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살아있다>
좀비가 된 낙오자들의 공격
인터넷·모바일 연결 끊기고
외부 접촉이나 탈출 못 하는
자가격리가 최선인 재난상황
탈출구 없는 아파트에 갇혀
‘타인과 연결’ 필사의 노력
좀비 피해 더 높은 꼭대기로
‘뚝 떨어질’ 구원은 있을까
<#살아있다>
좀비가 된 낙오자들의 공격
인터넷·모바일 연결 끊기고
외부 접촉이나 탈출 못 하는
자가격리가 최선인 재난상황
탈출구 없는 아파트에 갇혀
‘타인과 연결’ 필사의 노력
좀비 피해 더 높은 꼭대기로
‘뚝 떨어질’ 구원은 있을까
영화 <#살아있다>에서 눈여겨볼 한가지는 스펙터클 자체보다는 그것의 시점이다. 아파트 중층인 ‘준우’(유아인)의 집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는 아파트 단지의 풍경, 평범함과 지루함 그 자체인 풍경을 좀비 스펙터클의 배경으로 채택한 건 ‘단번에 무너진 일상’을 시각적으로 가장 간단하면서도 확실하게 보여주는 선택이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질주하는 좀비’와 ‘좁은 실내’ <#살아있다>는 그 둘 사이, 즉 초기 좀비영화의 저예산스러움과 현대 좀비영화의 고예산스러움 사이에 끼어 있다. 즉 이 영화에서는, 이젠 거스를 수 없는 좀비 표준으로 자리잡은 ①공격형 고속질주 좀비와, 멀게는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부터 가까이는 <부산행>까지 면면이 좀비 및 종말무비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②실내고립/생존무비의 전통이 아파트와 아파트 단지라는 공간에서 공존하고 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대체 ①과 ②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단 말인가. 예컨대 ‘이동하는 고립공간’이라는 절묘한 설정으로 ①과 ②를 자연스럽게 공존시킨 <부산행>과는 달리, 영화가 설정한 주요 공간이 남주인공 ‘준우’(유아인)의 추정 전용면적 70㎡가량의 실내인 마당에. 좀비와 함께 무한 수건돌리기라도 하지 않는다면 질주 좀비와 좁은 실내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그닥 많아 보이지 않는다. 하여 결국 우리는 이 질문을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다. ①과 ② 중 어느 쪽이 승자가 될 것인가? 이것이 <#살아있다>를 둘러싼 핵심 감별포인트 중 하나다. 영화는 심취 게이머로서 실내생활에 매우 능해 보이는 준우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는가 싶더니, 도입부를 극단적으로 줄이는 최근 트렌드 그대로, 준우가 뉴스를 보며 흘리는 “저게 뭐야…”라는 신음을 신호탄으로 곧장 본격적인 좀비 발흥 상황으로 돌입한다. 그리고 오프닝 크레딧이 나오기도 전에 좀비 스펙터클이 제공된다. 비명을 지르며 아파트 중간의 지상주차장으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그 뒤를 쫓아와 덮치고 물어뜯는 좀비들, 그리고 좀비로 변하는 사람들, 탈출하는 사람들과 뒤엉켜 꼼짝 못 하는 자동차, 그 아비규환 한가운데를 밀고 들어와 다른 차를 들이받고서야 멈추는 소방차, 그리고 그 상공을 (딱히 하는 것 없이) 지나는 헬기 등등, <#살아있다>가 내놓는 좀비 스펙터클은, 비록 놀랍지는 않더라도 좀비영화에서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바를 충족시키기에는 충분하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스펙터클 자체보다는 그것의 시점이다. 아파트 중층인 준우의 집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는 아파트 단지의 풍경, 일상과 평범과 지루 그 자체인 풍경을 좀비 스펙터클의 배경으로 채택한 <#살아있다>의 선택은, 예산상승 억제뿐만이 아니라, 모든 전염 창궐 상황이 가진 기본적 정서 충격인 ‘단번에 무너진 일상’을 시각적으로 가장 간단하면서도 확실하게 보여주는 선택이라는 점에서 영리했다 할 것이다. 그렇다. 무너지는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꼭 맨해튼 한복판으로 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고립, 좀비가 안 되려는 선택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 준우는, 외부와의 접촉이나 탈출이 아닌 자체 자가격리라는 선택을 내린다. 