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강정마을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 만난 백가윤 제주다크투어 공동대표.
“서울에선 통근이 너무 오래 걸리잖아요. 칼퇴근해도 제대로 저녁도 챙겨 먹기 어려웠어요. 제주에 와서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의미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게 가장 좋아요.”
5월22일 서귀포 강정마을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에서 만난 백가윤(35) 제주다크투어 공동대표는 환하게 웃었다. 제주다크투어는 제주 4·3 현장의 아픈 역사를 여행객에게 소개하는 역사 체험 비영리단체다. 단순히 여행객을 유적지로 안내하는 사업뿐 아니라 역사의 현장을 발굴하고, 기록·보존하는 일도 병행한다. 제주에 오기까지 한국의 대표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간사로 일했던 백씨와 천주교 시민단체 활동가 출신의 강은주(37)씨가 함께 설립했다.
제주시 오라동의 집에서 사무실까지는 불과 10분 거리라고 한다. 평화운동가로서의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서울에서는 불가능했던 ‘삶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일상을 “할머니 같다”고 말하며 웃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자신을 위한 도시락을 정성스럽게 준비하고, 몸이 찌뿌둥하면 근처 한의원에서 뜸을 뜬다. 오전 10시쯤 출근해 일하다 6시경에 퇴근해 저녁을 차려 먹고, 헬스장에서 운동한다. 업무와 휴식의 구획이 희미한 이전과는 다른 삶이다.
처음부터 제주에서의 삶을 꿈꿨던 것은 아니었다. 지난해 2월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등졌다. 백씨는 보수적이었던 아버지에게 물었다. “딸이 참여연대 간사로 일하는 게 싫지 않아요?” 돌아온 답은 명확했다. “네가 행복하다면 괜찮지.”
병구완을 위해 찾은 병원에서는 상대적으로 젊은 40∼50대 환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인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세월호의 유족들을, 경찰의 물대포를 맞아 사망한 고 백남기 농민의 가족을 떠올렸다. “그동안 머릿속으로는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가족을 잃는다는 게 뭔지 그제야 알겠더라고요. 죽음이 뭔지, 산다는 건 뭔지, 행복이 뭔지, 나를 돌본다는 건 뭔지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새로운 삶’을 꿈꾸던 백씨는 말했다. “제주 4·3을 공부하고 알아갈수록 한국의 아픈 역사에 새롭게 눈뜨게 됐어요. 그런데 광주 민주화항쟁은 잘 아는 또래 친구들이나 외국인 활동가들도 4·3은 잘 모르더라고요.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주에 정착하니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휴양지에서의 삶’을 떠올린 탓이다. 하지만 그에게 제주는 여전히 진행 중인 ‘아픔’의 땅이다. 백씨는 쉬는 날에도 숨겨져 있는 4·3 현장을 찾아다닌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지난 1948년 토벌대가 임신부를 나무에 매달아 찔러 죽인 이른바 ‘비학동산 사망 사건’은 비교적 잘 알려진 비극이다. 당시 그 나무가 있던 자리에 지금은 마을회관이 세워져 있다. “보통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나요. 그런데 마을 어르신들에게 알아보니 임신부의 배 속에서 나온 아기의 무덤이 인근에 있었고, 최근에 이장했다더라고요. 이런 일들을 하나씩 발굴하는 게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평화’를 향한 그의 여정은 이곳 제주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었다. 비영리단체 제주다크투어는 역사체험을 진행하며 후원 회원을 모집한다. 투어나 후원 문의는 전화(064-805-0043)나 블로그 누리집(blog.naver.com/jejudarktours)로 하면 된다.
송호균 자유기고가
[편집자주]
‘이주자가 만난 이주자’에서는 10년 동안의 기자 생활을 뒤로하고 서울을 떠나 제주도민이 된 송호균씨가 제주 곳곳의 이주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