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서]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14) 전성태가 묻고 박태순이 답하다 ②
선후배 릴레이 대담으로 본 한국작가회의 40년
(14) 전성태가 묻고 박태순이 답하다 ②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7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인물이 아니라 한국작가회의다. 1974년 11월18일 출범 이래 작가회의는 대표적인 진보 문인단체로 표현의 자유 쟁취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문학을 넘어 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작가회의 창립 40돌을 맞아 초기 결성 때부터 지금까지 참여해온 원로 문인 9명과 후배 문인 9명이 짝을 이룬 구술대담 형식으로 문인운동사의 의의와 숨은 일화들을 육성으로 들려준다.
일곱번째 주자로 소설가 박태순(오른쪽)과 전성태(왼쪽)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출범 때부터 40년 동안 줄곧 문인운동사 기록을 담당해온 박 작가의 두번째 회고담을 들려준다. 사진은 지난달 24일 충북 충주 수안보에서 모처럼 상경한 박 작가를 전 작가가 동서울터미널에서 마중하는 모습이다.
이어 시인 신경림-문학평론가 고영직, 문학평론가 구중서-이은봉 등이 참여한다.
잔혹한 YH 여성 노동자 진압은
당대 사람들의 치를 떨게 했다
자실 간사단, 긴급회의를 열어
문학선언 발표를 결의한다 ‘명동 위장결혼 집회 사건’으로
문인들 보안사서 모진 고문 당해
백기완은 당시의 극단적 체험을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만들었고
후일 젊은 노래패들이 곡을 붙였다 전두환 일당의 권력찬탈 과정서
현미경처럼 세밀히 투시하거나
내시경처럼 언어로 촬영해야 할
문학의 과제가 있다는 것 깨달아 전성태 ‘1979년 문학인 선언’은 선생님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79년이라는 급박하고 암울한 시대상황과 맞물려 비장했습니다. ‘유신의 종말에 대해 지워지지 않는 언어로 역사에 기록하겠다’는, 일종의 유신에 대한 사망선고처럼 읽혔습니다. 이 선언의 서명인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대표간사 직무대행 김병걸 선생을 비롯해 고문 및 상임간사 25인이더군요. 선언문이 나오게 된 정황이 궁금합니다. 박태순 ‘감옥 들어갈 채비를 갖추고 대기 중인 문인들이 25명이나 되노라’ 하고 되레 과시해 보이려는 선언문이었어요. 옥쇄작전 비슷하게 말이에요. 저는 이 선언이 74년 자실 창립 때의 ‘101인 선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유신시대 종말 증언록에 이들의 이름을 반드시 기록해야 해요. 김병걸·김규동·이호철·남정현·신경림·백낙청·구중서·민영·이근배·염무웅·임헌영·조태일·이문구·신상웅·최하림·황석영·윤흥길·양성우·김주영·임정남·이시영·송기원·이진행·김창완·박태순. 전 거칠고 날카로운 표현도 있는데 앞 대목만 인용합니다. ‘와이에이치(YH)무역 회사의 여공들이 경찰 폭력에 의하여 짓밟히고 김경숙 노동자가 무참히 죽어간 사건은 우리 사회의 누적된 모순의 실상을 드러낸 것이고 이른바 유신체제의 전체적 허구성을 여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우리 문학인들은 현 정부가 정치적 독립, 경제적 자립, 문화적 자율성을 이룩해야 할 근대화·산업화·민주화 작업에 실패하고 우리 민족을 파행적인 국면으로까지 몰고 간 것에 대해 그동안 깊은 관심과 우려를 표시하고 이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해왔다. ….’
박 공안경찰의 공권력 수행에 대해 ‘폭력’의 자행인 것처럼 거칠게 표현했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세요. 사망자까지 나온 와이에이치 여성 노동자 진압의 폭력성에 당대인들이 얼마나 치를 떨었는가 하고 말이에요. 유신 말기의 파국 상황은 통치권력 시스템이 자초한 것이니 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어요. 유신정권은 집권 내내 비상시국이니 위기상황이니 하며 대민 협박을 해오기는 하였지만, 79년은 연초부터 ‘유신정권 안보’의 위기 국면이 절박하다는 것을 느끼게 했어요. 자실은 모임자리에서마다 ‘전술적인 절망, 전략적인 희망’이라는 구호를 복창하기도 했지요. 와이에이치 사태는 그 위기감의 발로였죠. 유신 종말로 다가가는 행진은 급기야 국가 파탄 사태로 치달은 겁니다. 8월18일 자실 간사단은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문학선언’ 발표를 결의하게 됐습니다.
