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즈음 나는 심란한 청춘이었다. 1987년 6월 항쟁의 성취와 13대 대통령 선거의 좌절 속에서 하릴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매일 친구 자취방에 서넛이 모였다. 한 일이라고는 음주와 논쟁뿐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시며 시국을 성토하고 각자의 개똥철학을 펼쳤다.
그때 <한겨레>를 만났다. 가난한 내 친구는 <한겨레> 창간 독자였고, 자취방 여기저기 널려 있는 <한겨레>를 친구들과 돌려가며 읽었다. 편집이 생경했다. 가로쓰기와 한글 전용이 낯설었다. 당시는 국한문을 혼합해 썼고, 세로쓰기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앞서간 것이었다. 요즘 어느 신문도 국한문을 혼용하거나 세로쓰기를 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서 <한겨레>는 더 눈에 띄었다. 귀가하는 버스 안에서 <한겨레>를 읽는 일은 자긍심 그 자체였다. 그것은 각성한 젊음의 표상이었고, 일신의 영달만을 꾀하지 않는다는 징표 같은 것이었다. <한겨레> 독자라는 게 말할 수 없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요즘도 가끔, 매우 이따금 지하철에서 <한겨레>를 보고 있는 젊은이를 본다. 어찌나 믿음직하고 대견한지.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난 날 그는 자신의 정치철학은 ‘억강부약’(抑强扶弱)이라고 했다. 대통령에 당선돼 인수위원회를 가동한 첫날이었다. 나는 억강부약이란 말을 처음 들었다. <한겨레>를 처음 볼 때 느꼈던 그런 생소함이었다. 찾아보니 ‘강한 것을 누르고 약한 것을 돕는다’는 뜻이었다. 대통령이 그렇게 대놓고 강한 것을 억누르겠다고 해도 되나?
살아보니 강자 편에 서는 게 편하다. 떡고물이 떨어진다. 불이익도 당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회주의가 득세할 수밖에 없다. 강자는 더 강해지고 약자는 더 약해진다. 이를 누가 막을 것인가. 정치가 이 일을 해줄 수 있는가. 하려는 의지는 있는가. 있다면 이를 독려하고 감시하는 역할은 누가 할 것인가. 과연 언론은 이 일을 잘하고 있는가. 혹여 편들어주고 대변해주지 않아도 되는 쪽에 서 있진 않은가. 기울어진 운동장의 기울기를 더 가파르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첫 책 <대통령의 글쓰기>가 나온 2014년, <한겨레>는 ‘올해의 책’으로 선정해줬다. 그래서 하는 말이 아니다. 억강부약의 시대적 소명을 감당할 언론은 어디인가. 어느 언론이 공정의 가치를 실현할 의지와 역량을 갖추고 있는가. 나는 마땅히 <한겨레>라고 생각한다. 33돌을 맞아 <한겨레>가 시도하는 후원회원제가 이런 시대적 소명을 수행하는 데 밀알이 되길 바란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한겨레>를 보고 있는 젊은이를 만나고 싶다. 이미 어른은 아쉬울 게 별로 없다. <한겨레>에 기대할 것도 없다. 문제는 젊은이다. 사회적 약자인 청춘들이다. 혹여 지하철 옆자리의 늙수그레한, 하지만 잘생긴 ‘아재’가 반갑게 말 걸어오거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라. 휴대전화로 또는 종이신문으로 <한겨레>를 보고 있는 당신을 만난 것이 반갑고 기특하고 고마워서 그런 것이니.
강원국(<대통령의 글쓰기>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