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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길을 찾아서] 대중 속으로 간 민예총…‘자, 손을 잡자’ 노래패 공연 대박

등록 2014-10-06 18:55수정 2015-04-28 21:00

1990년대 들어 민예총은 빠르게 번져가던 노래운동을 조직 확산과 연대 강화의 매개체로 활용하고자 대학가와 노동권의 노래패들을 참여시킨 대규모 민중가요 공연 기획을 주도했다. 사진은 90년 3월24일 서울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자, 우리 손을 잡자’ 첫번째 공연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1990년대 들어 민예총은 빠르게 번져가던 노래운동을 조직 확산과 연대 강화의 매개체로 활용하고자 대학가와 노동권의 노래패들을 참여시킨 대규모 민중가요 공연 기획을 주도했다. 사진은 90년 3월24일 서울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자, 우리 손을 잡자’ 첫번째 공연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⑬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그림)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열번째로 박인배 세종문화회관 사장이 민예총 결성과 남북 예술교류 활동과 일화를 소개한다. 이어 고영직, 심광현, 이종률, 조성우,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대선 패배 뒤 문예운동 대중화 절감
용태 형이 살림 맡은 민예총 출범
전교조·전노협 기금전에도
그가 나서면 놀랄 만한 수익 올려

90년대 대형공연 흥행 일궈
93년 문민정부 들어서자 법인 전환
문예아카데미 등으로 기반 넓혀

남북·재일동포 예술교류 눈돌려
94년 ‘코리아통일예술제’ 합의
반말투 친밀감·단도직입의 발언
지루한 공전 무너뜨리며 우의 다져

■ 87년 대선 패배의 역설적 산물, 민예총

내가 ‘용태 형’과 문화운동의 장에서 처음 함께한 것은 1985년 형이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84년 창립) 실행위원으로 참여했을 때였다. 그때는 ‘부산 사투리를 몹시 심하게 쓰는 미술 쪽 선배’로만 여겼다.

민문협(민문연)을 비롯해 문학·미술·언론·출판·교육 등의 문화 6단체는 87년 6월 항쟁을 뒷받침하는 조직운동의 문화부문을 담당했는데, 용태 형은 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집행위원을 맡고 있었다. 6·29선언에 의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뒤, 그해 여름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정치적 역동성을 크게 강화해 갔다. 하지만 12월 대통령 선거일이 가까워 오자 김대중 후보 비판적 지지론, 김영삼 중심의 후보단일화론, 백기완 민중후보론 등으로 진영은 분열되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용태 형은 백 후보의 비서실장을 맡았고 민문연 실행위원들도 각기 처지와 견해에 따라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그 결과는 노태우 후보의 어부지리 당선이었다.

이른바 ‘민민’ 진영은 뼈를 깎는 각성의 아픔을 안은 채 이듬해 봄 총선에서는 여소야대를 이루었고, 일상 영역에서의 민주화가 확산되는 기반을 조성했다. 대선 기간 동안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던 문화예술운동 진영에서도 80년대 문예운동의 성과들을 좀더 대중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통합적 조직 건설이 필요하다는 논의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88년 9월30일 서울 신촌역 근처 예술극장 한마당에 모인 여러 장르 대표들은 새로운 예술인 조직 결성에 의견 일치를 보았고, 조직·규약(김용태), 인선(황석영), 재정(오종우), 지역 연락(채희완), 대회 준비(임진택) 등 5개 소위를 구성해 민예총 건설에 나섰다.

그리하여 88년 12월23일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총회가 열렸다.

용태 형은 ‘조직’이라는 가장 핵심적인 임무를 맡았고 특유의 친화력을 발휘했다. 또한 그 이전에 문예조직 건설에 늘 바람잡이 노릇을 했던 황석영 선배와도 호흡을 잘 맞추었다. 한 사람은 백 후보 비서실장, 또 한 사람은 디제이 지지 방송 연설원이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새로운 통합의 기운이 매우 강하게 작용한 셈이었다.

이날 조성국(영산줄다리기보존회 회장), 고은(시인), 김윤수(미술평론가) 세 사람의 공동의장에 신경림 시인이 사무총장을 맡고, 용태 형은 조직의 실무를 관장하는 사무처장(90년도부터 사무총장)을 맡았다.

