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는 바람과도 같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고, 힘이 있다는 점에서다. 과거 불의한 국가폭력에 맞서 싸울 때, 우리에겐 노래가 있었다. 사람들은 노래 위에 자신들의 울음을 포개 위안을 얻고, 연대하며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뎌냈다. 여기 두명의 가수가 있다. 저마다의 시작은 달랐지만, 다시 찾아온 ‘오월’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광주를 노래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그들을 만났다.
5·18 40주년을 맞아 새 디지털 싱글 ‘봄이오면’을 발표한 가수 안치환을 지난 11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노래는 벼락처럼 찾아왔다. 지난달 어느 이른 아침이었고, 한편의 시를 읽고 나서였다. 봄이 오는 산천의 풍경을 표현한 시가 내내 마음을 울렸다. 1980년 5월의 광주를 직접 표현한 대목이 없는데도, 희생자의 넋과 그날의 아픔이 느껴졌다.
“봄이 오면 먼 산의 바람/ 먼 산의 구름, 먼 산의 꽃/ 모두 우리 님이어라/ 모두 우리 가슴이어라/ 봄이 오면 먼 벌판의 불빛/ 먼 벌판의 뼈, 먼 벌판의 나무/ 모두 우리 아픔이어라/ 모두 우리 노래이어라.” 김준태 시인이 쓴 <노래>라는 시였다. 시인은 1980년 5월의 참상을 고발하고 싸움과 부활의 의지를 담은 통곡의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로 5·18 민주화운동을 전세계에 알린 인물이다.
“봇물 터지듯 노래가 나왔어요. 그 자리에서 바로 노래를 만들었죠. 그러고는 연락처를 수소문해 선생님(김준태)께 전화를 드렸어요. 이 시로 노래하고 싶다고. 흔쾌히 허락해주시더라고요.” 지난 11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한 작업실에서 만난 안치환의 표정은 아우성이 멎은 듯 평온한 모습이었다. 그는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앞두고 시인의 시를 온전히 담은 새 노래 ‘봄이 오면’을 지난 8일 세상에 내놨다.
5·18 40주년을 맞아 새 디지털 싱글 ‘봄이오면’을 발표한 가수 안치환을 지난 11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시인의 시에서 안치환이 주목한 단어는 ‘뼈’였다. “이 한 음절의 단어 때문에 사람들이 시를 읽을 때 5·18을 떠올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5·18은 아픔과 죽음의 역사고 ‘뼈’는 그것을 가장 잘 상징한다고 느꼈으니까.” 하지만 시인의 아내는 ‘뼈’라는 단어가 노랫말로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대중성을 생각했을 때, ‘먼 벌판의 뼈’ 대신 ‘먼 벌판의 사람’이 좋을 것 같다고 하셨대요. 그런데 저는 ‘뼈’가 좋거든요. 그 말씀을 드리니 선생님께서도 흡족해하시더라고요.”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80년 안치환은 중학교 3학년이었다. 경기도 평택에 살았고, 광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다. 고등학생이 돼 서울로 전학을 가서도 다르지 않았다. 그의 유일한 관심은 ‘노래’였다. 대학가요제에 나가는 것이 꿈이었다. 1984년 연세대에 입학해 노래패 ‘울림터’에 들어갔다. 대학가요제를 목표로 하는 동아리가 없어서 대신 찾아간 그곳에서 그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80년대 대학 캠퍼스는 5·18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은 상황이었어요. 노래패에서 알게 된 오월 광주와 그곳에서 접한 노래들은 그동안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라 혼란스러웠지만, 스펀지처럼 그런 것을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저항가수’ 안치환의 시작이었다.
5·18 40주년을 맞아 새 디지털 싱글 ‘봄이오면’을 발표한 가수 안치환을 지난 11일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작업실에서 만났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지난 30여년 동안 그가 5·18 관련 노래를 만든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8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가 타이틀 곡으로 담긴 5집 앨범 <디자이어>에 실린 ‘한다’라는 노래가 있었다. “과거를 잊지 마라 절대 잊지 마라/ 반역자에겐 학살자에겐 용서는 없다/ (중략) / 그들을 정의의 제단 앞에 세워야 한다/ 그들을 오월영령 앞에 세워야 한다”는 노랫말로 채워진 곡이다. “5·18은 거대한 주제이자 아픔이고 역사예요. 이를 감히 노래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1990년대 말, 5·18 20주년을 앞두고 가수로서 또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겨우 만든 노래가 ‘한다’예요.”
‘봄이 오면’은 ‘한다’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5·18을 노래한다. ‘한다’가 5·18을 폭력으로 진압한 신군부에 대한 울분과 분노를 강렬한 록 사운드와 함께 직접적인 가사로 처절하게 표출했다면, ‘봄이 오면’은 발라드풍의 멜로디에 말을 아낌으로써 5·18을 보듬는다. “이번 노래는 울부짖지도, 처절하지도 않아요. 앞서 ‘한다’가 있었으니, 40주년을 앞두고선 무언가 승화된 느낌을 주는 이런 노래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더욱이 광주를 노래한 어른의 ‘시’인 만큼 제가 더 기댈 수 있었죠.”
하지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 지난 40년 동안 해결된 것 없는 현실에 대해서는 이내 울분을 터트렸다. “책임져야 할 자에게 책임을 묻고, 명예를 되찾아야 할 이들의 명예를 찾아주는 것, 지금 우리가 할 일이에요.” 그가 다시 5월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경욱 기자
das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