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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반세기 ‘길동무’ 손잡고 문화예술인 놀이터 열었어요”

등록 2021-06-09 04:15수정 2021-06-09 15:37

[짬] 익천문화재단 ‘길동무’ 김판수·염무웅 공동이사장

지난 6월4일 서울 방배동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의 사무실에서 염무웅(왼쪽)·김판수(오른쪽) 공동이사장이 재단 창립의 취지를 소개하고 있다. “우리 둘처럼 시인, 작가, 활동가들이 ‘길동무’를 만나는 사랑방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진 김경애 기자
지난 6월4일 서울 방배동 익천문화재단 길동무의 사무실에서 염무웅(왼쪽)·김판수(오른쪽) 공동이사장이 재단 창립의 취지를 소개하고 있다. “우리 둘처럼 시인, 작가, 활동가들이 ‘길동무’를 만나는 사랑방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진 김경애 기자
“그는 내 삶을 지켜준 마음의 지주입니다.” “그는 나와 우리 세대에게 삶의 본보기입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어 서로를 이렇게 소개할 수 있는 ‘길동무’가 있다면 분명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팔순의 두 길동무가 손잡고 앞장서 걸으며 다음 세대의 앞길을 밝혀준다면 분명 시대의 축복일 것이다. 지난 3월 비영리 공익법인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를 꾸리고 공동이사장을 맡은 김판수(79) 호진플라텍 회장과 염무웅(80) 국립한국문학관장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이제 익천문화재단 길동무는 한없이 조촐하고 겸허한 자세로 이 삭막한 자본의 시대에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의 옛 가르침을 감히 본받고자 합니다. 거대한 물질문명의 위력과 혼탁한 시대의 가난으로 날이 갈수록 왜소하고 남루해지는 이 땅의 모든 문화예술인들, 특히 시인, 작가와 시민사회 활동가들에게 문화재단 길동무의 소박한 공간이 작으나마 삶의 온기와 위로, 용기를 줄 수 있는 쉼터이자 놀이터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꿈꿔봅니다.”

지난 4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작은 빌딩 3층에 자리한 재단 사무실에서 두 길동무를 만났다.

1968년 서울대 문리대 동문들 ‘인연’
69년 ‘유럽 유학생 간첩단 사건’ 고초
지난 3월 비영리 공익재단 함께 창립
오는 11일 ‘길동무인문학당’ 첫 행사

우선 둘의 첫 만남이 궁금했다. 염 이사장은 서울대 문리대 독문과 60학번, 김 이사장은 영문과 61학번이다. “판수와 처음 인사를 나눈 건 내가 ‘창작과비평’ 편집에 참여하기 시작하던 1968년 봄쯤, 대학 동기인 김신근이란 친구가 판수와 광주일고 동창이어서, 신근이가 다리를 놓았을 겁니다. 우리는 소개를 받자마자 금방 친해졌지요. 본능적으로 서로 동류라는 느낌이 들었달까요. 특히 ‘이청준 문학에 대한 비평’으로 서로 잘 통했어요. 셋이 등산도 자주 했지만, 차츰 신근이가 끼지 않아도 판수와 둘이 만나서 밥도 같이 먹고 그의 자취집에도 놀러 갔어요. 그때 나는 석사학위를 마치고 대학에서 조교 노릇을 막 시작한 터였고, 판수는 (영국과 덴마크) 유학에서 돌아와 여동생과 방을 얻어 지내고 있었죠. 그 무렵 나는 김지하 같은 친구를 판수에게 소개했고, 지하는 또 다른 친구를 끌고 와서 판수의 여동생과 짝을 맺게도 했지요.”

염 이사장의 회고대로, 그렇게 시작된 둘의 인연은 뜻밖의 사건으로 ‘야만의 시기’에 휩싸인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날짜죠. 1969년 5월1일, 다짜고짜 기관원들이 들이닥쳐 중앙정보부로 끌려갔으니까요.”(김 이사장) “난 5월3일쯤 중구청 건너편에 있던 중정(중앙정보부) 분실로 끌려갔어요. 신근이의 거처를 불라며 달했어요. 이청준을 비롯해 신근이의 광주 중고교 친구들이 줄줄이 당했어요. 대부분 그 직전에 결혼한 광주일고 동창생의 단체 기념사진 속 인물들이었죠.”(염 이사장)

