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철(기타·보컬), 박현준(베이스), 손경호(드럼), 고구마(보컬·기타)로 이루어진 밴드 원더버드. <한겨레> 자료사진
내 눈을 의심했다. 방탄소년단(BTS) 열풍이 전세계를 휩쓰는 와중에 다른 나라도 아닌 우리나라 음원차트에서 방탄소년단의 신곡을 누르고 1위를 차지한 노래가 있다니. 블랙핑크였다면 이해나 가지. 잔나비? 내가 아는 그 잔나비? 내가 몇년 전에 바로 이 자리에 연재했던 ‘이재익의 인디밴드 열전’에서 다루려고 했던 그 밴드? 맞다. 그 잔나비다.
꾸준한 공연으로 골수팬들을 만들며 에너지를 응축시켜온 잔나비는 한 예능프로그램 출연을 도화선 삼아 말 그대로 폭발했다. 인디밴드를 사랑하는, 그래서 1년 동안 칼럼까지 쓰고 여러 밴드들과 교류해온 필자로서는 정말 내 일처럼 기뻤다. 이제는 대세 밴드라는 표현까지 나오는 잔나비의 리더 최정훈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20년 전의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가 몸담았던 밴드와 어떤 노래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이름도 외모도 목소리도 별났던 가수 고구마를 기억하는지? 본명은 권병준. 그래도 모르겠다면, 삐삐밴드나 삐삐롱스타킹이라는 밴드 이름은 들어보았는지? 삐삐롱스타킹 시절 음악프로그램 생방송에서 카메라에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던 사건의 장본인이 바로 고구마다. 인디밴드 카우치의 ‘하체 탈의 팔짝팔짝’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최악의 방송사고였다.
담당 피디 입장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는 상황이었겠지만, 경직되고 촌스러운 당시 우리나라 문화에 충격을 주기 위해 밴드를 만들었다는 멤버들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뭐 충격 면에서는 대성공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쉽게 영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불쾌할 수도 있을뿐더러 댓글들이 너무 웃겨서 추천은 못 해드리겠다. 특히 고구마는 요즘 말로 ‘약 빤’ 무대 매너를 보여주는데…, 실제로 약을 하진 않았겠지? 혹시 영상을 찾아본다면 각자 판단이 가능할 듯.
어쨌든 이렇게 물의를 일으킨 뒤 고구마는 새로운 밴드로 부활한다. 4인조 밴드 원더버드. 보컬에 고구마, 기타에 신윤철, 베이스는 박현준, 드럼은 손경호가 맡았다. 인디밴드의 드림팀이 탄생했다고 다들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타리스트 신윤철은 한국 록의 대부 신중현의 둘째 아들이자, 형인 신대철과 함께 우리나라 최고의 기타리스트로 항상 꼽히는 인물. 박현준은 김종서가 보컬로 있던 밴드 카리스마를 거쳐 에이치투오(H2O), 삐삐밴드 등을 거친 베테랑이었다. 손경호는 외인부대와 시나위라는 최고의 밴드에서 드럼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버클리 음대로 유학까지 다녀온 실력파 뮤지션이었다. 그리고 고구마는 외계인 같았다. 요즘 잔나비의 리더 최종훈이 그러하듯, 현실 세계의 엄혹한 질서로는 가둘 수 없는 영혼이랄까. 이를테면 그 나이의 남자 어른이라면 응당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통념을 가볍게 무시하고 사는 인물이었다.
세기말의 혼란함이 극에 달했던 1999년, 원더버드는 복고풍 로큰롤 느낌이 물씬 나는 데뷔 음반을 내놓는다. 바로 그 음반에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노래 ‘옛날사람’이 수록되어 있다. 가사를 잠깐 보자.
‘술을 마시면 언제나 생각이 나는 옛날사람/ 꿈을 찾아서 오늘도 기타를 치는 옛날사람/ 이젠 다시 올 것 같지 않은 그날을 기다리며/ 지칠 때도 된 나이에 바보 같은 옛날사람’
옛날에는 이런 ‘옛날사람’이 흔했다. 학교 과사무실에서 죽치고 앉아 어리바리한 후배를 꼬드겨 술 마실 생각만 하는 고학번 형들을 기억하는가? 실제로 멤버들 인터뷰를 보면 그들이 알고 있던 어떤 ‘동네 형’을 떠올리며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했다. 당시 대학 졸업을 얼마 앞두지 않았던 나는 취직을 할 건지 소설 쓰는 한량으로 살 건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 시절 이 노래는 일종의 송가와도 같았다. 세상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동네 형들에게 바치는 노래랄까. 아마 취직하지 않고 전업으로 소설을 썼다면 나 역시 그런 형으로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고민 끝에 취직도 하고 소설도 썼다. 치사하게도 말이지.
최근에 텔레비전에 나온 잔나비 최정훈의 모습이 딱 ‘옛날사람’의 주인공 같았다. 흘러간 가요를 들으며 코인빨래방에서 늘어져 있다가 괜히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서 동네 꼬마 아이들하고 어울리고, 공원에서 멍 때리며 가사를 끄적거리며 하루를 보낸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2019년 대한민국에서 성인 남자가 이렇게 살 수도 있다니! 너무나도 많은 이들이 놀랐고 어쩌면 기다렸던 것 같다. 잔나비의 노래가 무려 방탄소년단을 누르고 1위를 차지하는 현상은 그 충격의 반증일 것이다. 물론 잔나비는 음악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지만.
획일적인 삶의 방식을 강요하는 사회는 구성원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설렁설렁 사는 사람도, 파이팅 넘치는 사람도, 옛날 사람도, 요즘 사람도, 미래적 인간도, 고구마같이 파격적인 인간도, 최정훈 같은 감성 한량도 함께 노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너는 왜 나처럼 살지 않느냐고 강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하루는 타임머신을 타봐야지. 쏘야(소시지 야채볶음)와 호프를 들이붓고 노래방에 가서 오아시스와 라디오헤드의 노래를 목이 찢어져라 불러젖히던 그 시절, 한량의 인생을 선택할 수도 있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 봐야겠다. 이 노래도 꼭 불러야지. 방방 뛰면서. 그런데 어디로 가지? 요즘도 쏘야를 파는 곳이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