이때부터 용태 형은 민예총 살림을 실질적으로 책임지는 자리에 ‘묶였다’. 조직의 회계는 회비로 충당하도록 했지만, 실제 모아지는 총액은 크지 않았다. 그러니 독지가들의 후원금을 모아야 했고, 적자가 누적되면 아쉬운 소리를 해서 돈을 빌리기도 했다.

하지만 용태 형은 자신은 늘 쪼들리더라도 더 큰 대의를 위해 희생해도 좋다는 태도였다. 89년 ‘전교조 기금마련전’과 90년 ‘전노협 기금전’이 그러했다. 당시 전교조와 전노협의 담당자였던 이상호 선생은 전교조 기금마련전에서 “1억원 이상의 수익금을 올렸는데 이 기금으로 유통업체인 참교육사를 세우게 되었다”고 하면서 “기금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민예총의 김용태 사무총장, 큐레이터 구실을 해준 유홍준 교수, 독특한 한글서예작품을 처음으로 공개 전시회에 출품해준 신영복 선생의 헌신적인 도움이 컸다”고 회고한다. 이듬해 ‘전노협 기금전’은 3억원 가까운 수익금을 올려 인사동 화랑가에서도 놀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심한 탄압을 받고 있던 전노협이었지만 조합원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국민들 모두에게서 큰 애정을 받고 있다는 점을 확인한 용태 형의 또 다른 이바지였다.

1987년 대선 패배의 시련을 겪은 뒤 문화예술운동 진영에서는 80년대 문예운동의 성과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킬
통합적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김용태 선생은 누구보다 앞장서 갈라진 세력들을 한데 모았다. 사진은 88년 12월23일 서울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열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총회. 앞줄 왼쪽부터 작가 황석영, 영화감독 이장호, 한 사람 건너 계훈제·백기완 선생, 그 뒷줄에 리영희·김진균 교수 등이 자리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7년 대선 패배의 시련을 겪은 뒤 문화예술운동 진영에서는 80년대 문예운동의 성과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킬 통합적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김용태 선생은 누구보다 앞장서 갈라진 세력들을 한데 모았다. 사진은 88년 12월23일 서울와이더블유시에이(YWCA) 강당에서 열린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총회. 앞줄 왼쪽부터 작가 황석영, 영화감독 이장호, 한 사람 건너 계훈제·백기완 선생, 그 뒷줄에 리영희·김진균 교수 등이 자리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 대형 집회공연 ‘자, 우리 손을 잡자’의 제작자

용태 형에게 기금마련전은 어찌 보면 자신의 장르 전문성을 활용하는 사업이었기에 부담이 적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90년도를 맞이하면서 가장 빠르게 부상하는 장르는 노래운동이었다. 집회에서 다 같이 노래부르기를 할 수 있는 노동가요, 민중가요들이 속속 창작되었고, 이를 보급하는 노래테이프들도 빠르게 확산되었다.

90년 봄, 용태 형은 이런 흐름을 빠르게 살려 3월24일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자, 우리 손을 잡자> 공연을 열었다. 노래패들로서는 새로 창작된 노래를 선보이는 자리이자, 학생운동권에서는 새로 입학한 신입생들이 운동가요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여 조직적으로 동원을 했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몇 번은 제작비를 충당하고도 남을 정도의 흥행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이 공연은 92년 봄까지 계속되었고, 그해 연말 대선 때는 서울에 이어 부산에서도 공연을 했다.

하지만 총제작자 격인 용태 형은 공연을 보면서도 속이 탔다. 입장료로 제작비가 충당되면 다행이겠지만 적자라도 나면 또 어디선가 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민예총은 90년 3월 낙원상가 골목 안쪽으로 이사를 해 공간을 조금씩 넓히면서 각 장르들의 협의체로서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3층에 들어갔던 본부 사무실에 이어 2층에 민미협이 오고, 다음번에는 본부 사무실이 4층으로 올라가고, 3층에 민족음악협의회가 자리를 잡고 민족미학연구소, 민족극연구회 등이 모임방을 같이 썼다.

덧붙여, 용태 형은 문예아카데미 강의실로 사용하겠다며 5층까지 확보해놓았다. 요즘말로 일단 질러놓은 것이었다. 염무웅 선생의 민족미학연구소가 90년 여름에 개설했던 ‘민족미학 여름학교’에 많은 학생들이 몰리자, 용태 형은 이를 상설로 개설하기로 했다.

