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마틴 에덴>
교육 제대로 받지 못한 선원
상류층 여성과 사랑에 빠져
계급 상승 위해 ‘작가의 길’
결국 성공 얻고 사랑은 잃어
틀은 고전적이나 빼어난 연기
회화 전공한 감독 영상미 압권
‘영상-회화’ 경계선 트기 집대성
<마틴 에덴>
교육 제대로 받지 못한 선원
상류층 여성과 사랑에 빠져
계급 상승 위해 ‘작가의 길’
결국 성공 얻고 사랑은 잃어
틀은 고전적이나 빼어난 연기
회화 전공한 감독 영상미 압권
‘영상-회화’ 경계선 트기 집대성
<마틴 에덴> 속 연인들이 그들 사이에 놓인 계급적 크레바스의 시커먼 아가리를 보면서 느끼는 공포는 지금의 우리가 일상적으로 체감하고 있는 계급적 공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원작으로부터 111년이 흐른 지금에도 이 사랑 이야기가 파괴력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 공명 때문이겠다. 알토미디어㈜ 제공
사랑은 ‘동화나라 이야기’가 아니므로 잘생기고 총명하며 터프한 선원 ‘마틴 에덴’(루카 마리넬리)은, 하지만 초등학교 교육도 제대로 못 받은 맨주먹 청년이다. 그는 어느 날 우연한 계기로 부호 ‘오르시니’ 집안의 딸 ‘엘레나’(제시카 크레시)를 알게 됨과 동시에 사랑에 빠지고,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 당신처럼 말하고, 당신처럼 생각하고 싶어요”라는 대사로 압축되듯, 마틴은 엘레나와 그녀가 속해 있는 세계에 진입하기 위한 사투를 시작한다. 문법을 배우고, 맞춤법을 익히고, 책을 읽고, 그리고 마침내 맨주먹만으로 가장 빨리 ‘그녀와 어울리는 남자’가 될 수 있는 길인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훗날 그는 ‘작가’라는 목적지를 입력해준 것이 엘레나보다는 그의 재능과 충동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지만. 아무튼.
알토미디어㈜ 제공
주인공 ‘마틴’ 역의 루카 마리넬리는 동경과 열망으로 가득 찬 청년에서부터 껍데기만 살아 있는 산송장까지, 한 인물의 역사 그 자체가 되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가속시켜 나간다. 알토미디어㈜ 제공
극영화가 주지 못했던 감흥이 이곳에 그리고 거친 듯 섬세하고, 단순한 듯 여러 겹인 이 사랑 이야기에 흔치 않은 수준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틴 역의 루카 마리넬리가 보여주는 옥탄가 드높은 연기다. 동경과 열망으로 가득 찬 청년에서부터 껍데기만 살아 있는 산송장까지, 한 인물의 역사 그 자체가 되어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가속시켜 나가는 그의 연기는, 단순백색인 듯 보이지만 붓질을 하는 순간 뚜렷하게 표면 질감을 드러내는 ‘젯소’에 비유할 만한 제시카 크레시(엘레나 역)와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극장 천장을 뚫고 올라갈 듯한 에너지를 발생시킨다. 그의 연기를 두고 ‘젊은 날의 로버트 드니로’를 거론하는 세간의 평은 과연 과장이 아니다. 여기에 이 영화의 관람성 제고의 또다른 요소인 시각적 아름다움이 가세한다. 무엇보다 눈에 띄고, 또 그만큼 생소할 수도 있지만,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은 각종 기록화면(archive footage)들과 다큐멘터리 화면들의 등장이겠다. <마틴 에덴>에서는 ‘일반적인’ 극영화 장면들의 중간중간에 영사기 램프의 열기에 녹은 자국 그대로 보이는 오랜 기록 필름들부터 감독이 직접 촬영한 현재의 기록들, 그리고 다큐처럼 촬영된 연출 화면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데, 이것은 언뜻 짐작·걱정하시는 것처럼 난해하거나 난삽하지 않다. 오히려 이 화면들은, 원작의 배경인 20세기 초 샌프란시스코를 20세기 중후반(쯤 되는 모호한 시대)의 이탈리아 나폴리(부근의 어딘가 미지의 항구도시)로 바꿔놓은 영화의 선택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일반적인 극영화에선 경험하기 어려운 시각적·정서적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알토미디어㈜ 제공
110년이 지나도 생생한 질문 사실 이 파국을 불러오는 근본적인 동력인 정치사회적 긴장과 균열, 그리고 그에 대한 마우리치오 브라우치(시나리오 작가)와 마르첼로 감독의 고민이야말로 필자 개인적으로 <마틴 에덴>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었지만, 이 영화의 기초 관람성을 얘기하는 사이에 벌써 지면이 거의 소진된 관계로 아쉽게도 줄여야겠다. 아무튼 2019년 공개 당시 이 영화가 110년 전 잭 런던의 소설에서 압착해낸 예언적 문제의식의 엑기스, 즉 ‘노예들은 그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려 하지만, 결국 또 다른 지배자를 세울 뿐’이라는 파시즘과 스탈리니즘의 시대를 거쳐 현재까지도 아우르는 문제의식, 그리고 집단주의에 맞선 개인(존중)주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 등은 <조커>나 <언힌지드> 같은 분노영화들이 거론하려 했으나 장르적 분풀이에 갇혀 끝내 다다르지 못한 지점임에 틀림없다. 물론 이 영화는 인류의 평생 숙제와 같은 이 질문에 답을 내놓지 못하고, 마틴 에덴은 이 질문으로부터 아주 먼 곳을 향해 헤엄쳐 가지만, 질문은 그럼에도 유효하다. 질문 자체만으로도. 110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노예가 너무 많아진” 이 시대에. 아무튼. 영화를 보는 내내 뜨거워진 가슴이 좀처럼 식지 않았다. 이런 경험 얼마 만인가.
▶ 한동원 영화평론가.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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