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안에 올레길이 있다면, 중산간에는 ‘한라산 둘레길’이 있다. 해발 600~800m의 국유림 일대를 둥글게 연결하는 총 80㎞ 길이의 ‘환상 숲길’이다.
전체 구간 중 무오법정사에서 동쪽 돈내코 계곡까지 13.5㎞에 이르는 동백길이 가장 먼저 조성됐고, 거린사슴오름 등 제주 서남부 오름들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돌오름길(5.6㎞), 이미 주요 관광지로 잘 알려진 사려니숲길(10㎞), 수악길(16.7㎞), 천아숲길(10.9㎞) 등이 순차적으로 정비됐다. 제주의 북부권, 즉 천아오름에서 사려니숲길까지의 구간 조성이 2019년에 마무리되면, 중산간 지역을 둘러 잇는 한라산 둘레길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다.
둘레길로 한라산은 더 쉽고, 더 재미있어졌다. 둘레길안내센터의 김동진(53)씨는 “우선 한라산 등반객을 분산해 유치한다는 의미가 있고, 상대적으로 부담 없이 한라산을 만날 수 있다는 장점도 크다”고 설명했다.
지난 1일 한라산 둘레길안내센터가 위치한 동백길을 찾았다. 국내 최대 동백나무 군락지를 통과하는 동백길은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원시림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생태·환경·역사 체험의 장으로 손꼽힌다. 동백꽃이 절정인 3~4월에는 일대가 새빨간 꽃잎으로 흐드러진다. 둘레길 입구부터 단풍나무, 때죽나무, 참꽃나무, 서어나무 등의 푸른 녹음이 펼쳐졌다. 최고의 삼림욕장으로 꼽히는 편백 숲길도 있다. 둘레길 일대의 식생은 모두 254종에 이른다고 한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초여름 날씨였지만, 둘레길은 싱그러운 봄날처럼 시원했다.
탐방객들이 한라산 둘레길 중 동백길 코스를 걷고 있다. 사진 한라산 둘레길 안내센터 제공
화전민들이 살았던 흔적인 숯 가마터에 이르자 이끼천이 나타났다. 물 대신 녹색 이끼로 뒤덮인 바위가 빽빽한 건천이다. 융단같이 부드러운 이끼가 가득한 바위들은 마치 누군가가 던져놓은 듯 환상적인 풍광을 만들어냈다. 말 그대로 한라산 원시림의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동백길 코스가 시작되는 법정사 터까지는 서귀포 시내에서 차로 불과 20여 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마실 물과 등산화 정도면 충분하니 준비물도 간단하다. 성판악이나 영실코스 등으로 대표되는 한라산 등반과 비교하면 동네 마실 수준이다. 코스마다 완주에 2시간에서 4시간 정도 소요되지만, 도중에 걷기를 중단하고 다시 큰길로 내려올 수 있는 퇴로가 곳곳에 있다. 완주에 전력투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가령 동백길의 중간 지점인 시오름에서 돈내코 쪽이 아닌 남쪽 ‘서귀포 치유의 숲’으로 내려가는 식이다. 상황에 맞춰 탐방 코스 구성이 가능하다는 것은 한라산 둘레길이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이다. 길 자체도 완만한 평지 지형이 주를 이룬다. 한라산을 ‘등반’하는 게 아니라 에둘러 돌아가는, 그야말로 트레킹 코스이기 때문이다.
춘천에서 가족여행을 왔다는 박지수(37)씨는 둘레길에서 ‘혼자만의 힐링’을 즐기고 있었다. 박씨는 “가족들은 아직 어린 조카와 바닷가에 갔다. 잠시 시간을 내어 혼자 한라산을 느끼러 왔는데 둘레길이 딱 맞는 것 같다”고 했다. 동백길에서는 불교계 항일운동의 본산인 무오법정사, 4·3 항쟁 당시 토벌대가 주둔한 망루와 돌담 등의 흔적, 일제강점기의 군수도로 등 생생한 역사 현장도 만날 수 있다.
개별 탐방도 좋지만, 둘레길의 자연과 생태, 역사와 문화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함께 걷는 체험 행사도 있다. 참가비는 없다. 오는 7월 28일에는 당일 일정으로 천아숲길을 둘러보는 ‘4차 아름다운 숲길 원정대’ 행사가 열린다. 지역 주민이나 청소년,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탐방도 주기적으로 열린다. 탐방 문의는 둘레길안내센터(064-738-4280)로 하면 된다.
송호균/제주도민이 된 육아 아빠·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