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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길을 찾아서] ‘1인10역’ 그가 북돋우면 ‘반독재 창작열’이 혁명예술로 변신

등록 2014-07-14 18:56수정 2015-04-27 22:22

1980년대 중반 민족미술협의회에 이어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결성을 계기로 민족문화운동은 민주화 진영의 핵심축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때부터 ‘1인10역’을 해낸 기획자 김용태의 열정은 87년 6월항쟁부터 90년대 초반 군사정권 종식에 이르는 민주화 격변기에 걸개그림·마당극·노래운동 등등 민족민중예술로 꽃피었다. 사진은 89년 4월 문익환 선생 평양방문 보고 및 환영대회 때 연세대에 내걸린 백두산 걸개그림. 사진가 박용수씨 제공
1980년대 중반 민족미술협의회에 이어 민중문화운동협의회 결성을 계기로 민족문화운동은 민주화 진영의 핵심축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그때부터 ‘1인10역’을 해낸 기획자 김용태의 열정은 87년 6월항쟁부터 90년대 초반 군사정권 종식에 이르는 민주화 격변기에 걸개그림·마당극·노래운동 등등 민족민중예술로 꽃피었다. 사진은 89년 4월 문익환 선생 평양방문 보고 및 환영대회 때 연세대에 내걸린 백두산 걸개그림. 사진가 박용수씨 제공
[길을 찾아서]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 ❷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6번째 이야기 ‘용태 형과 문화운동시대’는 지난 5월 작고한 김용태 전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이사장이 끝내지 못한 구술을 그와 더불어 한 시대를 헤쳐온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대신 들려주는 기획이다.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의 필진 가운데 20여명이 기꺼이 나섰다. 첫번째로 이부영 전 국회의원이 2회에 걸쳐 민중문화운동의 시대적 의미와 ‘용태 형’이 차지한 자리를 개괄적으로 소개한다. 이어 고영직, 김정헌, 문영태, 박인배, 심광현, 유홍준, 윤범모, 이애주, 이태호, 이종률, 임옥상, 임진택, 조성우, 홍선웅, 황석영씨 등이 필진으로 참여한다.

민문협 결성 활동가 뒷바라지
술 사주면 자금출처 안물어보고
그냥 마셔주는 게 미덕
젊은 예술가들의 기획자 노릇
걸개그림·놀이패 공급도 그의 몫

박종철·이한열 사망 사건땐
이애주의 ‘바람맞이 춤’ 기획
‘거리의 혁명예술 이런 것’ 실감
동료들 밀어주지만 사욕 안챙겨
사회적 대의 밀고나간 산 전범

무슨 운동, 어느 시대나 그렇듯이 1980년대 초·중반 운동판에도 노선의 갈등 대립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었다.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가 당시 용어로 기층 조직 젊은 활동가 중심이었다면, 그 운동만으로는 전두환 군사정권의 탄압을 돌파하기 어려우니 재야 명망가와 종교계, 문화예술계, 대학교수 등이 결합된 정치적·사회적 대표성이 있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 두 논리의 중심에 김근태와 장기표가 있었다.

민민협을 대체할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민민협이 민통련으로 조직 이전해 가는 과정에 중요한 두 부문인 민청련과 개신교 운동은 민통련에 참여하지 않았다. 민통련이 창립된 지 두 달 만인 1985년 5월 민청련의 김근태 의장이 남영동 대공수사단에 끌려가서 살인적인 고문을 당했다. 전두환 정권은 운동진영의 분열 고리를 파고 들어와 김근태와 이을호를 희생양으로 삼았다. 민주화운동 진영 전체에 테러 위협을 가하려는 의도였다.

그런 과정에 민민협에 이어 민통련의 투쟁 현장은 광범위하게 넓어지고 있었다. 전국의 노동자·농민들과의 연대, 조심스럽지만 대학 현장과의 연계가 이뤄지고 있었다. 민중문화운동협의회(민문협)의 청년 활동가들도 분주하게 뛰어다녔다. 그들의 뒷바라지는 ‘용태’의 몫이었다. 그의 자금 출처는 화가들의 개인전과 그룹전을 기획하고 판매하는 데서 염출되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는 것이 당시의 미덕이었다. 술 사주면 마셔주는 것만이 미덕이었다.

