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열한번째로 문학평론가 고영직 교수가 민족예술인총연합 시절 활동과 용태 형의 못다 한 꿈을 들려준다. 이어 심광현, 조성우,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걸어다니는 민예총’의 섭외로
유홍준·조동일·도정일·진중권 등
킬러콘텐츠 탑재 헌신적 강의
대중성과 전문성 갖춘 ‘기획의 승리’
뒤풀이 자리는 뜨거운 토론마당
‘꼬리지느러미가 푸르르 떨린다/ 그가 열심히 헤엄쳐가는 쪽으로 지상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그러나, 그 꼬리 뒤로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더 멀리 사라져 가는/ 초고속 후폭풍(後爆風)의 뒤통수가 보인다/ 그 배후가 궁금하다’
그의 생애를 생각하면 시인 이덕규의 시 ‘풍향계’가 떠오른다. 그는 자신의 자리가 전면보다는 배후에 더 잘 어울린다는 점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천성이었다. 배후라는 말에서 어떤 음침한 분위기를 연상할 필요는 전혀 없다. 시의 표현처럼 초고속 후폭풍이 불 때 지상의 모든 시선은 풍향계 앞쪽을 바라본다. 그 배후의 힘과 작용에 대해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일의 성패 여부는 ‘배후’의 힘이 중요한 법이다.
실은 내게 ‘용태 형’이라는 호칭이 익숙하지 않다. 1992년 봄, 서울 종로구 낙원동 59-5번지, 신한빌딩 5층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사무실에서 처음 만난 ‘김용태 사무총장’이라는 호칭이 더 편하다.
■ ‘흥행 대박’ 문예아카데미
92년 봄 개설한 ‘민예총 문예아카데미’는 2008년 간판을 내릴 때까지 연인원 3만명이 넘는 수강생을 배출한 민예총의 대표적인 문화사업 브랜드였다. 한 해 매출액이 2억5천만원을 돌파한 적도 있었다. 시쳇말로 ‘흥행 대박’이었다. 문예아카데미의 출범에는 당시 민족미학연구소장으로 활동하던 염무웅 교수(문학평론가)가 산파 노릇을 했다. 90년 처음 개설한 민족미학 여름·겨울학교가 성공을 거두자 92년 들어 시민을 위한 문예강좌를 표방하며 민예총 문예아카데미가 출범한 것이다. 초대 교장은 염무웅, 기획실장은 임홍배(문학평론가)였다. 이병훈(문학평론가)·이종률(화가)·김상봉(전남대 교수)이 바통을 받아 기획실장을 지냈다.
문예아카데미의 인기는 대단했다. 91년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 이후 너도나도 내공을 쌓는 ‘공부’에 열의가 높았던 사회민주화 분위기가 크게 작용했다. 김용태 사무총장의 장기인 마당발 인맥을 활용한 ‘스타 강사’ 시스템도 한몫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이른바 ‘킬러 콘텐츠’를 내장한 참여 강사들도 헌신적으로 강의에 임했다. 90년대 내내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이 소속 학교보다는 문예아카데미를 더 선호했다. 대중성과 전문성 사이 적절한 균형을 이룬 기획의 승리였다. 출범 첫해 스타 강사는 유홍준(미술평론가)을 비롯해 조동일(서울대)·도정일(경희대) 교수, 박신의(미술평론가), 정재형(영화평론가) 같은 이들이었다.
스타 강사들의 강좌가 열리는 날에는 수강생들이 말 그대로 밀물처럼 ‘쇄도’했다. 민예총 실무진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일손을 도와야 하는 초긴장 상태였다. 80명이면 빼곡히 채워지는 6층 강당에 두 배 가까운 수강생들이 한여름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열공’하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나마 한 대뿐인 에어컨으로는 수강생들의 열기를 식힐 수 없었던 것이다. 문예아카데미는 스타 강사도 여럿 배출했다. 정기용(작고·건축가), 진중권(미학자), 양운덕(철학자)의 수업 때는 지금의 연예인 ‘사생팬’ 같은 수강생들도 없지 않았다. 뒤풀이 자리는 곧잘 ‘뜨거운’ 토론마당이 되었다. 이성욱(작고·문학평론가)은 단골 식객이었다. 문예아카데미는 건축, 만화, 미학이론 같은 인문학 강좌를 비롯해 판소리·전통음악 같은 워크숍 형태의 다양한 강의를 꾸준히 개설했다. 이 모든 기획을 주도했으면서도 전면에 나서지 않고, 배후에서 조직한 사람이 바로 김용태 사무총장이었다.