■ 민예총 법인화 이후 남북 예술교류의 길로

93년 민예총은 사단법인 인가를 받았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섰고, 문민정부라 이름했다. 청와대 교문수석에 임명된 김정남 선배와 용태 형이 잘 아는 사이이기도 해서, 민예총의 법인화는 별 어려움 없이 추진되었다. 법인이 되면서 ‘자, 손을 잡자’ 공연, 문예아카데미 등을 통해서 확보된 대중적 기반을 좀더 안정적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코리아통일미술전>을 개최할 수 있게 되었고, 94년부터 지역 민예총 건설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전국조직화의 토대가 되었다.

‘코리아통일미술전’은 도쿄와 오사카에서 재일본조선문학예술가동맹(문예동)과 남북의 미술작가들이 공동전시회를 열고 작가들도 함께 참여하기로 한 것이었다. 민미협 식구들은 출품작 준비 등 들뜬 분위기 속에서 일본으로 건너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김용태 사무총장과 사무차장을 맡고 있던 나는 필요한 비용 마련 대책이 막막했다. 그때 통일부 장관이었던 한완상 부총리가 ‘미징’(微徵)이라고 쓰여진 금일봉을 주고 격려해주었는데 액수로는 그야말로 미미했지만 그것은 그가 사업 자체는 인정한다는 표시였고, 김정남 수석의 주선으로 기업체 협찬을 받을 수 있었다.

지역 민예총 건설은 지역의 자율성을 강조한 까닭에 해당 지역 문예운동의 역량에 따라 10여년 가까운 시기의 편차를 가지고 서서히 확장되었다. 용태 형은 그때부터 남북 예술교류 사업에 매진했다.

일본의 ‘코리아통일미술전’을 계기로 남북을 오가며 통일미술전을 포함한 ‘코리아통일예술제’를 개최하기로 합의되었다. 94년 베이징에서 3자간 회합까지 있었으나 그해 여름 김일성 주석의 갑작스러운 타계로 남북 정상회담이 무산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일 또한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나 93년 통일미술전에서 친분을 쌓은 김용태·홍영우(재일본 문예동맹 미술부장)·최계근(북한 화가)·송석환(북한 작곡가·이후 문화성 부상 역임)·김정수(문예동 위원장) 등의 우정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지속적인 베이징 회담 등으로 이어졌다. 매번 용태 형을 수행하고 베이징이나 도쿄로 다녔던 나로서는 그의 반말투 친밀감이 얼마나 사람들을 쉽게 가까워지게 하는가를 보았고, 단도직입의 발언들이 협상장의 지루한 공전 분위기를 허물어뜨리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쩌면 용태 형은 지금도 남과 북을 오가며 “거 쫌 잘해 보시오” 하면서 남북 예술인들의 교류사업을 부추기고 다니는지도 모른다.

박인배 세종문화회관 사장·전 민예총 기획실장


북쪽 고위급 인사도 녹인 용태형의 ‘바둑 회담’

삽화·만평 ‘출판미술’ 해 보라며
‘교사 박재동’ 끌어들인 민중미술
‘한겨레 그림판’ 작가로 등 떠밀어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으로 맺은 김용태 선생과 박재동 화백의 인연은 1988년 5월15일 <한겨레신문> 창간 때 ‘한겨레 그림판’을 탄생시켰다. 사진은 지난 3월26일 ‘용태 형과 함께 가는 길’ 출판 기념 전시회 때로 왼쪽부터 박재동·김용태·김상철·이애주. 
 사진 화가 권용택 제공
미술동인 ‘현실과 발언’으로 맺은 김용태 선생과 박재동 화백의 인연은 1988년 5월15일 <한겨레신문> 창간 때 ‘한겨레 그림판’을 탄생시켰다. 사진은 지난 3월26일 ‘용태 형과 함께 가는 길’ 출판 기념 전시회 때로 왼쪽부터 박재동·김용태·김상철·이애주. 사진 화가 권용택 제공
1988년 5월15일 국민주신문 <한겨레신문> 창간에 힘을 보태던 김용태 선생과 민중미술운동 진영에서는 시사만평 작가를 찾는 데도 앞장섰다.

