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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방송·연예

대선후보의 서브텍스트를 읽어라

등록 2012-12-06 20:08

영화 <카사블랑카>
영화 <카사블랑카>
김형준의 다큐 세상
대학 때 연극과 강의를 훔쳐 들었다. 희곡작법 수업이었다. 선생께서 문제를 냈다.

배경은 월남전이라고 하자. 파병 온 한국인 병사가 베트남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다. 전투가 없는 날이면 병사는 마을로 내려가 꿈같은 데이트를 했다. 전쟁은 끝났고 귀국일이 다가왔다. 짐을 꾸린 전우들은 이미 수송 헬기에 타고 있다. 저 멀리서 우리의 주인공은 여자의 손을 잡고 큰 소리로 무엇인가 약속하지만 프로펠러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마침내 긴 포옹을 마친 병사가 철모를 누른 채 헬기로 뛰어온다. 동료는 누구도 쉽사리 말을 건네지 못한다. 문이 닫히고 헬기가 떠오른다. 문제는 ‘여기서 긴 침묵 끝에 병사가 뱉을 대사는 무엇이어야 할까’였다. 학생 중 한 명이 손을 들었다. “난 꼭 돌아올 거야”는 10점. “그럼…, 돌아오고 말 거야?”는 빵점. “정말 사랑했는데”라는 신파조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참 뜸을 들인 선생의 답은 이랬다. “담배 있으면 하나만 줄래?”

대사가 인물의 심리를 곧이곧대로 드러내면 안 된다는 게 선생의 설명이었다. 본마음은 숨어야 하고 대사에는 흔적만 남아야 한다. 그걸 서브텍스트라고 부른다는 걸 지난달에 알았다. 로버트 매키라는 시나리오 작가의 강의에서 들었다. 일흔이 넘은 작가는 영화 <카사블랑카>(사진)의 ‘광팬’이다. 매키는 5시간 동안이나 <카사블랑카>가 가지고 있는 서브텍스트를 조목조목 분석했다. 험프리 보가트가 잉그리드 버그먼에게 꺼지라고 고함치지만 그의 서브텍스트는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다’는 것이다. 다음날 이 ‘터프 가이’는 여자에게 사과한다. 어제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이냐고 묻지만 여자는 대답을 거부한다. 여자의 서브텍스트는 ‘내 앞에 더 무릎을 꿇으라’는 것이다. 매키는 명작 <카사블랑카>는 끊임없는 서브텍스트의 연결이라고 말했다.

시나리오 작가가 대사 밑에 서브텍스트를 두는 이유는 간단하다. 일상 속 우리의 말이 대부분 서브텍스트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직장 상사가 새 넥타이를 매고 왔다. “어제 유명 백화점에서 샀는데 마음에 안 드네. 자네가 보기에는 어때?” 이 말의 서브텍스트는 넥타이 자랑이다. 여기에 대고 “제가 보기에도 색깔이 좀…”이라고 한다면 승진은 기대하기 힘들다. 여자친구를 집앞까지 바래다줬다. 여자친구는 “내 방 전등이 나갔는데…”라며 말꼬리를 흐린다. “그까짓 것”이라며 호기 있게 등만 갈아주고 나온다면 며칠 뒤에 차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큐멘터리 감독은 서브텍스트를 만들지 않고 찾는 게 직업이다. 촬영 대상이 본질을 숨기기 때문이다. 피사체가 사람일 경우에는 서브텍스트가 더 깊은 곳에 숨어 있다. 관찰하고 더듬어야 한다. 카메라 앞에서 뱉는 말들만 연결해서는 좋은 다큐멘터리가 될 수 없다. 그 사람도 모르는, 그 사람의 본질 속을 들여다보도록 노력한다. 때로 답을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 그때는 행동을 추적한다. 행동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

선거의 계절이다. 텔레비전 토론회가 이어지고 화려한 어구가 쏟아진다. 그렇다고 후보들의 말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 서브텍스트를 읽어야 한다. 물론 쉽지 않다. 훈련이 필요하다. 그때는 이런 방법을 쓰면 된다. 귀를 닫고 후보들의 지난 행동만 보는 것이다. 인물은 대사가 아니고 지문으로 말한다. 그날 연극과 선생이 내린 결론이었다.

김형준 교육방송 다큐멘터리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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