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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발레리노 되고픈 칠순어른이 온몸으로 보여준 나래짓

등록 2021-04-30 18:12수정 2021-05-01 02:32

[윤석진의 캐릭터 세상] ‘나빌레라’ 심덕출
드라마 <나빌레라> 장면. 티브이엔 제공
드라마 <나빌레라> 장면. 티브이엔 제공

칠순의 심덕출(박인환)이 경쾌한 목소리로 스물셋의 발레 선생을 “채록아~ 채록아~” 부를 때마다 나의 무의식에 봉인되어 있던 꿈이 꿈틀거린다. 그리고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살아온 날들보다 적게 남은 날들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이 많아진다.

알츠하이머로 기억이 지워져가는 순간, 날아오르고 싶었던 꿈을 다시 꾸기 시작한 심덕출의 둔하지만 간절한 나래짓이 먹고사느라 애써 잊고 살았던 사람들의 꿈을 깨웠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정말 잘하고 싶어 안간힘을 쓰는 심덕출이, 자의반 타의반 꿈을 포기하고 각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꼴이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내려올 준비를 하던 사람들은 그렇게 심덕출과 함께 꿈의 무대 위로 올라간다.

<나빌레라>(tvN)의 심덕출은 어려운 형편에 가족을 부양하느라 애써 지워버렸던 발레리노의 꿈을 칠순의 나이에 다시 찾은 인물이다. 그는 “기저귀를 차거나 손자·손녀 기저귀를 채워주거나 둘 중 하나인 나이”에 “삶은 딱 한번이더라. 두번은 아니야”라며 “죽기 전에 나도 한번은 날아오르”고 싶은 간절함으로 스물셋 청년 이채록(송강)의 제자이자 매니저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 무용수가 되기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고, 가족의 반대도 만만찮았지만,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해, 할 수 있을 때 망설이지 않으려고, 끝까지 한번 해보”겠다는 의지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젊은 선생의 마음을 움직였다. 평생을 그와 함께 자식들을 건사했던 아내 최해남(나문희)도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다.

드라마 &lt;나빌레라&gt; 장면. 티브이엔 제공
드라마 <나빌레라> 장면. 티브이엔 제공

심덕출의 간절함은 속절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붙잡지 못한 채 늙어가는 초조함이나 불안감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하고 싶은데 못하는 상황이 오거나,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상황”에 대한 무서움이 그를 움직였다. 기억이 지워진 순간 갑자기 음악이 들렸고, 발레리노가 보였고, 청년이 날아올랐고, 어린 시절에 꿈꾸었던 발레리노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그는 바로 그곳에서 발레를 배우고 싶었다. 알츠하이머 증상 때문에 기억이 지워진 순간, 잃어버렸던 발레리노의 꿈을 되찾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면서 그는 칠순의 나이에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우리 사회의 고령화가 정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것과 달리 노년 세대에 대한 정책 마련이 쉽지 않아 여러모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에서 심덕출은 비슷한 연배의 세대들에게 삶의 방향타가 되어주었다. 사라져가는 기억을 놓치지 않으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수첩에 기록하다가도 정신을 잃은 순간에 기억해야 한다며 속울음을 삼키고, 정신이 돌아온 뒤 “엄마 아버지, 나 어떻게 해요” 하며 흐느끼는 그를 보면서 많은 사람이 함께 눈물 흘리며 그의 꿈을 응원했던 것도 그래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잃어버리거나 지워버린 꿈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이와 상관없이,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보다 꿈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나래짓 하나하나가 감탄이 아닌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도 그래서다.

심덕출은 퇴직 후 뭘 해야 할지 모르는 허망함으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노인이기를 거부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나섰다. 때로는 자기 기분에 들떠 조급해하다가 자신보다 어린 선생(들)의 질책을 받기도 하지만, 이내 잘못을 인정하고 기본 동작 연습에 매진한다. 나이를 앞세워 어른 행세 하려는 일부 사람들 때문에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는 탄식이 끊이지 않는 세태 속에서 그의 존재감이 남다른 까닭이다. 이처럼 노년의 지혜 위에 얹어진 열정은 숨이 턱까지 차오를 만큼 죽어라 뛰어도 제대로 되는 것 없는 현실에 좌절하고 절망하는 청년들의 용기를 북돋는다. 부모가 짜놓은 틀에서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던 손녀 심은호(홍승희)와 축구선수의 꿈을 대신 이뤄주기 바라는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자신의 재능과 상관없이 혹독한 훈련을 받았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채록은 물론, 축구감독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망가졌다고 생각하며 엇나간 양호범(김권)까지 이들은 모두 삶에 대한 심덕출의 진정성에 감화되어 각자의 꿈을 향해 날아오른다.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했어도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삶을 살아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경받아 마땅한 수많은 어른 모두가 심덕출이다. 기억이 지워지고 있지만, 그는 온몸으로 말한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지만, 꿈을 잃어버리면 삶이 행복하거나 아름다울 수 없다고. 평탄치 않은 세월을 살아오면서 결과로서의 완성태가 아닌, 과정으로서의 생성이 꿈의 속성임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어쩌면 이루어지지 않기에 꿈이고, 그것이 있기에 삶이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몸이 기억하는 나래짓을 펼치는 칠순의 발레리노 심덕출에게 기립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우리 모두 오래된 미래로서의 꿈을 다시 꾸게 되기 바란다. “채록아, 채록아~” 또 다른 그를 부르는 심덕출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꿈의 무대 위로 올라갈 시간이다.

충남대 국문과 교수·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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