전 문학인 선언은 어떤 형식으로 발표되었습니까?
박 그해 79년 8월20일 명동성당의 ‘가톨릭농민회 오원춘 납치사건’ 진상 발표 행사에 포함시켜 선언문을 낭독했지요. 그리고 8월24일 자실과 해직교수협의회 인사들이 함께 기독교회관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자실의 ‘문학인 선언’과 해교협의 ‘다시 새학기를 맞으며’라는 성명서를 각각 발표했어요. 자실 쪽에서는 김병걸·김규동·신경림·이문구·임정남·이시영·송기원·박태순 등이 배석했고 해교협 쪽으로 성래운·백낙청·염무웅·서남동·김찬국 등이 배열했지요. 그러자 경찰은 8월29일 김병걸·백낙청 선생을 각기 관할 경찰서로 연행하고 31일에는 나를 퇴계로의 시경 안가로 끌고 갔어요. 다음날인 9월1일에는 김승훈·함세웅 신부, 그리고 엉뚱하게 이명준·박동순(박태순 동생)이 연행되었는데 ‘문학선언’ 유인물을 명동성당 행사장에서 배포하게 된 경위(이명준)와 유인물 제작 과정(박동순)을 조사한다는 구실이었지요. 9월5일에 풀려났지만 함 신부만은 수원성당 인권기도회에서 ‘오원춘 사건은 수사당국의 조작이며 권력에 의해 진실이 유린된 사건’이라 밝히고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재구속했어요. 아이고, 힘들었던 풍경들이여.(웃음)
전 유신통치 종언 직전의 상황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자실 기관지 발간 준비인데요, 그해 10월9일 <동아일보>문화면에 단신이 나갑니다. 10·26 사태가 터지기 2주일 전이었지요. ‘고난받는 문인들과 불우한 동료들을 위한 기금 마련 운동이 문단 일각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같은 움직임은 단행본이면서 잡지의 성격을 띤 <무크(MOOK)-신작>이라는 출판의 구체안을 마련하고 있다.’
박 그 짤막한 보도는 두 가지 사실을 에둘러 알려주고 있어요. 고난받는 문인 위한 기금 마련이라는 표현으로 ‘자실’의 건재를 전하고, ‘무크’라는 출판형식의 최초 등장을 예고하죠. 이 기사를 쓴 박병서 기자는 이듬해 80년 언론방송 통폐합 때 해직된 뒤 실천문학사 대표를 맡게 되니 참 묘한 인연이었어요. 그리고 곧바로 원고 청탁에 들어가는데 10·26 사태 이후였다면 시기를 놓쳐 원고 청탁도 발간 기획도 여의치 못했을 거예요.
전 그리고 전혀 뜻밖으로 ‘10·26’이 터집니다. 자실 문인들은 이 혼란 가운데서 ‘포스트 유신’에 대한 대책이라든가 로드맵을 어떻게 구상하게 됩니까?
박 ‘박통 장례식’…, 언론 방송이 도배한 ‘전국민 애도’라는 분위기 속에서 11월3일까지 9일장으로 치러지는데 전국이 그야말로 비상계엄이었지요. 이로부터 정치인 김영삼의 역할이 주목되었는데 와이에이치 사태로 야당 총재직 박탈에 의원직마저 상실했다가 복귀한 직후라 그런지 도무지 입을 열지 않아요. 대통령 권한대행 자격으로 최규하가 기회를 놓칠세라 11월10일 담화문을 발표해요. 현재의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고 그 뒤 민의를 모아 개헌한다는 내용인데 야당 정치권의 즉각적인 대응이 없는 거예요. 이틀 뒤인 12일 아침에 안국동 윤보선 전 대통령 자택에서 국민연합 명의의 성명서가 발표되는데 물론 유신헌법 즉각 철폐 요구였지요. 3인 공동대표에서 김대중·함석헌은 운신을 못하게 막힌 상황이어서 안국동에서 나선 것이었고, 다음날 아침에는 해교협·자실·동아투위·조선투위·민청협 등 이른바 ‘지식인 5단체’의 시국선언 발표가 있었는데 이런 명칭은 공안당국이 붙여준 것이었으니 엉뚱한 공인이었어요. 그리고 다음날인 14일부터 5단체 인사들이 종로경찰서 보호실에 유치되는데 서남동·김찬국·이우정·김병걸·백낙청·이부영·이병주·정태기·염무웅·박태순·조성우 등이 그냥 합방이었어요. ‘엠티’(멤버십 트레이닝) 비슷하게 시국 논의를 하다가 17일에 풀려났는데 다만 선언문을 작성했던 이부영만 구속되어 안타까웠지요. 자실 탄생일인 11월18일에는 주인 없는 화곡동 고은 자택에서 중국음식을 배달시켜 놓고 자축연을 열었는데 범민주세력이 11월26일 명동에서 열기로 한 ‘유신철폐 촉구와 통대선거 반대 대집회’에 대한 대책을 숙의했지요.