■ 민족예술대학원대학 설립 무산
문예아카데미 성공 힘입어 추진한
민족예술대학원대학 교육부서 반려
세대 수혈 필요한 시점에 무산
문민 이후 ‘저항에서 대안으로’
문화연대 딴살림에 지역화 조직
문예아카데미의 대중적 성공은 대학 설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97년 1월, 김용태 사무총장은 ‘민족문화의 요람’ 민족예술대학원대학(가칭)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한다. 문예아카데미를 성공적으로 운영한 노하우를 십분 살려 70~80년대 민족예술운동의 성과를 계승하고, 21세기 민족문화의 방향을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통해 모색하자는 취지였다. 98년 교육시장 개방을 앞두고 문화운동 후속세대를 발굴하자는 목적도 무시할 수 없는 명분이었다. 문화학과, 통합매체학과, 공공예술과 등 3개 과를 개설하고, 예술철학 등 8개 과정을 포함하는 커리큘럼이 짜졌다.
문예아카데미에서 90년 처음 개설한 민족미학 여름·겨울학교가 성공을 거두자 92년부터 시민을 위한 문예강좌를 표방하며 새로운 문화 흐름을 소개해 큰 호응을 얻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민족예술대학원대학 설립에는 백낙청 교수(서울대)가 관심이 많았다. 한때 광산 경영 등을 했던 독지가 채현국(효암학원 이사장)도 지원을 약속했고, 시흥이 지역구인 제정구 국회의원이 학교 터를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설립준비위원회가 꾸려졌다. 심우성(민속학자)·김지하(시인)·김진홍(목사)·정지영(영화감독)·리영희(언론인) 등 31명이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민예총 사무실이 입주한 옛 건국대 건물 5층에 만화가 최호철이 그린 정감 넘치는 ‘캠퍼스 조감도’가 걸린 것도 그 무렵이다.
그러나 98년 3월 개교를 목표로 했던 이 대학원대학 설립은 무산되었다. 실무자로 참여한 조한기(정치인)는 “교육부에 설립인가 신청서를 제출했으나, 재정과 예산계획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서류가 반려되었다”고 말한다. 진보적 문예운동의 질적 도약과 더불어 새로운 세대의 꾸준한 ‘수혈’이 필요한 시점에서 대학 설립 무산은 퍽 아쉬운 대목이다. 창립 10돌을 즈음해 재도약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97년 말 아이엠에프(IMF)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가 소위 ‘돈만 아는’ 저질 스노브(snob·속물)의 문화적 문법을 견고히 형성해온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최근 취업률 저조를 이유로 잇따라 예술학과의 문을 닫는 대학의 현실을 보라.
민예총 간부들과 실무자들이 1992년 여름 수련회를 마치고 서울 청량리역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줄 맨 가운데 염무웅 문예아카데미 교장, 오른쪽 다섯째 김용태 사무총장, 그밖에 임홍배·최석태·정재형·이성욱·이희진·이은봉·이영미씨 등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고영직씨 제공
■ 지역 민예총 설립 붐…못다 이룬 미완의 꿈
민예총은 93년 김영삼 정부 때 사단법인으로 변신하며 패러다임을 ‘저항에서 대안으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조직의 분화 과정도 있었고, 지역적 확산도 있었다. 99년 가을 문화개혁시민연대(문화연대)가 출범한 것은 분화의 한 과정이었다. 김정헌(화가)·도정일·강내희(중앙대)·심광현(미술평론가)·이성욱이 주도해 ‘딴살림’을 차린 것이다. 심광현은 “사회운동으로서 문화운동을 지속하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말한다.
