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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여성 영화’에 편승하려는 안이한 리메이크

등록 2020-04-24 19:50수정 2020-04-25 02:32

[토요판] 한동원의 영화감별사
<애프터 웨딩 인 뉴욕>

원작 ‘애프터 웨딩’과 달리
배우와 배역 성별 바꿔 캐스팅
인도 아동재단 활동가 ‘이자벨’
그의 후원기업 대표 ‘테레사’
20년 전 비밀과 만난 두 사람

이상·현실, 빈곤·부유 가로지르는
스토리의 사회적 맥락 증발한 채
톱배우들 ‘여성 서사’만 내세워
&lt;애프터 웨딩 인 뉴욕&gt;은 14년 전에 나온 원작 &lt;애프터 웨딩&gt;을 리메이크하면서 남성 배우들이 맡았던 역할을 여성 배우들이 맡고, 여성 배우가 맡았던 역할을 남성 배우가 맡는 이른바 ‘성별 바꾸기’ 캐스팅을 했다.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아이엠디비(IMDb)
<애프터 웨딩 인 뉴욕>은 14년 전에 나온 원작 <애프터 웨딩>을 리메이크하면서 남성 배우들이 맡았던 역할을 여성 배우들이 맡고, 여성 배우가 맡았던 역할을 남성 배우가 맡는 이른바 ‘성별 바꾸기’ 캐스팅을 했다.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아이엠디비(IMDb)

수사네 비르 감독의 수작 <애프터 웨딩>(Efter Brylluppet·2006)을 원작으로 한 <애프터 웨딩 인 뉴욕>은 한국 개봉 제목에서도 명시 및 강조되어 있듯, 원작의 주 배경인 코펜하겐을 뉴욕으로 옮긴 미국판 리메이크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 리메이크에서 가장 강조되고, 또 주목되고 있는 대목은 배경이 아니라 두명의 주연배우 줄리앤 무어와 미셸 윌리엄스, 그리고 특히 그들의 성별이다. 왜냐. 이 리메이크에서는 원작에서 남성 배우들(마스 미켈센과 롤프 라스고르드)이 맡았던 역할을 여성 배우들이 맡고, 여성 배우(시세 바베트 크누센)가 맡았던 역할을 남성 배우(빌리 크루덥)가 맡는 이른바 ‘성별 바꾸기’(젠더 스와핑/스위칭/플리핑) 캐스팅이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리메이크 영화라도 원작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만을 위한 리메이크란 없겠으므로 원작 영화와의 비교 감별은 그다지 적절치 않겠다. 하지만 이 영화가 성별 바꾸기 캐스팅을 가장 큰 특장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는데다, 영화의 제작 자체가 이 캐스팅으로 인해 가능했으므로 사정은 좀 달라진다. 사연인즉 이렇다. “이미 훌륭한” 원작 영화를 굳이 리메이크해야만 하는 결정적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던 바트 프로인들리크 감독(겸 각색)은, 그의 아내 줄리앤 무어에게 원작 영화를 보여주고, 줄리앤 무어는 롤프 라스고르드가 연기한 ‘예르겐’ 역을 맡고 싶다는 강한 의욕을 피력한다. 하여 프로인들리크 감독은 원작 영화의 판권을 12년째 들고 있던 제작자(조엘 B. 마이클스)에게 아내 줄리앤 무어의 캐스팅에 맞춰 원작의 핵심 인물 세명의 성별을 뒤바꾸겠다는 아이디어를 내놓고, 줄리앤 무어가 주연은 물론 프로듀서까지 맡으면서 제작은 본궤도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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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낳은 ‘당신의 딸’을 만난 날

흠. 얘기가 좀 길었는데, 아무튼 요점은, 그러한 원작과의 관계 때문에 이번 감별에선 원작과의 비교가 불가피하겠다는 것이다.

일단 원작과 리메이크 모두 크게 다르지 않은 영화의 기초설정은 다음과 같다. 활동가인 이자벨(미셸 윌리엄스)은 인도에서 20년째 고아원/아동재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먹이고 돌보고 있다. 그녀의 고아원은 어느 날 뉴욕 소재의 미디어 기업의 후원을 받을 기회를 얻는데, 이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인 테레사(줄리앤 무어)는 이자벨이 뉴욕으로 직접 날아와 자신을 만날 것을 요구한다.

