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익의 아재음악 열전]
참으로 잔인한 봄이었다. 코로나19에 감염된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리 모두의 일상을 옥죄고 세계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칼럼의 성격에 맞게 대중문화에 관해서만 얘기해도 마찬가지.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분야는 영화계다. 우리나라에 영화산업이 생긴 이래 최악의 악재를 만나 극장가는 말 그대로 초토화되었다. 신작을 걸어도 보러 오는 관객이 거의 없고, 관객이 없으니 신작을 걸지 못해 재개봉으로 스크린을 채우고, 그러다 보니 볼 만한 영화가 없다는 이유로 그나마 마스크 쓰고 극장을 찾던 영화광들도 발길을 끊었다. 악순환이란 바로 이런 것. 하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으로 영화계에 엄청난 열기와 기대가 팽배했던 시점에 이런 일이 생겨 더욱 안타깝다. 공연계도 마찬가지. 가요계 역시 맥이 탁 풀려버렸다. 작년 이맘때 ‘작은 것들을 위한 시’로 세계 대중음악계의 정상에 섰던 방탄소년단(BTS)도 코로나바이러스에 덜미를 잡혔다.
이미 더는 올라갈 위치가 없었던 그들이지만, 올해는 정상의 위치를 확인하는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깨뜨리는 해가 될 예정이었다. 방탄은 정규 음반 <7>을 올 초에 발표했다.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새 음반은 선주문만 총 400만장을 훌쩍 넘기며 그룹 최다 기록을 경신했고, 아이튠스 음반 차트에서도 세계 91개 국가에서 1위를 차지하며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방송 출연 기회는 사라지고 세계 투어도 막혀버렸다. 왜 하필 코로나19가 절정으로 치닫던 시점에 새 음반을 발표했냐고 소속사를 탓해선 안 된다. 이렇게까지 사태가 악화할지 그 누가 짐작할 수 있었을까?
방탄소년단 멤버들은 사회적 거리두기에 앞장서는 모습으로 활동을 대신했다. 누구보다 더 간절하게 팬들을 만나고 싶었을 테다. 아직 정확한 일정은 나오지 않았지만 군 입대를 계속 미룰 순 없으니까. 멤버 중 맏형인 진이 내년에 서른살이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입대와 관련한 질문을 회피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다. “병역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나라의 부름이 있으면 언제든지 응할 예정이다. 입대가 결정되더라도 정말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맏형의 입대 전 마지막 음반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이번 음반은 질적·양적으로 엄청난 결과물을 담았다. 작년에 발표한 몇 곡의 노래들까지 포함해 무려 20개 가까운 트랙이 절묘한 흐름에 따라 배치되어 있는데 전반적으로 밝고 도회적이었던 지난 음반과 달리 비장함과 신비로운 분위기를 강조했다. 타이틀 곡 ‘온’은 음원 감상보다 대형 콘서트장에 최적화한 편곡이 돋보인다. 전체적인 스케일도 그렇고, 특히 노래 후반부에 숨 고르기를 하며 안무를 노래 앞으로 내세우는 장치를 보면 틀림없다. 제발 올해가 가기 전에 초대형 무대에서 이 노래를 공연하는 순간이 오기를. 수만 명의 관객 속에 나도 있기를! 나보고 공연을 연출하라면 이 노래가 앙코르 직전의 엔딩 곡이다. 뮤직비디오도 두 종류로 공개되었는데 아직 안 보신 분들은 찾아보시길.
‘블랙 스완’이나 ‘라우더 댄 봄스’ 같은 노래들도 팬들의 지지를 받는 명곡. 멤버들의 솔로 곡을 릴레이처럼 잇는 전통도 여전하다. 래퍼 3인방인 슈가, 제이홉, 아르엠(RM)이 함께한 힙합 넘버 ‘욱’은 방탄이 원래 터프한 힙합 그룹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반대로 지민의 솔로 곡 ‘필터’는 너무 부드럽고 세련되어 아무 옷이나 입고 듣기에 미안할 지경. 정국의 ‘시차’를 들으면 이런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우리 막둥이 언제 이렇게 성숙해졌니? 필자가 빅뱅의 태양 이후로 가장 개성 있는 음성으로 꼽는 뷔의 솔로 곡 ‘이너 차일드’는 뮤지컬의 문법을 따르고 있다. 뷔는 나중에 뮤지컬 무대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 예언해본다. 필자를 처음 방탄으로 인도했던 멤버 진의 솔로 곡 ‘문’이나 메인 보컬을 맡은 ‘00:00’ 같은 곡은 세계적인 팝스타가 된 방탄이 우리 가요의 감성도 놓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방탄소년단은 이번달에 서울을 시작으로 미국, 캐나다, 일본, 영국, 독일, 스페인 등의 17개 도시에서 37회에 걸친 월드투어를 돌 예정이었다. 작년처럼 세계 정복의 감격을 온 국민이 만끽할 일만 남아 있었는데 코로나바이러스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일단 모든 공연 일정을 무기한 미뤄놓은 상황. 상상하기 싫지만 운명의 여신이 그들에게 등을 돌린다면, 올해 우리는 방탄소년단의 무대를 구경하지 못할 것이다. 내년에 진이 입대하고 다른 멤버들도 뒤를 따른다면 몇 년 동안 완전체로서 방탄을 만날 순 없을 테다. 보통의 아이돌 그룹이라면 그룹을 해체하고 솔로 활동을 모색할 시점이다. 그러나 방탄의 미래에 대해 필자는 다른 예언을 해본다. 같은 멤버로 수십 년째 활동하는 위대한 록그룹들처럼, 방탄은 함께 세월의 바다를 헤쳐나갈 것 같다. 나이 들어 지금처럼 과격한 안무는 소화하기 힘들어도 음악적으로 더 성숙해질 테고, 이미 각각 슈퍼스타가 된 멤버들의 솔로 활동도 다양해지면 충분히 가능하다. 결정적으로, 한번 아미는 영원한 아미이기에 함께 늙…. 오늘따라 예언을 너무 많이 했나? 두고 봅시다.
이재익 ㅣ 에스비에스 라디오 피디·<정치쇼>,<뮤직쇼> 진행자
빅히트 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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