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보다 무거운’ 비행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전 ‘공기보다 가벼운’ 기체의 부양력으로 비행하던 시절, 그 정취와 낭만을 재현하는 데 용도를 제한하고 집중시킨 컴퓨터그래픽이 사뭇 호감이 가는 영화 <에어로너츠>.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IMDb)
‘바보와 연기는 높은 곳을 좋아한다’라는 속담을 자주 인용했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다들 아시다시피 거의 전문가 수준의 병기광, 특히나 비행기광이다. 아예 비행기와 비행에 대한 애정 자체로 만들어진 작품인 <붉은 돼지>를 위시하여,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에는 비행기와 비행이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천공의 성 라퓨타>의 해적선부터 <마녀배달부 키키>의 빗자루까지). 그의 비행 판타지는 국가권력과 전쟁을 스폰서 삼지 않을 수 없었던 상업비행 이전의 ‘비행 바보’들의 서글픈 숙명을 밑바탕에 깔고 있기에 유독 강한 정서적 설득력을 가진다. 물론 <바람이 분다>가 그 이전의 마법을 모두 날려버리기 전까지의 얘기다.
<에어로너츠>의 두 주인공이 감행하는 기구비행에도 스폰서가 붙는다. 다행히 그 스폰서는 제국주의의 야욕을 불사르는 국가권력 같은 것이 아니라 ‘일개’ 흥행업자다. 그 스폰서가 요구하는 것은 기구 이륙 현장에 모여든 관객들이 불평을 하기 전에, 나빠질 것 같은(‘나쁜’조차 아닌) 날씨 같은 건 무시하고 이륙을 강행하라고 독촉하는 것 정도. 하지만 이것은 물론 우리의 주인공들, 즉 기상/천문과학자 ‘제임스 글레이셔’(에디 레드메인)와 기구비행사 ‘아멜리아 렌’(펠리시티 존스)에게는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는 중대한 위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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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을 비웃는 세상에 맞서
그럼에도 진한 화장과 화려한 의상을 입은 채 이륙 현장에 뒤늦게 도착한 ‘아멜리아’는 화려한 줄타기 및 풍차돌기, 그리고 군중을 사로잡는 연설로 스폰서를 만족시킨다. 게다가 유머감각 없는 고지식한 과학자 제임스의 반대를 뚫고 동승시킨 개를, 까마득한 상공에서 냅다 집어 던지고는, 추락 중간에 펴진 낙하산으로 안전하게 착지시키며 비행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흥행 감각’을 가르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단연 눈길을 끄는 캐릭터인 여성 기구파일럿 아멜리아는 실재 인물이 아니다(눈썰미 있는 관객이시라면 이 영화의 서두에 등장하는 자막이 ‘실화에 근거했음’(based on)이 아니라 ‘실화에서 영감을 얻음’(inspired by)인 것에 일찌감치 주목하셨을 것이다). 원래 1862년의 비행에서 과학자인 제임스 글레이셔와 기구를 탔던 사람은 노련한 기구비행사였던 ‘헨리 콕스웰’이라는 남성이었지만, 영화는 그를 아멜리아 렌이라는 상상의 여성 캐릭터로 대체했다. 그러니까 아멜리아는 다른 어떤 캐릭터들보다도 뚜렷하게, 주최측의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투입된 캐릭터다.
그 ‘목적과 의도’란 무엇인가. 최근 영화판 최강 트렌드 중 하나인 성별 바꾸기(젠더 스와프)? 이 영화에서 그런 의도는 대부분의 성별 바꾸기 영화들처럼 강하게(=노골적으로≒촌스럽게)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아멜리아 캐릭터의 목적과 의도는 상당히 고전적이다. 그것은 ‘드라마’를 만들어 넣는 것이다.
<에어로너츠>의 등뼈를 이루는 사건은, 1862년 이전까지의 상승고도 기록을 깬 기구비행이다. 하여 기구가 이륙하고 다시 지상에 내려올 때까지의 1시간2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두 주인공은 화물용 엘리베이터 정도 크기의 등나무 바구니 안에서 보내게 된다.
