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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늦은 때란 없다’ 몸소 보여준 ‘전국노래자랑’ 송해 선생님

등록 2020-01-03 17:56수정 2020-01-04 14:33

[이재익의 아재음악 열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방송 프로그램은 뭘까? 지상파, 종편, 라디오, 예능, 드라마 등등 채널과 장르를 불문하고 압도적인 장수 프로그램이 있다. 올해 46살이 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방송을 시작한 <전국노래자랑>(KBS)이다. 1972년 1월16일 첫 방송이 나갔으니 이제 50돌이 코앞이다. 그렇다면 다음 퀴즈. 역사상 최고령 방송진행자는 누구일까? 현재 활동하는 분들로 한정 짓지 않더라도 답은 같다. 일요일의 남자, <전국노래자랑>의 영원한 마스코트 송해 ‘선생님’이다. 방송이나 칼럼에서 누군가를 지칭할 때 ‘선생님’이라는 존칭을 쓰면 안 된다고 배웠으나, 그냥 송해라는 이름만 달랑 부르기엔 도저히 손이 자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다들 이해해주시리라 믿는다.

매년 개편을 할 때마다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방송가에서 <전국노래자랑>은 수십년째 꿈쩍 않고 같은 형식을 유지한다. 영화 <기생충>의 송강호 대사가 떠오른다. “너 최고의 계획이 뭔지 아니? 무계획이야.” 팀장이 이번 개편에 어떤 변화를 줄 거냐고 다그칠 때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면 얼마나 통쾌할까? “저희 프로그램은 아무 변화도 주지 않겠습니다. 다음 개편 때도 마찬가지니 물어보지 마십시오!” 그게 가능한 유일한 프로그램이 바로 <전국노래자랑>이다.

매주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노래자랑 무대를 펼치는 기본 구성은 물론이고 각지의 특산물을 자랑하는 모습도 수십년째 반복되고 있다. “전국~ 노래자랑!”이라는 외침 뒤에 “빰 빰빰 빰빰 빰빰~ 빠라밤 빠라밤 빠라밤빰빰빰 빰빰~” 하고 시작하는 그 유명한 오프닝송도 늘 그대로. 실로폰으로 땡과 딩동댕을 쳐서 합격·불합격을 가리는 디테일도 똑같다. 그 어떤 노래도 구수한 트로트풍으로 바꿔주는 악단의 반주 스타일도 변함이 없다. 이러다 보니 80살 노인들이 아이돌 노래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는,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장면들이 연출된다. 피디로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이렇게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데도 음악 프로그램 중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한다는 것! 팀장님 보고 계십니까? 뭘 자꾸 바꾸라고 하세요?

누가 뭐래도 <전국노래자랑> 하면 송해요, 송해 하면 <전국노래자랑>이다. 과장이 아니라 표현 그대로 우리나라 방방곡곡 다니지 않은 곳이 없다. 발로 뛰며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보다 더 많은 곳을 다녀봤을지도 모른다. 그가 <전국노래자랑> 사회를 맡은 때는 1988년, 이미 30년이 넘었고 그를 거쳐간 피디만 100명이 넘는다. 그에게는 방송진행자에게 요구되는 거의 모든 룰이 무색하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부터 낭랑 18세, 연세 지긋한 할머니까지 여성 출연자는 다들 오빠라고 부르며 그에게 안긴다. 기습 뽀뽀를 하는 장면도 무수히 연출되는데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전남 진도군에서 방송할 때는 진돗개 공연단에 소속된 개들이 무대에 올라와 사람들과 뒤섞여 춤을 추는, 그야말로 개판이 연출된 적도 있다. ‘전국노래자랑 진도 편’을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는데, 전설의 동영상 감상하시고 큰 웃음 얻어가시길.

손담비의 ‘미쳤어’를 불러 유명해진 ‘할담비’ 지병수 할아버지가 전국구 스타가 된 일화야 미담 수준이지만,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경우도 종종 발생한다. 노래자랑에 너무 나가고 싶었던 지명수배자가 출연했다가 방송을 시청하던 경찰에게 잡힌 일도 있고, 극강의 노안이었던 60대 할아버지가 99살로 속이고 출연했다가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다. 추가 조사를 해보니 그는 신분 세탁은 물론이고 복권 위조까지 저지른 범죄자로 밝혀져 구속됐다. 송해 선생님이 워낙 고령이다 보니 원로급인 허참이나 설운도를 “허참 군” “설운도 군”으로 불러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하고, 무대 앞에서 신나게 춤을 추는 어르신 중에 너무 자주 카메라에 잡히는 분들 때문에 노인 댄서 동원 의혹도 있었다. 알고 보니 그분들은 동원이 아니라 <전국노래자랑>이 너무 좋아 자기 돈으로 전국 각지 녹화 현장을 따라다니는 분들이라고.

오늘 칼럼에서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송해 선생님은 1927년생으로 올해 93살이 되셨다. 우리나라 방송·연예계의 살아 있는 역사라고 할 만하다. 길고 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유명하고 중요한 경력이 <전국노래자랑>임은 분명하다. 예전에 몇달 정도 자리를 비우고 다른 진행자가 대신한 적이 있었는데 방송국에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그런 그가 <전국노래자랑>을 처음 시작했을 때가 몇살이었을까? 무려 63살이다. ‘너무 늦은 때란 없다'는 금언을 삶으로 증명해내고 있는 셈이다. 새해가 되어 독자님들 중 또 한살 먹어버린 나이를 한탄하는 분들, 이미 인생의 전성기가 지나갔다고 자조하는 분들에게 이 글이 위로 혹은 깨달음이 됐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환갑이 넘어 인생의 진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30년째 하고 있다.

며칠 전 송해라는 이름이 검색어 1위에 올라 놀란 분들이 많았다. 큰 병이 아니고 감기였는데도 온 국민이 가장 많이 본 뉴스가 된 것이다. 그의 만수무강을 기원한다. 전국노래자랑 50주년 특집 무대를 진행하시기를 정말 간절히 빈다. 선생님도 독자님들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이재익 ㅣ 에스비에스 피디·정치쇼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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