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시작되자마자 아주 좋은 영화 한 편을 봤다. 제목은 <그린북>. 줄거리는 간단하다. 미국 내에서 아직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1960년대.
명망 있는 흑인 피아니스트가 용기를 내어 남부 지역을 돌며 공연을 하기로 결정한다. 알다시피 미국 내에서도 남부는 다른 지역에 비해 인종차별이 훨씬 더 심했기에 당연히 위험한 여정이 될 터. 그래서 보디가드 겸 운전사로 술집 기도 출신의 백인을 고용해 순회공연을 떠난다. 성공한 흑인과 가난하고 못 배운 백인. 두 남자가 묘한 갈등들을 극복하며 우정을 쌓아나가는 이야기다. 이미 세상을 떠난 실제 인물의 삶을 극화한 영화인데, 그 과정에서 왜곡이 있었다면서 유족들이 반발하는 논란도 있었다. 그 문제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겠다.
이 영화를 보면 아무리 성공한 흑인이라 할지라도 겨우 피부색 때문에 믿어지지 않는 수모를 당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백악관에 여러 번 초청될 정도로 저명한 인물인데도 동네 술집에서 집단 폭행을 당하거나, 호텔에 숙박 거부를 당하거나, 식당에서 출입 금지를 당하는 일이 허다하다. 영화 제목부터 의미심장하다. 흑인 여행자들이 거부당하지 않고 먹고 잘 수 있는 숙소와 식당들을 안내해준 당시의 실제 책자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삼았다.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는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배우들이 연기한 실제 인물이 아닌 엉뚱한 사람이 자꾸 떠올랐다. 그 역시 흑인이다. 재즈의 여왕으로 추앙받지만 실제 삶은 비참하지 그지없었던 빌리 홀리데이가 오늘 칼럼의 주인공이다. 20대 젊은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일 수 있겠다. 재즈라는 장르의 특성상, 그의 팬은 삶의 연륜이 쌓인 아재들이 많다. 그를 잘 모르는 독자들이라도 이 칼럼을 읽고 노래를 찾아 들어준다면 좋겠다.
1915년에 태어났으니 벌써 100년이 넘었다. 본명은 일리노어 페이건. 출생부터 고상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는 떠돌이 밴드의 기타리스트였는데 빌리 홀리데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라져버렸다. 아버지의 나이는 16살, 빌리 홀리데이를 뱃속에 갖고 있던 어머니의 나이는 13살! 어머니(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리지만) 역시 빌리를 버렸고, 그는 남의 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남았다. 그러다가 겨우 10살의 나이에 백인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그런데도 남자를 유혹했다는 이유로 빌리가 도리어 감화원에 갔고 또 성폭행을 당했다. 이번에도 가해자는 백인 남성이었다. 그런 처지에 놓인 흑인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밖에 없었다. 그는 하루 하루 몸을 팔아 밥벌이를 하는 거리의 여자가 되었다. 한 사람이 평생 겪어내기도 힘든 비극을 겪고 삶의 밑바닥까지 추락했을 때 그의 나이가, 요즘은 어린이라고 부르는 10대 초반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경제 대공황이 미국을 휩쓸었다. 나라가 어려워지면 하층민의 삶이 더 각박해지는 현상은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빌리는 하루 종일 몸을 팔아도 굶주림을 면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집도 없이 싸구려 모텔과 경찰서 유치장을 들락거리던 그는 굶어죽지 않으려고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원래는 댄서로 지원했다가 떨어진 뒤 궁여지책으로 택한 일, 더 이상 절박할 수 없는 투잡이라고 해야 할까. 아주 오래 전 그날 밤. 아마도 클럽 안에는 담배연기가 자욱했을 거다. 술에 취한 손님들이 듣거나 말거나, 어린 빌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무대에 올라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겠지.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재즈 보컬리스트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고통과 슬픔을 영혼에 새긴 채 살아온 소녀의 노래는 단숨에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싸구려 술집에서 그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짓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미치도록 노래를 잘 하는 흑인 소녀가 있다는 소문이 음악 관계자들의 귀에 흘러들어갔다. 그렇게 그는 정식으로 가수가 되었다. 음반을 취입하고 가난에서 벗어난 것으로 성공은 그치지 않았다. 그는 미국 전역에 이름을 알린 재즈 가수가 되었고,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펼치고, 역사상 최초로 <타임>지에 사진이 실린 흑인이라는 영광스러운 기록을 차지했다.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났더라면 좋았겠지만, 멀리 가버린 줄 알았던 불행의 파도가 다시 밀려왔다. 극심한 인종차별 때문이었다. 흑인 유명 인사였던 그에게는 더욱 모진 차별대우가 쏟아졌다. 노래를 부를 때만 빼면,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더러운 검둥이 계집’이라고 불렀다. 호텔에서는 흑인을 재울 수 없다는 이유로 숙박을 거부하고 공연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무대의 주인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뒷문으로 공연장을 드나들어야 했다. 개인사도 순탄치 않아서 두번의 결혼생활 모두 실패로 끝나고 결국 술과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 40대인 창창한 나이였던 1959년, 빌리는 쓰러진 채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실려 왔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본명인 ‘일리노어 페이건’이라는 이름표가 달린 쓸쓸한 병상에서 그는 세상을 떠났다.
다음 칼럼에 이어갈 이야기는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노래에서 시작한다. 제목은 ‘이상한 열매’.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린다는, 공포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가사로 시작한다. 과연 그 이상한 열매는 무엇일까?
에스비에스 피디, 정치쇼 진행자 이재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