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신하도록 ‘불법’ 개조된 검은색의 ‘모범’택시 안에는 아날로그 녹음 장치가 있다. 카오디오에 장착된 녹음테이프에는 공권력의 사각지대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해자들의 고통스러운 사연이 넘쳐난다. 검찰에서는 백명의 범죄자를 풀어주더라도 단 한명의 억울한 죄인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공언하지만, 공권력 집행의 정당성에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적지 않은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문득, ‘550여만원 절도죄’를 저지르고 교도소 이감 중에 탈출한 뒤 서울에서 인질극을 벌였던 1988년 지강헌 사건이 떠오른다. 그는 수백억원을 횡령한 전두환의 동생인 전경환과 자신의 형량을 비교하며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울부짖었다. 30여년이 훌쩍 지난 2021년 현재,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해소되기는커녕 ‘유권무죄 무권유죄’라는 말이 통용될 정도로 공권력에 대한 불신은 오히려 더 깊어졌다. 김도기의 ‘모범택시’가 운행을 시작한 이유다.
<모범택시>(에스비에스)에서 김도기(이제훈)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특수부대 장교에서 모범택시 기사로 전직했다. 그는 평소 무지개운수의 일반택시 기사로 일하지만, ‘복수대행 써-비스’ 요청이 들어오면 모범택시 기사로 변신한다. 피해자들의 억울한 사연을 동료들과 함께 검토하여 접수 여부를 결정하고, 복수대행 방식을 설계해 실행에 나선다. 그가 검은 선글라스와 검은 가죽장갑을 착용하고 모범택시 운전대를 잡으면, ‘법원권근’(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현실에서 위기에 빠졌던 사회적 약자들의 억울함이 해소된다. 지적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노동력 착취에 성적 유린까지 당하면서도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젓갈 공장 여성 노동자는 소소한 행복을 되찾았고,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남자 중학생도 삶의 주체성을 회복했다.
장애 여성 노동 착취나 학교폭력이 주변 사람의 침묵으로 방치된다면, 디지털 성범죄나 전화 금융사기는 법적 처벌이 약해서 근절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이든 사회적 약자들이 공적 영역에서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해 발생한 범죄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김도기는 모범택시에 탑승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해자들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어눌한 말투의 순진한 기간제 교사로 학교폭력 가해 학생들을 상대하거나, 어벙한 모습의 유학파 프로그래머가 되어 디지털 성범죄의 온상을 송두리째 폭파하는가 하면, 치명적 매력의 재중동포 출신 왕 선생으로 변신하여 전화 금융사기 조직을 일망타진해 망망대해에 감금도 한다.
김도기가 복수대행 서비스를 설계하고 실행하는 과정은 공적 영역의 법 집행과 성격이 다르다. 사회적 약자들의 억울함을 해소하는 해결사를 자처하는 그는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적 복수대행 과정에서 납치와 폭행, 감금 등의 불법을 서슴지 않는 이유다. 법의 테두리 밖에서 복수대행에 나서는 김도기가 어둠의 세력을 상징하는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사적 복수대행 과정의 적법성보다 중요한 것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억울함이 해소되지 않는 문제적 현실이다. 이는 어머니를 살해한 연쇄살인마의 법적 처벌을 납득하지 못했던 그가 비슷한 고통을 겪던 무지개운수 대표 장성철(김의성)과 함께 불법으로 강력범죄사건 피해자들의 복수대행에 나서는 명분이기도 하다.
김도기는 사회적 약자들의 억울한 사연을 낡은 테이프에 녹음해서 재생하고, 피해자들이 복수대행 서비스 선택 여부를 결정할 때도 낡은 게임기나 노래방 기기를 이용한다. 디지털 미디어 장치가 넘쳐나는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지만, 사회적 약자들의 억울함이 어제오늘 발생한 것이 아니라 정의의 보편타당성이 훼손된 이후 오랫동안 반복되었다는 시간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선명하게 각인된다. 돈이나 권력이 없다는 이유로 무한정 법적 해결을 기다리거나, 가슴에 피멍이 든 채로 법적 대응을 포기해야 했던 사회적 약자들이 마지막 방법으로 모범택시 복수대행 서비스를 선택하는 심정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다만, 노동 착취와 학교폭력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디지털 성범죄와 금융사기 범죄를 응징하는 김도기의 활약상에 많은 사람이 박수갈채를 보내며 통쾌해하는 까닭은 분명하다. 공권력 사각지대에서의 사적 복수를 통해서라도 정의가 구현되기를 바라는 사회적 바람이 김도기를 현대판 일지매로 부활시킨 것이다.
개탄스럽지만, 김도기의 모범택시는 오늘도 운행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초범이라거나 심신미약이라서, 또는 반성하거나 피해자와 합의했다는 이유로 강력범죄 가해자들이 감형이나 집행유예 선고를 받는 현실에서 복수대행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들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공권력이 자본이나 정치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현재로선 그가 언제쯤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이나 사회적 약자 모두에게 ‘법’과 ‘정의’가 동일하게 적용될 때 김도기의 모범택시가 모든 운행을 종료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쉽지 않겠지만,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운행 종료하겠습니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가 하루라도 빨리 ‘바른 생활 사나이’의 일상을 회복하기를 고대한다.
충남대 국문과 교수·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