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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여전히 나를 부끄럽게 하는…, 어떤 행진곡

등록 2019-08-23 17:03수정 2019-08-23 23:03

이재익의 아재음악 열전
‘임을 위한 행진곡’ 원곡 악보. 출처 5·18 민주화운동 5·18교육관
‘임을 위한 행진곡’ 원곡 악보. 출처 5·18 민주화운동 5·18교육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나는 존재론적인 부끄러움에 갇혀 있었다. 서울대학교 영문학과 94학번이었던 나는 다른 여느 대학 신입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선배들을 따라 각종 학회와 동아리 모임, 술자리 등을 전전했는데 그곳에서 의식처럼 부르던 노래들이 나를 주눅 들게 했다. 이제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찬가로 인정받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특히 그랬다. 그 유명한 시작 부분부터 말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투쟁, 투쟁! 투쟁 투쟁 투쟁!”

선배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핏대 올리는 그 노래를 나는 참 따라 부르기 힘들었다.

당시 나는 서울 압구정동의 소비 문화에 취해 있던 스무살이었다. 흔히 말하는 엑스(X)세대 중에서도 최전선에 있었던 셈인데,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은 꽤나 먹고살 만하고 신나는 곳이었다. 1994년의 그 여름, 나는 사랑마저 버리며 투쟁하는 대신 사랑을 찾으러 밤마다 클럽을 전전했다. 그리고 학교 선배들의 우렁찬 운동가 앞에서 늘 부끄러웠던 것이다. 형, 누나, 미안해요. 난 사랑도 이름도 못 버리겠고…, 명예는 애당초 없어요.

몇년 뒤에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우리나라 경제가 주저앉은 와중에 정치적 구호들이 맥없이 버림받는 광경을 목도했다. 겨우 그 난리를 극복하고 우리나라가 먹고살 만해지나 싶을 때쯤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미국 경제가 휘청거리고 전세계 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어느덧 나는 기성세대가 되어 이 시대 청춘의 모습에 안타까워하고 있다.

의사, 변호사로 대표되는 전문직을 꼭대기 삼아 그 아래 대기업과 공무원이라는 직장이 차례차례 자리하고 있는 피라미드 속으로 수많은 청춘이 너무나도 일찍부터 달려든다. 성적별로 학교와 학과가 줄 세워진 ‘대입배치표’는 우리 때와 완전히 다르고, 앞서 말한 직업의 피라미드와 정확히 일치한다. 가능성과 확장성 혹은 정의로운 가치는 온데간데없다. 내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진학했던 물리학과나 경제학과는 의대와 경영학과에 한참 밀린 지 오래다. 얼마나 많은 돈을 얼마나 안전하게 얼마나 오래 벌 수 있는지, 오직 그 기준에 따라 대학과 학과의 서열이 처절하게 정렬되어버렸다. 나는 또 부끄러워졌다. 후배들에 비해 나는 너무나도 손쉽게 부와 지위를 누리고 있다는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비정한 사회를 만든 기성세대의 일원이라는 죄책감도 무거웠다.

그렇게 또 세월이 흘러 마흔 중반의 나이가 되었다. 대학 시절에 노동가를 가르쳐주며 나를 부끄럽게 했던 선배들은 내가 모르던 사이 자본주의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서 있었다. 정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그 누구보다 더 맹렬히 부와 권력을 좇으며 말이다. 뭐 어차피 세월 지나니 다 비슷해지는구나 싶었는데, 몇몇 선배들은 달랐다. 부와 권력을 엔간히 차지하고서도 여전히 정의를 부르짖고 있는 선배들이 있었다.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투쟁의 동력도 떨어지고, 막상 기득권이 되면 정의를 말하기 어려워지니까.

그 자랑스러운 선배 중 한분이 바로 조국 교수다. 저 외모에 저 학벌에 저 지위에 저 인맥에 저토록 정의로운 주장을 설파하고 또래의 기득권을 엄혹하게 꾸짖다니! 그를 보며, 그를 품은 우리 정부를 보면서 학창 시절에 느꼈던 부끄러움이 되살아났고 나도 최소한의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보려고 애썼다. 국민의 4대 의무는 확실하게, 집은 내가 살 집 한채만 갖고, 아이는 규칙에 따라 경쟁하도록, 커피는 텀블러로 마시고 등등이 말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소박한 내 나름의 정의였다. 그 외엔 여전히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삶을 살아왔지만.

조국 교수가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내정되었을 때 나는 환호하고 응원했다. 역시 교수로 재직 중인 그의 아내가 나와 같은 영문과 선배라는 사실도 자랑스러웠고, 차기 대통령 감으로 그를 꼽을 정도로 열렬히.

이제 그 환호를 거둔다. 여전히 머리로는 그를 응원하고 있지만 속이 상해서 그 응원조차 계속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특목고는 학교의 설립 목적에 맞는 학생들이 그 분야에 특화될 수 있도록 운용되어야 하고, 대학에서는 부잣집 아이들이 아닌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장학금이 지급되어야 하고, 주식 부동산 펀드로 부를 불리고 자식들에게 전수하는 자들을 동물이라 꾸짖고, 모두가 용이 될 필요 없이 개천의 가재와 붕어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꿈꾼다던 그 선배가…. 끝까지 그를 믿고 싶었던 내가 결정적으로 실망했던 계기는 자신을 둘러싼 수많은 의혹에 대해 그가 기자들에게 했던 말이다.

“나 몰라라 하지 않겠습니다.”

응? 뭐지? 나 몰라라 하지 않겠다는 표현은 남의 일도 내 일처럼 관심을 기울이겠다는 뜻이다. 아니 지금 이게 남의 일인가? 언어는 마음의 거울이라고 하는데, 그의 마음속에는 두개의 자아가 있나 보다. 여전히 노동가를 부르고 죽창을 들고 정의를 외치는 조국과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 앞에 드러난 조국. 정의로운 조국이 세속적인 조국의 일에 대해 나 몰라라 하지 않겠다는 뜻일까?

핏대 높여 그를 욕하는 정치인 중에서도 욕할 자격이 없는 이들이 많다. 썩 정의로운 삶을 살지 못했던 나 역시 그를 욕할 자격이 없다. 다만 나는 궁금하다. 죽창가를 부르며 나를 부끄럽게 했던 선배의 가면이 벗겨졌으니 해묵은 죄책감이 사라질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네? 분노한 학생들이 드는 촛불 앞에서 왜 내가 부끄러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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