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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홍콩에서 사는 것이 꿈이었던 소녀 이야기-홍콩 4대 천왕(2)

등록 2017-12-15 21:49수정 2017-12-15 22:06

[이재익의 아재음악 열전]

지난번 칼럼에서 홍콩 4대 천왕 이야기를 잠깐 했다. 우리나라에서 홍콩 영화 붐을 이끌어냈던 주윤발, 장국영, 유덕화, 여명이 아니라, 장학우, 곽부성, 여명, 유덕화까지 4명이 주인공들이라고.

또래 남자아이들처럼 홍콩 영화에 열광했으면서도, 나는 홍콩 노래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있었다. 강력한 헤비메탈 음악에 미쳐 있던 시절이었기에 처연한 발라드가 주를 이루는 홍콩 노래는 ‘계집애들’이나 듣는 노래라고 생각했다. 높고도 단단하게 세워놓은 선입견의 벽을 허물려고 했던 아이 이야기를 잠깐 해볼까 한다.

그 시절에 그 아이를 불렀던, 안경이라는 별명을 여기서도 쓰도록 하겠다.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유튜브로 원하는 음악과 영상을 뭐든 접할 수 있지만,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새로운 음악을 접하는 경로는 라디오, 뮤직비디오를 접하는 경로는 텔레비전이 유일했다. 그래서인지 서로 좋은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추천해주고 함께 감상하는 모임이 대유행이었다. 음악감상회, 줄여서 음감회라고 불리던 모임에서 그 아이를 만났다.

말간 얼굴에 까만 안경을 쓰고 폭신해 보이는 스웨터를 입은 녀석은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로 살벌한 헤비메탈을 소개했다. 남자가 듣는 음악, 여자가 듣는 음악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팬의 성비는 분명히 존재한다. 말랑말랑한 브릿팝 덕분에 요즘은 록음악을 듣는 여자들도 많지만, 그 시절만 해도 록음악 팬은 9 대 1 이상으로 남초 현상이 극심했다. 그런 불균형 성비는 헤비메탈 음감회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져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안경 녀석은 주목을 받았다.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가장 어렸고, 또 동갑이었던 우리는 당연히 서로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음악 취향을 확인하면서 우리는 금방 친해졌다. 그래 봤자 음감회에서 만나 햄버거나 떡볶이를 먹고 헤어지는 게 고작이었으나, 슬레이어와 아이언 메이든을 듣는 여고생과 함께 있노라면 마구간에서 유니콘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서로 알게 된 지 몇 달 안 되어 안경 녀석이 음감회에 유덕화의 엘피(LP) 음반을 들고 왔다. 아직도 타이틀이 기억난다. 가불가이(可不可以). 그녀는 생일 선물이라면서 나에게 음반을 건네주었다. 평소에는 헤비메탈만 듣던 녀석이 왜 갑자기 홍콩 가수의 음반을 선물로 줬는지, 그 이유가 의외였다.

“니가 유덕화랑 좀 닮은 거 같아서.”

아! 이 글 아래 악플이 달리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내가 보기에도 별로 안 닮았지만 녀석은 정말로 그렇게 말했으니까.

원래 홍콩 노래를 좋아했냐는 질문에 그녀는 당당히 대답했다. 헤비메탈만큼 좋아한다고. 심지어 나중에 홍콩에서 살고 싶다는 야무진 꿈까지 밝혔다. 어떻게 헤비메탈과 홍콩 노래를 동시에 좋아할 수 있는지, 로커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 치면, 자신을 문재인 지지자이면서 동시에 박사모 회원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을 맞닥뜨린 기분이랄까. 여하튼 집에 와서 음악을 들어보았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 유덕화의 노래는 내 취향이 아니었다. 영화 <천장지구>로 각인된 터프한 이미지마저 훼손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안경 녀석은 음감회에 발길을 끊었다. 대학교에 들어와서도 가끔씩 연락은 주고받았는데, 제대하고 복학한 뒤에 오랜만에 재회했다. 5년 만이었나? 녀석의 얼굴에는 안경이 사라졌고 촌스러운 단발머리는 윤기 좌르르 흐르는 긴 생머리로 자라 있었다. 정말 도저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워진 그를 보며, 나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는 외모의 변화보다 더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중국으로 유학을 간다고. 그리고 또 몇 년 뒤, 그녀는 홍콩 남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나는 로커가 되는 데 실패했지만, 와우, 그녀는 홍콩에 살겠다는 꿈을 이룬 셈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소식을 들은 건 또 몇 년 뒤. 남편 사업차 홍콩에서 대만으로 건너간다는 소식을 담은 이메일이었다. 그 이메일 계정이 사라지고, 전화번호도 바뀌면서, 그와의 연락은 완전히 끊겼다. 그런데 얼마 전, 희대의 걸작인 대만 영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 재개봉으로 다시 보면서 그녀가 떠올랐다. 우리나라, 홍콩, 대만, 중국. 비슷하면서도 다른 역사를 지닌 공간을 누비며 살았던 안경잡이 소녀의 발길처럼, 이 영화 역시 특별한 시간과 공간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준다. 홍콩 4대 천왕 유덕화의 노래는 여전히 내 취향이 아니라서 추천을 못해드리겠으나 이 영화는 꼭 추천하고 싶다. 영화 자체로서도 너무나 아름답지만, 대만이라는 나라의 독특한 역사를 들여다볼 계기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아. 이 영화가 소재로 삼고 있는 살인사건이 실화인 것처럼, 4시간!이라는 러닝타임도 실화임을 미리 밝혀둔다.

이재익 에스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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