전 바로 그 범민주세력 명동집회를 계엄 당국은 ‘명동 위장결혼 집회사건’이라 발표하지요. 김병걸 선생은 명동 집회 현장에서 곧바로 서빙고동 보안사 지하실로 납치되어 고문을 받게 되고, 현기영 선생은 첫 창작집 <순이 삼촌>을 막 발간했는데 근무지인 학교에서 보안사 요원들에게 끌려갑니다. 백기완 선생은 화곡동 고은 자택에 은신해 있다가 발각되어 지독한 보복 고문을 당하는데 ‘님을 위한 행진곡’은 당시의 극단적인 일련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 창작시로, 후일 젊은 노래패들이 곡을 붙였던 것이고요. 유신 종말 직후의 풍경은 오늘에 다시 꼼꼼하게 들여다봐야 할 거대한 벽화 같습니다.
박 전두환 신군부 일당의 권력 찬탈 과정을 통해서 깨달은 게 있어요.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투시해야 할 역사적 사실들, 그리고 당대사의 척추·근육·혈관·말초신경과 같이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들을 내시경처럼 문자 언어로 촬영해야 하는 문학과제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오늘에도 유효합니다.
전 80년대로 넘어가면서 무크 시대가 열리고 특히 젊은 시인들이 다양한 자기표현력을 발휘하면서 문학운동에 세대교체가 일어나지만 정작 자실 운동은 침체돼 있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박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아요. 오히려 자실이라는 문학조직은 일반 사회에 알려지지 않고 있었는데, 문학 내부보다 외부에서 더욱 궁금해했어요. ‘포스트 유신독재’의 과제를 자실 문인 쪽에서 어찌 담당해 나가는지 더욱 주목받는 형국이었어요. 다양한 계보와 족보의 민주인사들이 문인 모임에 왜들 그리 몰려들었던지 회고해 봅니다. 74년의 민청학련 사건 와중에서 ‘구속자가족협의회’가 발족되는데 공덕귀·이희호·이소선을 필두로 총무 김한림 선생과 정금성(김지하 모친), 그리고 정정순(옥중결혼 양성우 시인 부인), 박광숙(옥중결혼 김남주 시인 부인) 등 모두 자실 문학운동의 ‘가족’이었어요. 그리고 자실 명예회원으로 모신 리영희·성래운·박현채 세 분이 실제로는 나이와 상관없는 문청 문인들이었어요. 리영희 선생은 자전적인 소설 창작집을 출판하기도 했고, 성래운 선생의 민중시 낭송 녹음테이프는 국내보다 국외에서 더 큰 호응을 얻었고, 박현채 선생이 무크 <실천문학>(84년)에 발표한 ‘문학과 경제’는 80년대 노학연대운동의 나침반이 되기도 했지요. 특히 문학인들이 앞질러 제출한 민중이란 무엇이며 누구이며 어떠한 실체인지를 두고 80년대 초반부터 학술인들의 새로운 규명 작업이 전개됩니다. 홍이섭·천관우, 강만길·정창렬 등의 민족사학과 민중사학, 함석헌 선생의 씨알사상과 안병무·서남동 교수 등의 민중신학, 박현채-이대근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후일의 엔엘(NL)-피디(PD) 논쟁에 이르기까지 그 흐름은 문학 실천운동과 줄곧 동반관계였지요.
전 문예 분야의 움직임들을 살펴주신다면 어떤 활동들을 들 수 있을까요?