동호인 모임 ‘현실과 발언’, 민족미술협의회에 이어 민중문화운동협의회가 만들어지면서 용태는 명실공히 민족문화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다. 반독재 민주화와 분단 타파의 대의에 충만한 젊은 예술인들의 작품 의욕은 불을 뿜고 있었지만 전시회를 꾸리고 준비자금을 만들어낼 역량 있는 기획가가 없었다. 용태는 1인10역을 해냈다. 화가들의 창작열을 북돋워 유명 작가로 변신시켰다. ‘용태 형’의 신화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연대운동의 책임 활동가들이 서울에서 모이게 되면 일망타진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정성헌이 진치고 있던 대전의 가톨릭농민회관을 자주 이용했다. 단체마다 상황과 대응노선을 밝히고 전체 민통련의 투쟁 방향을 정하려면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 거기서도 용태와 채광석·최민화 등 몇몇은 ‘꼬마들’(젊은 후배들)의 논쟁에서 벗어나 옆방에서 막걸리잔과 바둑판에 매달리는 것이었다. 용태의 변인즉 “들어봐야 뻔한 소리 늘어놓는데, 시간이 아깝다. 바둑 두고 술 마시기에도 시간 모자란다.”

민통련과 민추협이 결성되고 85년 2·12 총선에서 민정당이 패배하자 그때까지 이른바 유화국면을 유지해오던 전두환 정권은 대대적인 탄압 공세로 전환했다. 그 시기가 재야와 ‘양김’의 야당이 직선제 개헌투쟁을 함께 전개하기로 합의한 시기와 일치했다.

재야 연대의 중심인 민통련에 비상이 걸렸다. 감시망을 어렵게 피해 “독재를 물리치고 민주헌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 실린 <민중의 소리>라는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경북 왜관 분도출판사의 배려로 인쇄해 민통련 지역조직을 통해 배포하고 야당의 개헌 현판식 때마다 지역 운동역량들을 최대한 동원해냈다. 자연히 홍보국장 박계동과 지역조직 간사 이명식이 바빴다. 거기에 각 지역에 맞는 걸개그림, 놀이패의 공급은 용태와 김도연 등의 연계를 통해 이뤄졌다. 그때 이미 민주화운동 진영과 야당이 연대투쟁을 벌이는 것에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높았다. 그런 흐름이 극적으로 나타난 것이 86년 5·3 인천 민주화투쟁이었다. 직선제 개헌투쟁을 벌이고 있는 한쪽에서 ‘노동해방만세’ ‘민중제헌헌법 쟁취하자’라는 노동운동 세력의 별도 투쟁이 벌어졌다.

‘5·3 인천 투쟁’으로 민통련은 대대적인 공안탄압을 당했다. 주요 간부들은 구속되었거나 수배당했다. 필자도 수배되었다가 체포당했다. 87년 6월 민주항쟁이 벌어지는 동안에, 뒤이어 12월 대통령 선거가 벌어지는 결정적인 시기에 다시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용태 역시 6월항쟁에 이르는 시기 동안 민문협을 이끌면서 무척 바쁜 시기를 보냈을 것이다. 박종철군 고문 은폐·축소조작이 진실로 밝혀지는 과정에, 그리고 이한열군의 최루탄 피격과 사망 과정에 용태를 중심으로 민문협 성원들이 어떤 활약을 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 무렵 감옥 안의 사정도 나아져서 교도소 간부들이 간혹 신문을 보여주기도 했다. 신문의 사진과 기사로 접하는 이애주의 ‘바람맞이춤’은 ‘혁명 예술이란 게 이런 것이구나’, 저런 거리예술이 나오기까지 용태가 얼마나 애를 썼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6월 민주항쟁이 부분적 승리로 끝난 이후 사태 진전은 지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필자가 갇혀 있던 김천교도소에는 주로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들과 청년단체 운동가들이 50명쯤 있었는데 이들은 이른바 민족해방파(NL)와 민중해방파(PD)로 갈려 있었다. 서로 말도 나누려 하지 않았다. 이 분열은 앞으로 우리 미래의 큰 화근 덩어리가 될 것이라고 예상됐다. 밖에서는 김대중과 김영삼이 서로 갈라져 각개전진하고 있었다. 민주진영의 패배가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런 가운데 용태는 이애주·임진택과 백기완 독자 대선후보 진영에서 뛴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민주세력의 승리가 불가능한 가운데 ‘백본’ 운동을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결국 대선 패배 뒤, 감옥 안의 젊은이들은 밥도 먹지 못하고 물도 마시지 못했다. 어떤 젊은이는 자기 주먹으로 시멘트 벽을 쳐서 주먹 뼈마디 껍질이 벗겨지기도 했다. 87년 대선의 분열과 패배는 아직도 한국 사회의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는 아직 87년 체제의 감옥에 갇혀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감옥의 실체는 민주진영의 분열이다. 분단독재세력에게 권력을 진상하는, 그래서 민주항쟁이 일어났지만 변화가 없는 상태를 말한다.