“1988년 풋내기 화가가 겁없이 덜렁 결혼을 했으니 신접살림이 연일 곤궁이었다. 이내 아이까지 태어나자 그에 못 견뎌 ‘금성아트프로덕션’이란 곳에 출근을 했는데 전임자로 강요배·박세형·박재동 선배가 있었다. 한날, 사무실로 나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불똥이냐? 내다. 용태다.’ 용건인즉 ‘곧 창간될 <한겨레신문>의 만평작가를 구하는 게 급하다. 공모를 했으나 네칸 만화의 김을호 외 당선작가가 없다’는 간단한 설명과 함께 ‘이 형님 생각에는 불똥이 니가 그 일을 맡았으면 좋겠으니 서둘러 샘플을 몇 컷 그려 와 보라’는 하명이었다. 나는 단숨에 제언했다. ‘아, 그건 박재동이 적임잡니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에 담긴 화가 박불똥의 증언이다. ‘용태 형’의 회고담은 맥이 조금 다르다.

“그때 박재동은 육본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자제들이 많이 다니는 중경고 미술 교사였어. 근데 그때 주재환 선생이 출판미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어. 그야말로 현장미술이 중요한 거니깐. 출판미술이란 이름을 주 선생이 만들어내면서, 이거는 미술 하는 사람들이 앞으로 삽화·만평·포스터 이런 데까지 진출해서 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지. 그때 강요배도 창문여고 선생이었는데 나하고 주 선생이 ‘강’과 ‘박’에게 학교 관두고 출판미술로 뛰어들라고 권유했지. 근데 자기들 직장이 있는데 안 된다고 하더라고. 고집부리더라고. 재동이는 결혼을 하려고 했거나 막 했을 때였어.”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안정된 교사 자리를 그만두고 나와 서울 광화문의 한 건물 옥탑방을 빌려 금성아트프로덕션을 차려 함께 일을 시작했다.

“옛날에는 선배들이 이야기하면 후배들이 따르곤 했어. 어떻게 보면 참, 좋은 직장 하나 내던지고 미술운동 한다는 마음으로 갔으니, (…) 옛날에 순수미술 하는 사람들이 삽화 그리는 사람을 우습게 알고 그랬다고. 그런데 우리가 적극적으로 뛰어들면서 사회운동의 중추를 이루게 된 거지. 앞으로 그림 전시장에 누가 오겠어. 대중적으로 많이 볼 수 있는, 애들도 즐겨 볼 수 있는 그런 전시장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그게 선명지명이야. 잘한 거지.”

그러다 ‘한겨레 만평작가’ 공모를 맞게 됐고 용태 형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유홍준 교수와 함께 박재동에게 해보라고 했더니 안 하겠다고 하는 거야. 만평작가로 처음엔 이력서를 넣지도 않은 거야. 내가 화를 막 냈지. 결국은 사표를 내고 한겨레신문사에 들어가더라고.”

그렇게 해서 국내 시시만화사의 한 획을 긋게 되는 ‘박재동의 한겨레 그림판’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의 그림판은 첫회부터 독자 대중을 열광시켜 연재 8개월 만인 89년 2월 단행본 <환상의 콤비>까지 펴냈다.

“그때 용태 형, (임)옥상이 형 등등 나한테 해보라고 등 떠민 선배들이 여럿이었지. 처음엔 싫다고 했는데 막상 한겨레 들어와서 그려보니 재밌는 거야. 나도 내가 그렇게 좋아하게 될 줄 몰랐지. 반응이 뜨거우니 절로 신바람이 나던 시절이었어.”

박재동(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은 박불똥의 ‘추천 비화’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라고 동의했다. ‘금성아트’에서 같이 일하면서 그가 울산의 만화방집 아들로 자라 일찍이 중학생 시절에 만든 <내 가슴에도 봄은 왔읍니다>란 만화책까지 주위에 보여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태 형과 박재동의 인연은 82년 무렵 강요배의 추천으로 참여한 ‘현실과 발언’(현발)에서 시작한다. “초창기에 용태 형이 몇몇 그림쟁이들과 둥근 술상에 막걸리 먹으면서 한 말이 아직도 생각나. ‘시대가 이럴 때 예술가들이 뭔가 해야 돼!’ 지금은 민중미술이 너무나 일반화되어 있고 작가들도 당연히 시대의 정신을 구현하는 미술을 하지만 그때는 아주 특별한 일이었잖아. 그래서 그런지 난 형의 그 말이 아직도 생생해. 예술가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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