이에 자극을 받은 것일까. 김용태 사무총장은 2000년대 이후 민예총의 주된 활동 방향을 ‘지역화’로 돌려 조직의 활로를 찾았다. 50개 넘는 지회·지부가 결성되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의 전향적인 문화정책 환경이 적잖이 작용했음은 말할 나위 없다. 여하튼 김용태 사무총장은 2000년대 초반 잠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 몸을 담은 것을 제외하곤 민예총 사무총장으로서 지역화를 통해 변화된 시대 분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다. 서울에 있는 본부 민예총에 대한 구심력보다 원심력이 더 크게 작용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 때 사단법인으로 변신하며 패러다임을 ‘저항에서 대안으로’ 전환했던 민예총은 99년 가을 문화연대의 출범으로 분화를 겪었다. 사진은 문화연대 주역 중 한명인 미술평론가 심광현 교수가 99년 전승보(<산포도 사랑, 용태 형> 기획자) 큐레이터 등 민예총 문화정책연구소 실무진들과 회의중인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 무렵 민예총 내부에서도 급격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 90년대 말 전자우편과 팩스로 발송되던 소식지 <일일 문화정책 동향>이 문화운동판과 정책 현장에서 각광을 받았다. 조한기(이창동 장관 전 보좌관), 안성배(국회의원 보좌관), 염신규(문화기획자), 안태호(부천문화재단)는 2000년대 초반 문화운동판의 ‘뉴페이스’로 부상했다. 소식지 발행이 늦어지면 사무실로 전화가 걸려오곤 했다. 그런 날은 실무자들이 필시 ‘낮술’을 마신 날이다.
정희섭이 설립을 주도한 한국문화정책연구소가 법인화를 꾀하며 민예총 외곽에 포진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일일 문화정책 동향> 소식지를 대신해 2000년대 초중반까지 발행된 <컬쳐뉴스>는 문화예술판의 주요 쟁점을 추렸다. 강성률(영화평론가)·김소연(연극평론가)이 편집장을 지냈다. 염신규는 “김용태 사무총장은 스태프들에 대한 신뢰가 깊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뿔싸! 스태프에 대한 신뢰 못지않게 투명행정을 시스템화하지 못한 점은 두고두고 뼈아프다. 그렇다, 절정과 추락은 병발하는 법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 ‘낙백(落魄)한’ 민예총의 처지를 생각하면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민예총 김용태 사무총장의 삶-예술 텍스트는 우정의 네트워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우정의 네트워크에 술잔이 빠질 수는 없으리. 그는 누구라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인력을 내장한 ‘지남철’ 같은 존재였다. 누군가가 그를 두고 ‘걸어 다니는 민예총’이라고 한 말이 과언이 아닌 것이다. 포스트-김용태 시대의 문화운동을 고민하는 것은 이제 살아남은 우리의 몫이 되었다. 속단할 필요는 없으리라. ‘새 부대’의 운명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므로.
고영직 문학평론가
“파주 강요배 작업실은 술과 노래, 토론 날뛰는 집회장이었다”
30년 지기 이종률 민주화사업회 국장
“우주적 상상력이 넘나드는 구라
느닷없는 씨름판 얽히는 자리 좋아해”
1985년 11월22일 민미협 창립총회 몇 시간을 앞두고 ‘용태 형’은 이대 앞 순댓국집에서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손장섭 형’을 설득해 대표로 세웠다. 사진은 91년 10월 지리산 답사에 나선 민미협의 주역들. 왼쪽부터 김용태·홍선웅·손장섭·주재환.
“내가 ‘용태 형’을 처음 만난 건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 창립 이듬해인 1986년, 인사동 사거리 경미빌딩의 민미협 사무실에서였다. 총무를 맡고 있던 홍선웅 형을 만나러 간 길이 아니었나 싶다. 낮술 마신 용태 형은 처음부터 곰살맞게 나를 대해 주었다. 그길로 인연을 맺어 30여년을 민미협-민중후보 백기완 선거운동본부(백본)-민예총-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같이 일했다.”(<산포도 사랑, 용태 형>)
이종률(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기념사업국장)은 이처럼 가장 오랜 세월 고 김용태 선생과 함께 일을 했던 만큼 갖가지 숨겨진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형이 하소!” 85년 11월22일 민미협 창립 당일. 용태 형은 이대 앞 순댓국집에서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몇 시간째 손장섭 선생을 “꼬셨다.” 자신이 사무국장을 맡아 ‘감옥행’을 포함해 모든 뒷일을 맡을 테니 손 선생더러 초대 대표 자리를 수락해 달라고 한 것이다. “완도 촌놈 출신으로 곤궁한 서울 생활을 거듭하다 겨우 <동아일보>에 자리잡은 손 선생으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결국, 용태 형의 꼬임에 빠진 손 선생은 팔자에 없는 재야단체의 대표로서 도전과 응전이 교차하는 시대의 한복판으로 나섰다.”
