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완과 아이유가 함께 부른 ‘너의 의미’는 세대 간의 이상적인 화해를 음악으로 들려준다. <한겨레> 자료 사진
“철없는 놈들. 비싼 돈 들여서 대학 보내놨더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쯧쯧.”
학창시절 집에서 뉴스를 보면서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은 단연코 이 말이다. 엄혹하고도 부당한 군사정권의 폭정에 항거해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거리로 나선 대학생들을 보며 부모님들이 내뱉던 말이었다. 우리 집만 그랬을까? 그럴 리가.
세월이 흘러 그 시절에 데모하던 젊은이들이 40~50대가 되었고 그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부모들은 노인이 되었다. 주말마다, 심지어 평일에도 광화문 광장에서 흔들며 ‘문재인 타도’를 외치는 태극기 부대를 보며 지금의 기성세대는 혀를 찬다.
“한심한 노인네들. 어떻게 바꿔놓은 정권인데 저런 짓을 하나? 자식들 보기 부끄럽지 않나? 쯧쯧.”
그리고 최근 조국 법무장관 임명을 놓고 학생들이 스마트폰 시위를 벌였을 때는 이렇게 말하는 어른들이 있었다.
“아니 겨우 저런 일로 집회를 하나? 우리가 군사정권에 맞설 때는 대의라도 있었지, 저 코딱지만 한 명분으로 촛불을 들어? 철없는 것들.”
나 역시 그랬다. 북한이라면 치를 떠는 부모님 세대가 도무지 이해불가. 싸우지 않고 피하곤 했다. 부모 자식 간에는 정치 이야기 말고도 할 이야기가 많으니. 그런데 어느 날, 어린 손주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다가 그만 멍해져버렸다. 6.25 당시 눈앞에서 북한군이 집안 어른들을 몰살하고, 산에 숨어서 나무껍질을 먹으며 도망 다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지독한 가난으로 굵어죽고 앓다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던 시절의 경험담이었다.
전쟁 혹은 전쟁 같은 기아를 겪은 세대와 겪지 않은 세대가 북한을 보는 시각이 같을 수 있을까? 생존과 번영만이 지상최대의 과제인 줄 알고 평생을 바친 세대가 ‘겨우 민주주의’ 운운하며 ‘등록금을 탕진’하고 북한과 화해하자는 젊은이들을 이해하기 쉬웠을까? 그 악랄한 북한정권과 웃으며 사진 찍고 포옹하는 정치인이 예뻐 보일까?
지금의 기성세대가 대학생들의 집회를 비난하는 심리기제 역시 같은 방식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몸을 던지고 청춘을 반납해가며 군사정권에 저항했는데, 그렇게 민주화를 이뤄놓은 이 나라에서 조국 장관에 분노하며 거리로 나선 어린 학생들이 한심한 것이다. 너희들은 어찌 그토록 철이 없냐고, 조그마한 일에만 분노하느냐고 도리어 분노한다.
물론 세대논리는 어디까지나 일반론일 뿐이다. 말이 같은 세대지, 개인별로 사고의 틀과 행동방식이 천차만별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세대를 관통하는 전체적인 시대정신 혹은 최우선 가치는 존재한다. 6.25 전쟁 이후의 현대사만 놓고 본다면 대략 이런 식이 아닐까. 생존과 번영만을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하던 세대가 있었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이뤄낸 다음 세대가 있었고, 앞 세대의 물질적 정치적 안정 위에서 개인주의를 내세운 다음 세대가 있었다. 경제성장률 2%대를 장담하기 힘든 수축경제와 초고령화 시대에 접어든 지금은? 두 가지 화두를 꺼내본다. 공정과 소확행. 지금은 기회가 기적같이 귀해진 시대, 대단한 성취는 언감생심이고 그저 작은 행복이 너무나도 간절한 시대란 말이다. 그러니 왜 조그마한 일에만 분노하느냐고 이 시대의 청춘을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반대로 요즘 젊은이들도 지금의 기성세대를 학생운동을 들먹이고 훈장질을 일삼으면서 뒤로는 온갖 위선을 저지르는 ‘꼰대’들로 싸잡아 비난하지 않기를 바란다. 진영논리와 마찬가지로 세대논리도 이해의 수단이 되어야지 누군가를 공격하는 수단으로 쓰여서는 안 된다.
핵심은 이거다. 내가 직접 겪지 않은 고통은 공감하기 어렵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세대 간에도 그렇다.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하면 될까? 외우면 된다. 모든 세대는 그 시대만의 특별한 아픔을 견뎌왔고 지금도 견디고 있음을, 필자도 반은 이해하고 반은 외웠다. 아직도 노력중이고.
서론(!)이 길었는데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바야흐로 가을이다. 가을노래 리스트에 느지막히 이름을 올린 곡이 있다. 아이유가 다시 부른 ‘너의 의미’. 원곡을 불렀던 김창완 선생님과 함께 노래를 불렀는데, 이 노래야말로 세대 간의 이상적인 화해를 음악으로 들려준다. 두 위대한 아티스트의 나이차는 39년. 노래를 집중해서 들어보면 그저 파트를 나눠부르고 또 함께 부르는 단순한 방식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아이유는 이 시대의 감성으로 전 시대의 가락과 노랫말을 재해석하고 있다. 예의 바르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리고 김창완은 원곡과는 전혀 다른 창법으로, 내가 듣기에는 아이유의 리드에 따라 노래를 이어 불러준다. 서로가 다른 시대를 살았고, 다른 방식으로 사랑했고, 다른 방식으로 말하고 노래했음을 인정하지 않고서는 이런 절창이 나올 수가 없다. 음악을 듣고 소개하는 일이 직업이다 보니 거창한 표현을 썼지만, 이 노래가 국민가요 수준으로 사랑받고 있는 것을 보면 다들 들으면서 느끼나 보다. 40년이라는 세대차를 넘어 서로를 포옹하는 따스함을. 그 감동을.
노래 끝에 김창완 선생님이 아이유에게 웃으며 묻는다. “나에게 넌 누구냐?” 아이유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렇게 들린다. “전 선배님의 내일이에요.”
에스비에스 피디·정치쇼 진행자
이재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