일주일 뒤 김신근이 잡혔고, 그로부터 일주일 만에 중정은 거창한 조직도와 함께 이른바 ‘유럽·일본 거점 유학생간첩단’이란 누명을 씌워 발표했다. 김 이사장의 유럽 유학을 주선하고 동베를린 방문을 권유한 고향 선배 박노수 교수와 그의 대학동창인 여당 국회의원 김규남은 결국 1972년 사형을 당했고, 김신근은 7년, 김 이사장은 5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박정희 장기독재 시나리오의 하나였던 이 사건으로 둘의 인연도 엇갈릴 수밖에 없었다. “동베를린 방문 얘기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솔직히 깜짝 놀라고 겁도 나고, 그래서 재판정방청도가고 거리를 뒀어요. 사건 직후 약혼하고 그해 가을 결혼도 한데다 ‘창비’ 편집도 맡게 되어서 개인사로 분주했지만, 지금까지도 내내 죄스런 감정이 있죠.”(염 이사장) “1973년 풀려났지만 내내 ‘낭인’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에 나 역시 연락할 겨를이 없었어요. 하지만 ‘창비’를 열독하고 후원하면서 문학적 감성과 시대에 대한 공감을 확인하며 버틸 수 있었어요. 훗날 다시 세상 속으로 나올 수 있게 해준 유일한 연결고리였던 셈이죠.”(김 이사장)

1970년대 후반 이후 민주화 관련 모임이나 집회에서 자연스럽게 재회를 했지만 둘은 각자 생업의 현장에서 80년대 격변의 시기를 겪느라 교유할 여력이 없었다. “1973년 덕성여대 전임교수가 됐는데 3년 만에 해직됐어요. 독재정권이 만든 재임용법의 첫 희생양이었죠. 자유실천문인협의회나 금요기도회의 성명서를 쓰고 서명한 ‘괘씸죄’로 남산 지하에도 끌려가 구금되기도 했고…. 그러다가 1980년 초 이수인 선생의 주선으로 대구 영남대 교수로 복직됐어요.”(염 이사장) “1979년 금속도금 전문업체인 호진실업(호진플라텍의 전신)을 창업해 혼자 고군분투하느라 80년 5월 광주의 참상을 전해 듣고도 달려가지 못했어요. 보잘것없는 자산이나마 일궈 나누고자 하는 것도 그때의 부채감을 덜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르겠어요.”(김 이사장)

금속도금 전문업체 호진플라텍 창업주이자 회장인 김판수 이사장은 주식배당금 등 개인 자산을 출연해 익천문화재단을 세웠다. 수십년째 문화계와 시민사회단체 구석구석 도와온 그의 후원 규모는 연간 1억원 안팎을 헤아린다. 사진 김경애 기자
금속도금 전문업체 호진플라텍 창업주이자 회장인 김판수 이사장은 주식배당금 등 개인 자산을 출연해 익천문화재단을 세웠다. 수십년째 문화계와 시민사회단체 구석구석 도와온 그의 후원 규모는 연간 1억원 안팎을 헤아린다. 사진 김경애 기자
옥고 뒤 ‘호진플라텍’ 일군 김 이사장
80년대 후반부터 ‘창비’ 등 후원 앞장
“염 이사장은 삶 지켜준 마음의 지주”

문학비평가이자 영남대 명예교수인 영무웅 국립한국문학관장은 문단의 원로로서 후학들의 앞길을 열어주고자 기꺼이 재단의 공동 이사장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진 김경애 기자
문학비평가이자 영남대 명예교수인 영무웅 국립한국문학관장은 문단의 원로로서 후학들의 앞길을 열어주고자 기꺼이 재단의 공동 이사장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진 김경애 기자
‘창비’ 편집·해직교수 거친 염 이사장
70·80년대 문인 민주화 운동 앞장
“김 이사장은 우리 세대 삶의 본보기”