86년 7월 민족화가이자 ‘절친’ 오윤이 돌연 세상을 떠났을 때 누구보다 마음 아파했던 사람이 용태 형이었다. “술병(간암) 치료를 위해 오윤 형의 진도 요양을 주선했던 집이 하필이면 ‘진도 홍주’를 빚는 집이라서 병을 악화시킨 것이 아닌가 싶다고 그랬다.”
“그것도 못하냐? 야이 새끼야 죽어!!” 젊은 시절 용태 형은 성질도 급하고 욕도 많이 했다. 큰일을 앞두고 후배들이 머뭇거리거나 주저하면 인정사정없이 몰아쳤다. “정희섭·정남준·이수남·양문규 그리고 나…. 민예총에서 일하던 시절 우리는 용태 형을 안주 삼아 부산식당이며 인사동, 낙원동 등지에서 술도 많이 마셨다. 형은 그 꼬락서니를 지켜보다 슬쩍 불러서 일의 길목과 방법을 얘기해주고 일이 잘 마무리되면 용돈도 챙겨주곤 했다.”
민예총 사무총장 시절인 90년대 초반, 용태 형은 파주 덕은리에 있던 강요배의 작업실에 자주 놀러왔다. “위채에 강요배와 김용덕, 아래채에는 나와 김기호가 있던 그 무렵 작업실은 술과 노래와 토론이 날뛰는 집회장이었고 지방 상경객들의 합숙소였고 신입회원들의 교육장이었다. 용태 형이 멸치 육수로 제법 맛을 낸 국수 몇 그릇과 김기호가 한 다라 무쳐낸 콩나물을 안주로 막걸리 수십 병을 비워도 끝날 줄 모르는 자리였다. 작업실 뒤편 햇살 좋은 무덤가에 둘러앉아 시국담과 만담, 우주적 상상력이 넘나드는 구라, 그러다 느닷없는 씨름판이 어우러진 그런 자리를 용태 형은 좋아했다.”
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 용태 형이 <코리아 통일미술전>을 성사시켰을 때였다. “일본 도쿄 센트럴미술관에서 열린 개막 행사 때 최계근 북쪽 대표와 함께 활짝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은 생전에 용태 형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었다. 그런데 정작 정남준 형과 함께 미술전 실무를 맡았던 나는 일본대사관에서 비자를 내주지 않는 바람에 도쿄에 갈 수 없었다. 섭섭했던 내 마음을 알았던지 용태 형은 그 뒤 중국 노신(루쉰)미술대학, 중국미협 교류를 위한 선양(심양)~베이징 출장길 동행으로 기분을 풀어주었다.”
민예총을 그만둔 뒤 옥상에 빨래를 널며 실의에 빠져 살던 그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 불러준 것도 용태 형이었다. “성유보·나병식·조성우·문국주 등과 어울려 정치인들과 접촉이 잦나 싶더니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다. 2002년부터 용태 형은 상임이사로 나는 기념사업과장으로 3년간 한솥밥을 먹었다. ‘송두율 교수 초청 사건’으로 어려움도 겪었지만 6월항쟁 기념 공연을 기획하고 대규모 광장축제 ‘6월난장’도 함께 만들었다. 용태 형이 형수에게 생활비를 제대로 갖다준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었다.”
용태 형은 소원대로 지상에서 소주 만 병을 마시고, 68년 동안 세상 한판 멋지게 놀다 갔다. “그이는 본능적으로 시대정신을 체득한 사람이었다. 독재와 독점이 횡행하던 시대와 타협 없는 싸움을 이끌었으니까. 신학철 선생은 80년대 김용태를 일러 야전사령관이라 불렀다. … 용태 형은 조그맣고 얼굴이 약간 얽었다. 그 얼굴에 째진 눈으로 웃으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