타이틀 시퀀스가 채 등장하기도 전에 호되게 겪은, 한차례의 좀비화 위기 때문이다. 덕분에 영화의 공간은 준우의 집 안으로 좁혀지고, 영화는 좀비영화에서 조난영화의 형국을 취하게 된다. 이러한 실내고립형 조난영화의 비교적 최근의 예로는 <클로버필드 10번지>가 있겠는데, <#살아있다>의 준우가 놓인 상황은 <클로버필드…>의 인물들보다 훨씬 더 영화적으로 가혹하다. 영화가 초기에 적극 활용할 듯 보였던 각종 인터넷/모바일 연결들이 끊겨버림으로써 준우의 고립은 완전히 ‘1인 고립’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현재 우리가 맞은 코로나 시국을 마치 예견이라도 한 듯한 전개지만, 시의적절한 타이밍이 이야기의 설득력으로 자동연결되는 것은 아닌 법. 우리의 주인공 준우는 1인 고립이 원천적으로 품고 있는 난점, 즉 혼자서 관객의 흥미를 자아낼 갈등/긴장을 만들어가야 하는 난관을 맞닥뜨리게 된다. 게다가 아파트라는 좁고 한정된 공간 안에서 말이다. <#살아있다>가 스스로에게 던진 이 문제가 얼마나 풀어가기 어려운 것인지는, <28일 후>의 감독 대니 보일의 1인 조난영화 <127시간>을 보더라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겠는데, 아무튼 영화는 조난영화의 일반적인 흐름대로 이틀째, 7일째, 10일째, 15일째…로 누적되는 고립시간에 따른 준우의 상태 변화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현재 우리의 문명에 대한 뼈 있는 비판이나 인간존재에 대한 새로운 통찰(예컨대 <캐스트 어웨이>나 <라이프 오브 파이> 등이 보여줬던)…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거대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조난영화 특유의 재미 정도는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살아있다>가 보여주는 것은 갑갑함과 지루함에 여러 다양한 몸부림을 치는 준우(평소처럼 게임, 유튜브 영상 올리기, 음주가무, 마지막 라면 먹기 등등), 그러다가 마침내 인내력의 한계에 도달하는 준우 정도에 머문다. 준우는 영화 시작 40분가량이 흐른 뒤에야 마침내 대문 나서기를 감행하지만, 그 역시 감정적으로나 이야기 전개로나 별다른 의미 없는 허탈한 해프닝으로 끝난다. 결국 우리가 이 ‘1인 고립’ 단계에서 보게 되는 것은 유아인의 화려하고도 고독한 섀도복싱 같은 연기뿐이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아무리 문을 걸어 잠근다 해도 우리가 <#살아있다>와의 연결이 결정적으로 끊어졌다고 느낄 대목이 있다면 바로 이 부분이겠다. 영화는 준우와 유빈이 교환하는 나름의 알콩달콩 및 어렵사리 통신채널을 만들고 그것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준우와 유빈은 각종 기기들을 활용한 재치(그중 레이저포인터와 아파트 인터폰을 활용한 방법은 상당히 재미있는 것이었다)와 간접광고(PPL)의 향취 머금은 특정 식량들을 주고받는다. 그렇지만 정서나 공감이 오가지는 않는다. 사실 정서에 대한 이 영화의 무심함은, 엄마의 문자메시지와 준우의 짤막한 상상(또는 환각) 두 장면 정도로 엄마 및 다른 가족들과의 관계를 퉁쳐 넘기는 대목에서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지만, 일단 극장에 들어간 우리로서는 끝까지 상황이 호전되리라는 기대를 놓아버릴 수 없는지라, 후반부로 갈수록 개연성과 설득력을 무너뜨리며 정해진 수순을 향해 돌진하는 영화의 행보는 못내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스포일러 주의) 특히나 ‘좀비로부터 목숨을 지키기 위해 쏜 총 때문에 좀비들이 몰려들게 되어 그 총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으려 한다’는 설정의 전혀 의도치 아니한 기발함 앞에서는 더욱. 하긴, 그런 질주 좀비 같은 돌진이야말로, 그것이 불러올 것들에 대한 성찰도 논의도 없이 ‘지능혁명의 가속화’ 같은 구호를 외치는 지금 우리의 모습을 꼭 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탈출구 없는 아파트 단지 안에 갇힌 채, 좀비가 된 낙오자들을 피해 달리고 또 달린다. 가장 높은 옥상으로 올라가서, 낙오자들로부터 문을 걸어 잠근 채, 어디선가 날아올 구원을 기다린다’는 <#살아있다>의 줄거리처럼 말이다.
▶ 한동원 영화평론가.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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