18평짜리 테라스 너머로 뉴욕 시내의 전경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28평짜리 특급호텔 펜트하우스 객실로 모셔진 이자벨은, 테레사와의 미팅에서 그녀의 딸의 결혼식에 거의 반강제로 초대된다. 그리고 결혼식에서 이자벨은 (이하, 스포일러 있습니다) 조각가이자 테레사의 남편이 되어 있는 옛 애인 오스카(빌리 크루덥)를 마주치게 된다. 동시에 결혼식을 올리고 있는 테레사-오스카의 딸이 다름도 아니라 자신과 오스카의 사이에서 생긴 딸임을 알아차린다.

보시듯, 영화의 3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지점까지 오는 데만도 스포일러 경고가 나와야 할 만큼 이 멜로드라마에는 다수의 극적 미스터리가 포진되어 있다. 바로 이 ‘극적 미스터리’를 취급하는 방식과 태도에서 원작과 리메이크의 첫번째 차이점이 등장한다.

원작은 ‘안 가르쳐주지’를 통해 궁금증을 촉발하는 방식을 배제한다. 예컨대 원작은 도입부에서 인도 아이들을 돌보는 주인공 야코브(마스 미켈센)의 모습에 슬쩍, 바라나시 거리를 내려다보는 시이오 예르겐의 모습을 흘려 넣는다. 그 컷에는 “그 덴마크인 시이오가 돈을 주기 전에 당신(야코브)과 악수하고 싶대요”라는 고아원 관계자의 대사, 즉 그가 누군지를 확실하게 적시하는 대사까지 깔린다(그리고 이 ‘답’은 곧 질문의 시작이다. 모든 것을 이루고 가진 듯 보이는 저 슈퍼리치의 의도는 대체 무엇인가? 치졸한 과시인가? 독살스러운 장난인가? 아니면 모종의 함정인가… 등등). 원작은 심지어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결정적인 질문, 즉 ‘저 갑부 시이오에게 무슨 일이?’에 대한 결정적 힌트마저 별다른 은폐 및 쪼이기의 의도 없이 덤덤하게 보여주고 있다.

반면 리메이크는 테레사가 이자벨을 일부러 뉴욕으로 불러들인 것인지 여부를 밝히지 않는다.(“내가 아이의 생모인 걸 알고 일부러 불렀어요?” “알아서 생각해요.”) 영화는 다른 크고 작은 미스터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취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 방식은 관객들의 호기심을 최대한 오래 지속시키기 위한 것인데, 그리하여 영화가 더욱 흥미진진해졌는가 하면, 이에 대해선 지극히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말했듯 원작은 ‘안 가르쳐주지 트릭’의 단발성 깜놀 반전효과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것, 즉 마음의 작동 방식을 드러낸다. 이야기가 모퉁이를 돌 때마다 인물들이 내리는 선택, 그리고 그 감정들이 충돌하고 얽히며 가지 쳐 나가는 새로운 선택을 통해서.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관객과 영화 사이의 공명을 부르는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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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반대편’의 모습은 어디에

20년 전 뉴욕을 떠나 인도 아동재단 활동가로 살아가는 ‘이사벨’을 연기한 미셸 윌리엄스.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아이엠디비(IMDb)
20년 전 뉴욕을 떠나 인도 아동재단 활동가로 살아가는 ‘이사벨’을 연기한 미셸 윌리엄스.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아이엠디비(IMDb)

리메이크가 원작에서 쳐낸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리메이크는 원작의 또 다른 핵심이라 할, 인물들의 사회적 맥락을 의도적이든 아니든 완화(또는 표백)시키고 있다.

