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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조롱’이 ‘팬심’으로…비에게서 배우는 ‘몰락을 피하는 방법’

등록 2020-06-05 16:37수정 2020-06-07 21:13

[이재익의 아재음악열전]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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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이라는 한 해를 한 단어로 정의하라면 역전이 아닐까? 16강에 드는 것만 해도 기적이라던 태극전사들이 월드컵 4강 신화를 썼고, 당내 경선 최하위권 후보였던 ‘노짱’이 로켓처럼 급상승해 대권후보가 되고 결국 대통령에 당선되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개인적으로도 그해에는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이 많았는데 그중 하나가 피디(PD)로서 처음으로 프로그램 연출을 맡은 일이었다. 배우 소유진이 진행을 맡은 심야 음악 프로그램이었는데 당시 인기 있는 가수들이 참 많이도 출연했다. 그중에서 풋풋한 소년의 얼굴과 유난히 강렬한 눈빛을 갖고 있었던 신인가수를 떠올리며 오늘 칼럼을 시작해볼까 한다. 2002년 5월 데뷔한 비의 이야기다.

그는 1집 타이틀곡 ‘나쁜남자’로 첫선을 보였지만 화제몰이 한 건 귀여운 이미지를 강조한 후속곡 ‘안녕이란 말 대신’이다. 춤도 얼굴도 말하는 태도도 세상 귀여웠다. 지금 들어도 참 잘 만든, 박진영이 작사 작곡한 곡 역시 앙증맞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건 딱 데뷔 음반까지만. 등장하자마자 스타가 된 비는 배우로도 성공적으로 데뷔했고 그 기세를 몰아 바로 이듬해에 2집 음반 <태양을 피하는 방법>을 발표했다. 1집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 선글라스를 끼고 재킷을 벗고 근육질 육체를 과시하는, 섹시한 남자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다. 다음 해에 부지런히 발표한 3집 음반에서는 아예 맨몸에 조끼만 걸치고 나왔다. 근육은 더 우람해졌고, 안무는 남성적인 느낌을 넘어 과격한 경지에 진입했다. 음반을 낼 때마다 옷을 하나씩 벗어던지더니 4집에서는 조끼까지 벗고 상체는 아예 알몸으로 찍은 재킷을 선보였는데, 5집에서는 더 벗을 게 없는데 어떡하나 우려를 낳기도 했다. 필자는 ‘레이니즘’이 수록된 5집 음반을 비의 완결편으로 꼽는다. 그즈음이 배우로서도 최고 전성기였다. 국내 드라마도 모자라 할리우드까지 건너가 ‘워쇼스키 형제’ 같은 유명 감독 영화에 출연했으니, 월드 스타라는 호칭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 당시 비는 모든 분야의 연예인을 통틀어 최고였다.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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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아주 오랫동안 비의 인기는 식어만 갔다. 매년 숨 가쁘게 새 음반을 작업하던 그가 무려 6년이나 쉬고 발매한 6집 음반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했다. 유일한 히트곡이라고 할 ‘라 송’ 역시 예전의 반응과는 거리가 멀었다. 후렴구를 가수 태진아가 부른 것 같다고 놀리는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나중에 음악방송에서 실제로 태진아와 함께 무대를 꾸며 화제가 된 정도였다. 그 이후 그의 모습은 애잔하기까지 했다. 이미 조카뻘 아이돌들이 즐비한 가요계에서 한창 월드 스타로 잘나가던 시절의 한물간 콘셉트로 활동하다니. 연기자로서의 활동도 민망할 정도의 반응 일색. 특히 작년에 개봉한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은 나쁜 의미로서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제작비 150억원이 투입됐는데도 각본, 연기, 촬영, 재미, 영상미, 음악 등 거의 모든 기준에서 최악인 졸작이었다. 결국 이 영화 관객 수가 17만명에 그친 것을 비아냥거리는 의미로 관객 17만명을 뜻하는 유비디(UBD·엄복동의 영어 발음 첫 글자)라는 단위가 생겼다.

그렇게 월드 스타 비는 연예인으로서 명을 다한 줄 알았다. 반전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2010년 이후에 그가 발표했던 시대착오적 결과물 중 하나인 노래 ‘깡’이 영화 <자전차왕 엄복동> 못지않게 신나게 놀림을 받았고, 뮤직비디오를 보고 조롱하는 댓글을 남기는 행위가 대중에게 일종의 놀이처럼 유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지난달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한 비는 이 현상에 대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의 태도가 의외였다. 방송에서 직접 댓글을 읽으며 대중의 놀림을 여유 있게 받아냈다. 자기는 ‘1일 1깡’(매일 한 번 ‘깡’ 뮤직비디오를 본다는 뜻)으로 부족하다며 ‘1일 3깡’, 심지어 ‘식후깡’ 얘기까지 하는 모습에 대중은 감탄했다. ‘꼰대’ 이미지는 품 넓은 형의 모습으로 바뀌고, 조롱은 팬심으로 바뀌었다. 범접할 수 없는 월드 스타의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대중과 함께 낄낄거리며 놀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는 길고 긴 몰락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비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시대에 맞춰 변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월드 스타라도 대중에게 외면당한다는 연예계의 진리. 진짜 권위는 권위를 내려놓을 때 생긴다는 격언. 처절하게 바닥을 찍어야 제대로 반등할 수 있다는 교훈 등. 그러나 나는 아주 오래전, 스무살 비를 스튜디오에서 처음 봤을 때 기억을 떠올린다. 쌍꺼풀 없는 눈 안에 이글거리던 그 열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뒤로도 수많은 신인을 봤지만, 비만큼 열심히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생각해보면 비는 너무 진지하고 한결같아서 놀림의 대상이 된 측면이 있다. 연예인이 아니라면 그건 사실 칭찬받아야 할 태도인데. 어쨌든 이제 힘 빼는 법을 배웠으니, 춤도 노래도 연기도 달라질 거라고 믿는다. 설마 또 화려한 조명 아래 근육질 몸매에 금목걸이를 걸고 엄청난 안무를 선보이지는 않겠지? 뭐, 그편이 더 웃길 것 같기도 하다. 그의 다음 노래를, 다음 영화를 대중이 이렇게 기대하는 것도 참 오랜만 아닌가? 참고로 비는 며칠 전 국민 과자 새우깡의 광고모델로 발탁되었다. 광고도 기대된다. 웃을 준비 완료!

이재익 ㅣ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시사특공대>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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