박 자실 운동장에서 함께 뛰었다고 할 예술 쪽은 당연히 학술 분야보다 더 농도가 짙었지요. 가령 김윤수·주재환·손장섭·김정헌·김용태·유홍준 등의 민족미술 이론 개발과 ‘삶의 미술’, ‘현실과 발언’ 등 모임 결성, 윤이상 음악에서 차세대의 강석희-문호근-이건용 등으로 이어지는 창작 작곡과 음악극, 판소리 마당극 및 사물패 풍물 운동, 한대수·김민기 등의 저항가요-반체제 가요와 노찾사 운동, 하길종·장선우·이장호·배창호 및 독립영화로 이어지는 연행예술 등, 그리고 ‘문화패’라는 새로운 용어를 등장시켰던 임진택·이애주·박인배·채희완 등의 종합 마당판이 한통속이었어요. 여기에 채광석·황지우·김정환·김도연·김사인·박승옥 등과 함께 홍일선·정규화·박노해 등의 민청문화연대라든가 노동해방문학, 김근태·장기표·조성우·이신범·유인태 등의 민주청년연합 등 새로운 대오와 진용이 모두 함께 ‘모두거리’로 토닥거렸던 거지요. 문학-미술-음악-연극-영화계의 경계 허물기와 질풍노도 문예시대를 새롭게 검증해야 합니다.
전 선생님은 ‘근대와의 문학전투’라는 관점에서 자실 출범의 역사를 새롭게 파악하자는 의견을 밝혀왔습니다. 이런 자실 출범의 정신이 여전히 한국문학의 과제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먼 걸음에 귀한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 이정우 기자 woo@hani.co.kr
1979년 들어 종말로 치닫는 유신 정권에 맞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한층 깊숙이 참여하게 된다. 그해 2월 광주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소심당에서 열린 ‘양심범을 위한 문학의 밤’ 행사를 진행 중인 박태순 작가. 민주화운동기념 사업회 제공
당대 사람들의 치를 떨게 했다
자실 간사단, 긴급회의를 열어
문학선언 발표를 결의한다 ‘명동 위장결혼 집회 사건’으로
문인들 보안사서 모진 고문 당해
백기완은 당시의 극단적 체험을
‘님을 위한 행진곡’으로 만들었고
후일 젊은 노래패들이 곡을 붙였다 전두환 일당의 권력찬탈 과정서
현미경처럼 세밀히 투시하거나
내시경처럼 언어로 촬영해야 할
문학의 과제가 있다는 것 깨달아 전성태 ‘1979년 문학인 선언’은 선생님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79년이라는 급박하고 암울한 시대상황과 맞물려 비장했습니다. ‘유신의 종말에 대해 지워지지 않는 언어로 역사에 기록하겠다’는, 일종의 유신에 대한 사망선고처럼 읽혔습니다. 이 선언의 서명인은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 대표간사 직무대행 김병걸 선생을 비롯해 고문 및 상임간사 25인이더군요. 선언문이 나오게 된 정황이 궁금합니다. 박태순 ‘감옥 들어갈 채비를 갖추고 대기 중인 문인들이 25명이나 되노라’ 하고 되레 과시해 보이려는 선언문이었어요. 옥쇄작전 비슷하게 말이에요. 저는 이 선언이 74년 자실 창립 때의 ‘101인 선언’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유신시대 종말 증언록에 이들의 이름을 반드시 기록해야 해요. 김병걸·김규동·이호철·남정현·신경림·백낙청·구중서·민영·이근배·염무웅·임헌영·조태일·이문구·신상웅·최하림·황석영·윤흥길·양성우·김주영·임정남·이시영·송기원·이진행·김창완·박태순. 전 거칠고 날카로운 표현도 있는데 앞 대목만 인용합니다. ‘와이에이치(YH)무역 회사의 여공들이 경찰 폭력에 의하여 짓밟히고 김경숙 노동자가 무참히 죽어간 사건은 우리 사회의 누적된 모순의 실상을 드러낸 것이고 이른바 유신체제의 전체적 허구성을 여실하게 보여준 것이다. 우리 문학인들은 현 정부가 정치적 독립, 경제적 자립, 문화적 자율성을 이룩해야 할 근대화·산업화·민주화 작업에 실패하고 우리 민족을 파행적인 국면으로까지 몰고 간 것에 대해 그동안 깊은 관심과 우려를 표시하고 이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해왔다. ….’
1979년 11월26일 대통령 간선제 반대를 위한 이른바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기소된 김병걸 자실 대표간사가 80년 1월15일 첫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 사업회 제공
8월11일 신민당사 농성 와이에이치 여성 노조원에 대한 진압 과정에서 추락사한 김경숙 열사의 장례식. 민주화운동기념 사업회 제공
그해 8월11일 와이에이치(YH)무역노조 폭력해산 사건을 계기로 유신의 종말을 경고한 자실 회원 25명이 발표한 ‘1979년 문학인 선언문’. 민주화운동기념 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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