아마도 이런 질문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 정해주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정말 행복할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은 인기가 있어서 ‘멋진 신세계’에 대한 멋진 변주들이, 이후에도 여럿 등장했다. 세계적으로 1천만부가 팔렸다는 ‘기억 전달자’도 같은 질문을 한다. 이 이야기의 마을은 산도 깎고 웅덩이도 메워서 평평한데다 기후도 완벽히 통제해서 일년 내내 똑같다. 태어나서 12살까지 성장 과정을 원로들이 주의 깊게 관찰해서 미래의 직업을 정한다. 성욕을 포함한 욕망은 약물로 억제되고 출산도 정해진 사람만 할 수 있다. 지금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인구와 사회적 기능을 세심하게 조정한다.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이 조정에 방해가 되면 ‘임무해제’, 즉 제거된다.

기억과 욕망이 제거돼 색깔도 볼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기억을 보존하도록 선발된 한 사람, 조너스가 있다. 모두에게서 지워버린 기억들을 홀로 져야 하니 그 무게가 너무 무겁다. 선택된 날 받은 임무 설명서의 세번째 조항은, “이 순간부터 당신은 무례함을 금지하는 규칙들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 심지어 일곱번째 조항으로 “거짓말을 해도 된다”.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 개성과 차이를 말살하려고 도입한 원칙들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조너스. 전임자에게 기억을 전달받으면서 색깔을 볼 수 있게 되고 감정과 욕망도 가지게 된다. 그는 결국 깨닫는다. 삶은 기쁨과 슬픔, 좋음과 나쁨, 즐거움과 쓰라림, 평화와 전쟁, 희망과 절망, 신남과 지루함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이라는 것을. 어느 한쪽만으로 만든 세상은 실체와 멀고, 행복과도 거리가 멀다.

‘기억 전달자’의 마을에는 책이 3권만 있다. 사전, 마을소개서, 규정집. 이 책은, 언론이 사라진, 책이 사라진 세상의 끔찍함을 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엑스포 개최지 투표가 박빙이라는 보도만 보다가 막상 투표 결과를 보고 무척 놀랐다. 5개월 전 ‘채널에이’는 “정부의 자체 평가”라며 “80 대 87로 사우디와 박빙 승부를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결과는 29 대 119. 투표한 나라들 대부분이 부산 대신 리야드를 골랐다. 누가 누구를 속인 것일까? 사실과 기억을 담는 신문과 책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끔찍한’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것일까?

만화 애호가

종이나 디지털로 출판되어 지금도 볼 수 있는 국내외 만화를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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