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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일본음악, 내적 갈등은 여전히 ‘엔드리스’ - 엑스재팬 (2)

등록 2018-06-09 04:59수정 2018-06-09 11:35

[토요판] 이재익의 아재음악 열전
재결성 뒤 2011년 공연 때 모습. 에이엠지글로벌 제공
재결성 뒤 2011년 공연 때 모습. 에이엠지글로벌 제공

지난 회에는 일본의 록그룹 ‘엑스 재팬’의 음악과 흥망성쇠에 대해 아주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해적판으로 록음악을 듣다가 서서히 수입 시디(CD)로 넘어갈 때쯤이었던 고등학교 시절, 한 친구의 핀잔이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들을 게 없어서 쪽바리 새끼들 음악을 듣냐?”

나만큼이나 음악을 좋아하던 녀석이었기에 그런 반응은 더욱 뜻밖이었다. 심지어 녀석은 ‘아이와’(AIWA)라는 브랜드 이름이 적힌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떡하니 허리춤에 차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되물었다.

“일본 워크맨 쓰는 건 괜찮고 일본 노래 듣는 건 안 되냐?”

그때 녀석의 대답에 말이 막혔다.

“그거랑 그거는 다르지.”

그리고 놈은 사라져버렸다. 그냥 듣고 넘겨도 될 법한 이야기였으나 이상하게도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그거랑 그건 다르다. 일본 음악을 듣는 것과 일본 제품을 쓰는 것이 다르다는 말인데…, 바보는 아니었던 터라 어렴풋한 뜻은 알 것 같았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보다 문화의 일부분인 음악이 우리의 정신세계에 더 큰 영향을 주기에,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나라의 국민으로서 일본 노래를 듣는 건 타당하지 않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었다.

언뜻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니 터무니없는 헛소리였다. 그러면 왜 티브이(TV)에서는 <아톰>, <마징가 제트(Z)>, <코난>, <은하철도 999> 등 수많은 일본만화를 틀어주지? 엑스 재팬의 노래는 어차피 일본어를 모르니 무슨 말인지도 모르지만, 일본 만화는 그 뜻은 물론이고 주제 의식까지 고스란히 우리에게 흡수되는데? 게다가 <금각사>, <설국> 등의 일본소설은 떡하니 학교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었다. 제품이 문화보다 영향력이 덜하다는 논리도 동의할 수 없었다. 세계를 재패한 일본 전자제품을 쓰면서 우리는 감탄하지 않나. 역시 일본제가 최고야!

다음날 나는 녀석과 설전을 벌였다. 승부는 나지 않았지만. 나중에 대학입시의 논술 주제로 ‘일본문화 개방에 대한 의견을 기술하라’는 문제가 나왔는데 그때의 논쟁이 큰 도움이 되었다며 녀석이 술을 샀던 기억이 난다.

그 즈음부터 나는 일본과 일본제품, 일본문화에 대해 이런 식의 태도를 견지하기도 마음먹었다.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는 잊지 말아야하고 쉽게 용서해서도 안 되지만 바로 이웃국가로서 현재의 일본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태도. 요즘은 국산 제품이 워낙 뛰어나서 일본제품을 쓸 일이 별로 없지만,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티브이는 소니, 밥솥은 코끼리밥솥, 게임기는 닌텐도였다. 일본 영화도 많이 봤고 일본 여행도 몇 번이나 다녀왔다. 초밥은 없어 못 먹지. 일본 카레를 즐겨 먹고 술도 사케와 일본 맥주를 자주 마신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 대부분도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나 유난히 민감한 분야도 있다. 예를 들면 자동차. 20년 전쯤에 일본차를 탄 적이 있었다. 영화 <분노의 질주>에서 주인공인 ‘폴 워커’가 타던 차와 같은 모델인 ‘이클립스’라는 이름의 빨간 스포츠 카였는데 툭하면 테러를 당했던 기억이 난다. 긁어놓는 건 기본이고, 한 번은 누군가 유리창에 수정액으로 ‘쪽바리’라고 낙서를 해놓은 적도 있었다. 그때도 고민에 휩싸였다. 초밥은 잘도 먹고, 일본 여행에는 열광하면서 일본차를 타는 건 안 된다고?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여전히 일본차에 대한 거부감은 남아있다. 국내 최대 자동차 관련 사이트 ‘보배드림’의 게시판에는 아직도 ‘일본차는 무조건 거른다’는 식의 글이 종종 등장한다. 일본 자동차 회사들이 아직 제대로 된 사과도 안 하고 있는 전범기업이어서 그렇다고? 전자회사들은 안 그런가? 일본 전자제품을 쓴다고 욕하는 사람들은 없었는데 왜 자동차만 그럴까?

이런 식의 거부감이 남아있는 또 하나의 분야가 바로 음악이다. 특히 지상파 라디오에서 일본 노래는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비가 오는 날에 엑스 재팬의 ‘엔드리스 레인’을 플레이 리스트에 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는 피디(PD)는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일본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대놓고 티브이에 편성하면서 왜 일본 노래는 틀기 꺼려하는지, 당사자인 내 자신도 확신한 답을 할 수 없다. 왠지 청취자들이 불편해할 것 같아서? 궁색한 답을 짐작해볼 뿐이다.

음악, 영화, 전자제품, 자동차, 의류, 음식, 여행…, 수많은 일본 것들 중에 뭐는 괜찮고 뭐는 피해야 하는지, 누가 구별해 줄 수 있을까? 어떤 기준으로? 독자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비 내리는 밤, 내 손으로 엑스 재팬의 ‘엔드리스 레인’을 선곡하는 날이 과연 올지도 궁금하다.

이재익 에스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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