두 친구가 다시 가까워진 계기는 1987년 6월항쟁이었다. “그때 기초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덕분에 난생처음 여권이 나왔어요. 마침 안식년이어서 판수의 안내로 무난히 독일을 갈 수 있었죠.”(염 이사장) “사업차 유럽 출장을 자주 다녔던 까닭에 기꺼이 안내를 맡았어요. 리영희 선생님의 친구로 뮌헨에 정착한 안석교 선생님과 셋이서 알프스 등산을 했던 기억이 새롭네요.”(김 이사장) 1992년엔 김 이사장과 서울대 문리대 동기인 김정남 전 청와대 수석과 ‘박종철 고문치사의 진실’을 폭로했던 전병용 전 교도관과 네명이 보름 남짓 또 한차례 유럽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염무웅·김정남, 두 ‘길동무’의 격려와 지지 덕분에 사업을 일궈 사회에 기여한다는 소신을 키워올 수 있었어요. 쟁쟁한 문인들과 민주사들 틈바구니에 끼어, 잘 못하는 술잔이나마 기울이며 시절을 논하고 앞날을 내다보는 지혜도 귀동냥할 수 있었고요.”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다양한 단체에 드러나지 않게 후원을 해왔던 김 이사장은 1995년 호진플라텍으로 재창업해 연 매출 200억원대의 건실한 기업으로 성장하자 해마다 4월 주식배당금을 사회에 내놓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아예 전 사원에게 주식을 나눠줘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그때 아내와 두 딸의 몫도 다 나눠주면서, 내 몫은 죽기 전에 다 쓰겠다는 결심을 밝혔어요. 물론 다들 지지해줬죠.”

염 이사장이 1974년 창립 때부터 활동해온 작가회의를 비롯해, 2008년 꾸린 임화문학연구회에도 김 이사장은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고, 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리영희재단, 녹색평론 등도 조용히 꾸준히 도와왔다. 그는 읽고 싶은 책을 대량 구매해 지인들에게 나눠주며 페이스북을 통해 널리 홍보도 해줘 ‘키다리 아저씨’로도 불린다.

이처럼 늘 한 발자국 뒤에 서 있던 그가 재단까지 꾸려 ‘이사장’ 명함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지난해 10월께 고교 후배인 고 김남주 시인을 기리는 문학상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송경동 시인과 의논을 하다가, 한 사람만이 아니라 비슷한 처지의 문화예술인들을 두루,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방법으로 재단을 만들게 됐어요.”

김 이사장은 “혼자 이름을 내걸기가 부끄러워” 공동 이사장을 제안했고, 이에 염 이사장도 흔쾌히 동의해줬다. “솔직히 청년 시절 민주화운동 이력을 ‘훈장’처럼 내세우며 평생 자리를 탐하는 ‘건달’ 같은 이들이 적지 않은 세태 속에서, 판수처럼 자신을 한없이 낮추며 젊은 시절의 소신을 변치 않고 실천하는 친구는 귀한 존재이지요. 들러리나마 함께할 수 있으니 고마울 뿐이고요.”

재단 사무국에는 중견 문인들이 합류했다. 왼쪽부터 상임이사 송경동 시인, 김판수·염무웅 공동이시장, 사무처장 하명희 소설가. 사진 김경애 기자
재단 사무국에는 중견 문인들이 합류했다. 왼쪽부터 상임이사 송경동 시인, 김판수·염무웅 공동이시장, 사무처장 하명희 소설가. 사진 김경애 기자
재단 이름의 ‘익천’과 ‘길동무’는 무슨 뜻일까. “대전교도소 수감 시절 선배가 지어준 호가 ‘익천’이고, 회사 이름 ‘호진’에 ‘함께 전진한다’는 을 담았어요. ‘길동무’의 시초 같은 뜻인데요, 수감 시절 기타를 배우며 독학으로 작곡한 노래 중에도 ‘길동무’가 있었죠.”

김 이사장은 창립선언문에 밝힌 것처럼, 감사와 나눔·우애와 연대로 가득 찬 아름다운 사람들의 공동체를 위해 일하는 작은 공공의 자산이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재단은 6월11일 창립 첫 행사로 ‘길동무인문학당-말뜸’을 연다.
재단은 6월11일 창립 첫 행사로 ‘길동무인문학당-말뜸’을 연다.
재단 살림은 송경동 시인이 상임이사로, 하명희 소설가가 사무처장을 맡기로 했고, 청년문학교실·길동무문학창작기금·익천사회연대기금·한국사회기층문화보고서 발간 등의 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오는 11일에는 재단을 알리는 첫 행사로 ‘길동무인문학당'을 연다. 말뜸(이야기마당)의 첫 주자로 김 이사장이 ‘내 인생의 잊지 못할 길동무들’을 소개할 참이다. 7월 두번째 주자는 팔순기념 산문집을 발간하는 염 이사장이다.

온-오프라인 동시 진행하며, 참가자는 구글시트(http://bit.ly/길동무참가신청)와 전화(02-535-3465)로 사전 신청을 받는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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