원작은 야코브로 상징되는 이상주의와 예르겐으로 상징되는 현실(또는 세속) 사이에서 생긴 불편한 기압차를 줄이려 애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길거리에 늘어선 판잣집들, 끼니를 얻으려 밥 트럭에 몰려든 아이들, 쓰레기 가득한 땅바닥에서 밥을 먹는 아이, 그리고 트럭 짐칸에서 꾀죄죄한 야구모자와 티셔츠를 걸친 채 어딘지 지친 얼굴로 이런 풍경을 바라보는 야코브(마스 미켈센은 이 영화에서 더할 나위 없는 미묘함을 보여준다)의 모습은 ‘지구 반대편’의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는 곧바로 후줄근한 슈트를 걸친 야코브를 덴마크의 특급호텔 스위트룸에 던져 넣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가족 멜로일 뿐 아니라 이상과 현실이 줄곧 대치하고 있었던 우리의 지난 세기에 대한 초상이기도 하다’라는. 그리고 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가, 현실의 이상에 대한 일방적이고도 압도적인 승리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는 지금 세기에 대한 나름의 경고 및 제안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리메이크 역시 위에서도 말했듯, 큰 맥락에서 원작의 틀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만큼 이러한 메시지를 어렴풋이나마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이런 이상과 현실(또는 빈곤과 부유) 사이의 마찰계수는, 매끈한 취향으로 깔끔하게 제모된 비주얼과 날카로운 모서리들을 날려버린 저자극성 대사들을 통해 현저하게 낮춰져 있다.

예컨대 이자벨 캐릭터의 묘사(분장, 의상 등)만 보더라도, 그녀는 인도 요가여행에서 갓 돌아온 듯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와 옷과 팔찌들을 걸치고, 인도의 아이들에게 명상을 가르친다. 인도 관광청 홍보영상에 등장할 법한 드론 촬영 화면 속에서 말이다. 그녀와 함께 명상을 하던 고아원 아이들은, 이자벨과 함께 가난한 아이들에게 질서정연하게 밥을 나눠 준다. 다사롭고 인자한 미소 머금은 채. 트럭 짐칸에 가지런히 앉아.

덕분에 그녀는 뉴욕에서도 위화감 거의 없이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비주얼만으로도 인도에서의 20년 동안의 방황, 시도, 좌절,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 몰린 절박함과 피로감 등등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던 야코브 캐릭터와는 달리, 이자벨의 모습은 심지어 젠 스타일 잡지의 한 컷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이 영화가 몇차례씩이나 애써 보여주는, 호텔 스위트룸 테라스에서의 아름다운 뉴욕 스카이라인과 함께 말이다.

이것은 물론 이자벨을 연기한 미셸 윌리엄스의 문제는 전혀 아니다. 시각적으로 거친 것들은 최대한 치워두고, 사회/경제적으로 불편한 사안은 가급적 에둘러가고, 불필요한 장면들은 가급적 살리고(이 영화에는 심지어 결혼식 주례사가 거의 통으로 나오고 있다), 상황의 이해에 필수적인 장면들은 들어내고(왜일까? 리메이크는 오스카가 테레사가 감춰온 비밀을 갑자기 찾아내게 되는 단서나, 딸 ‘그레이스’가 결혼을 후회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 등 최소한의 장치들까지 들어냄으로써 관객의 어리둥절을 자초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성별 바꾸기 외에는 원작에서 한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각색과 연출, 그리고 ‘여성의 영화’라는 대세에 안이하게 편승하는 기획으로 인해 리메이크는 그 맛을 종잡을 수 없는 엷은 설탕물이 되고 말았다.

하여, 원작의 기본성분들을 빼고 결국 남는 것은 미셸 윌리엄스를 위시하여 줄리앤 무어, 빌리 크루덥 같은 배우들이 보여주는, 노아웃 만루 상황에 등판한 구원투수 같은 ‘그럼에도 훌륭한’ 연기, 그리고 뉴요커 감독의 뉴욕의 이모저모풍 영상 정도겠다. 뭐, 이자벨과 딸 그레이스가 만나는 장소로 택한 뉴욕의 인도풍 카페는 그레이스의 대사마따나 좀 참았더라면 좋았겠지만, 아무튼.

거기에 그 유명한 성별 바꾸기 캐스팅이 있다. 그런데 이것으로 이 리메이크가 옹호될 수 있을 것인가. 글쎄. 이는 그저 단지 안타깝고 아깝고 실망스러운 일일 뿐이겠다. 이 훌륭한 배우들을 동시에 기용하고도, 더구나 그들의 멋진 연기라는 지원을 받고도 이런 실망스러운 결과밖에 끌어내지 못한 것은 말이다. 남녀니 녀남이니 녀녀니 남남이니 하는 것들을 모두 떠나서.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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