무엇보다 그들이 겪는 사건은 기구가 도달하는 고도(!)에 절대적인 지배를 받는다. 덕분에 좌충우돌 쾌활한 모험영화를 예상케 하는 이륙부터 19세기 런던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높이까지 기구가 올라가는 전반부 20여분까지는 영화가 비행영화의 형국을 취하지만, 기구가 더 이상 지상이 보이지 않는 고공까지 올라가는 중반부 이후 영화는 비행영화에서 심각한 산악영화의 권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은, 기구가 상승함에 따라 급격히 변하는 기상(예컨대 비구름 속 강우나 돌풍)이나, 기압과 온도와 습도 같은 물리적 조건의 변화(그것은 이제 1862년 당시에는 없던 대류권-성층권-중간권-열권이라는 용어로 오래전에 정리됐다)와, 그로 인해 인물들이 겪게 되는 신체적/정신적 변화와 그로 인한 돌발상황, 그리고 그의 극복에 맞춰지게 된다.
그것은 온몸에 성에가 들러붙는 혹독한 저온, 산소부족으로 인한 판단력 및 신체기능 저하 등의 현상을 수반하는 것인데, 이쯤에서 ‘이 영화, 내셔널지오그래픽 영화인가’라는 생각을 하는 독자가 계실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는 아마존 스튜디오가 제작한 이 영화는, 아닌 게 아니라 그러한 정취가 다분하여, 기구를 둘러싼 19세기 풍경화 같은 구름들, 그 구름에 비친 기구의 그림자와 광환(도넛 모양의 무지개 테두리), 대기의 산란이 사라진 하늘 높이 떠오르는 별들 등등 기구비행만의 아름다운 풍광과 함께,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한 x축:비행시간-y축:상승고도의 그래프(!)까지 간간이 곁들임으로써 그 절절한 내셔널지오그래픽스러운 정취를 한층 더하고 있다.
이러한 과학사/탐험사 박물관적 정취를 상쇄하기 위해 주최측이 투입한 핵심 중화제가 바로 아멜리아 렌 캐릭터다. 비행사로서 그녀는 가슴 아픈 개인적인 사연을 품고 있다. 이는 영화 도입부의 짤막한 회상(또는 환각) 장면에서 시작되어 영화 중간중간 등장하는 플래시백으로 점차 조금씩 드러나게 되는데, 영화는 후반에 가서야 일종의 결정적 한 방으로 그녀에게 얽힌 사연의 전모를 밝힌다.
스포일러 회피를 위해 구체적 내용을 말씀드리지는 않겠지만, 그 ‘반전’은 각종 산악영화들에서 닳도록 애용해온 설정이다. 게다가 그 상황에서 그런 절박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도 그다지 명확하게 수긍되지 않는다. 극적 사건을 위한 극적 사건이라는 느낌이 오히려 강할 뿐인 덕분에 ‘반전’의 정서적 견인력은 현저히 낮다.
또한 기상예측의 가능성 자체를 몽상이라며 비웃는 학회 회원들과 세상에 맞서,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더 높은 고도에서의 더 많은 데이터 측정에 매달리는 제임스와, 점점 무모해지는 그를 자신이 가진 트라우마와 연결시키며 말리려는 아멜리아 사이의 갈등 역시 그리 새롭지 않고, 별다른 울림도 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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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맥스 앞 그림엽서 감성일지라도
이 희박한 감흥의 주된 원인은 아멜리아보다는 제임스 글레이셔 캐릭터의 밋밋함에 있다. 기구비행사로서도, 또는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여성 모험가로서도, 그다지 참신하거나 입체적이지 못한 아멜리아 캐릭터와 비교하더라도 평면적으로 느껴지는 제임스 캐릭터는, “이건 우리 목숨보다도 더 중요할지도 몰라요!”라고 부르짖을 정도로 관측에 미쳐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특징을 잡을 수 없다.
이 윤곽 희박한 인물에게 그나마 형태를 입히는 것은 에디 레드메인의 연기다. 하지만 사실, 관객된 입장에서, 에디 레드메인과 펠리시티 존스가 첫번째로 함께 출연했던 <사랑에 대한 모든 것>에 이어 또다시 남녀 주연을 맡게 된 영화(게다가 에디 레드메인은 또다시 ‘골수 과학자’ 역이다)이니만큼, <사랑에 대한…>에서 이미 확인된 두 사람의 연기를 넘어서는 뭔가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컴퓨터그래픽(CG·시지) 후반작업을 위해 펼쳐 놓은 그린스크린 앞에 놓인 좁은 등나무 바구니 안에서, 감정뿐 아니라 격하게 변하는 신체적 변화까지 연기해야 했던 두 배우의 고충, 그리고 그것을 이겨낸 분투의 흔적 정도다. <사랑에 대한…>과 비교할 때 캐릭터 및 연기의 비중이 에디 레드메인보다는 펠리시티 존스 쪽이 더 높다는 점과,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라 할 ‘기구 위로 기어오르기’ 장면에서 그녀의 액션 가능성(그것은 <스타워즈 시리즈: 로그 원>에 대한 냉담한 반응으로 인해
지나치게 저평가된 측면이 없지 않다)을 엿볼 수 있다는 것도 소득이라면 소득이겠고.
그렇다면 결국 이 영화의 가장 큰 관람포인트는, 19세기 기구비행과 과학의 이모저모(특히나 탑승자용 등나무 바구니와 그 안의 고도계, 기압계, 습도계 등을 재현한 미술, 그리고 전서구(전령 비둘기) 같은 당시의 통신법을 재현해놓은 고증 등은 꽤 재미있다)와 고공 스펙터클 정도겠다. 물론 대형영화들이 보여주는 압도적인 기술과 규모의 시지에 비하면 이 영화의 시지 및 시각효과는 아이맥스 앞 그림엽서 수준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전 ‘공기보다 가벼운’ 비행의 정취와 낭만을 재현하는 데 그 용도를 제한하고 집중시킨 예의 바른 시지는 사뭇 호감이 가는 것이었다.
탁월한 에세이 겸 역사물 겸 소설 겸 독백 겸 사랑편지인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Levels of Life)에서 줄리언 반스는 기구 조종사에 대해 이렇게 썼다. ‘기구 조종사는 마술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서 신의 공간을 방문하고, 그곳을 제 영토로 삼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는 하나의 평화를 발견했다. 비상은 도덕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이었다.’ 동시에 이 책에는 이러한 문구 또한 적혀 있다. ‘창공을 식민지로 삼는다 해서 그 개척자의 죄가 씻기는 것은 아니며, 그와 관련해 일어난 모든 일들은 우리가 저지른 죄를 새로운 곳으로 옮긴 것뿐이라는 성찰로 우리를 이끈다.’
어떤 시각효과나 시지나 아이맥스 촬영으로도 좀처럼 도달하기 어려운 고도까지 우리를 훌쩍 데려가는 책의 부력. <에어로너츠>를 보고 나서, 우리가 발아래로 가볍게 내던져버리고 있는 그 부력이 새삼 그리워졌다.
▶ 한동원 영화평론가. 병아리감별사 업무의 핵심이 병아리 암수의 엄정한 구분에 있듯, 영화감별사(평론가도 비평가도 아닌 감별사)의 업무의 핵심은 그래서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에 대한 엄정한 판별 기준을 독자들께 제공함에 있다는 것이 이 코너의 애초 취지입니다. 뭐, 제목이나 취지나 호칭 같은 것이야 어찌 되었든, 독자 여러분의 즐거운 영화보기에 극미량이나마 보탬이 되자는 생각만큼은 놓치지 않으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