88년 2월 필자는 하순 노태우의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바깥세상에 나와 보니 황량한 들판에 찬바람만 불고 그렇게 함께 몰려다니던 ‘꿘’ 쪽 사람들도 서로 만나지 않았다. 그저 이제나저제나 그랬듯이 13대 총선에 나설 정치참여 예정자들만 이리저리 몰려다니고 있었다. 용태와 이애주가 백기완 선생을 모시고 집으로 찾아와 막걸리 마시고 갔다. 감옥에서 나온 필자가 그들을 위로해야 했다. 수많은 학생 노동자들이 분신자살하고 있었다. 분해서 억울해서 죽음으로 항의하고 있었다. 그들의 장례위원장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분열과 좌절의 대선 현장에 없었다는, 양김의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양김이라는 분들이 어처구니없게도 그 장례식장에 나타났다. 그 젊은이들이 왜 목숨을 버렸는지 생각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바로 눈앞으로 다가온 13대 총선에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 분노와 좌절 속에서도 용태와 문화일꾼들은 정중히 그리고 뜻있게 장례를 치러드렸다.

탈냉전시대의 도래가 비록 더디긴 했지만 한반도에서도 해빙과 분단 해소의 길로 가는 것임은 틀림없었다. 용태는 그동안 숙성된 문화예술 역량을 하나로 묶어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을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냈다. 지난 10여년 그가 보인 신뢰, 무욕의 자세가 그 일을 가능하게 했다. 신경림 김윤수 황석영 이애주 임진택 유홍준 김정헌 임옥상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문화예술인들이 그가 하는 일이라면 토 다는 법 없이 함께 밀고 나갔다.

민예총 창립과 함께 겪은 파동이 황석영-문익환의 방북 사건이었다. 용태는 황석영 방북으로, 필자는 문익환 방북으로 찜을 당했다. 그래도 용태는 구속을 면하고 <코리아 통일 미술전>으로 도약하는 길을 열어젖혔다. 북의 그림을 남에 가져다 전시하고 전파했다. 남의 그림을 북에 선보였다. 그 덕에 북의 미술계에서는 용태를 남의 미술계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대접했다. 요즘도 그렇게 보급된 북의 미술작품을 여기저기서 심심치 않게 접한다.

용태가 병이 깊어 회고록을 제 손으로 쓸 수 없게 되자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몸을 혹사해서 그렇다’고 나무라는 인사들도 있었다. 나는 그런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동의하지 않기도 한다. 역시 가장 큰 병인은 이명박-박근혜 시대를 살아가기에는 용태의 ‘진심이 허락하지 않아서’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화예술계에서는 여러 동료들이 일하게 만들고, 정작 이름 내고 실익을 보는 일에는 나서지 않으며, 막상 희생과 헌신을 해야 하는 일에는 스스로 신나서 나서는 ‘제2의 김용태’가 나와야 한다는 중론이 많다. 그의 기획력, 조직력, 추진력은 이른바 민주화-통일운동 진영에서 문학 말고는 열세를 면치 못하던 미술, 공연예술의 수준을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용태는 저강도 문화 비정규전으로 민주화-통일운동의 대의가 전사회적으로 먹물 번지듯 스며들게 만들었다. 용태가 사람을 모아(술과 바둑) 인화(人和)를 만들고 그가 주도한 조직에 사회적 대의를 불어넣고 진용을 짜서 밀고 나갔던 전범이 살아 있는 한 뒷배를 밀어주는 후학은 반드시 나오게 마련이다.

“용태 형~ 점잖은 이문구 형, 불같은 김남주 시인, 좋아하는 후배 채광석·김도연과도 만나서 술 한잔 했겠지. 좋겠다. 요즘 꼴 안 봐서….”

이부영 해직언론인 전 국회의원


‘소주’와 ‘낮술’은 가난했으나 열정과 패기만은 넘쳤던 1970~80년대 문화예술인들의 마지막 낭만시대를 상징한다. 사진은 90년대 초반 전업작가 생활을 위해 제주도 고향으로 돌아간 강요배(왼쪽) 화백을 방문해 해변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김용태(가운데) 선생과 김상철(오른쪽) 제주4·3연구소 이사장의 모습.
‘소주’와 ‘낮술’은 가난했으나 열정과 패기만은 넘쳤던 1970~80년대 문화예술인들의 마지막 낭만시대를 상징한다. 사진은 90년대 초반 전업작가 생활을 위해 제주도 고향으로 돌아간 강요배(왼쪽) 화백을 방문해 해변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는 김용태(가운데) 선생과 김상철(오른쪽) 제주4·3연구소 이사장의 모습.

거나하게 술기운 오르면 “소주 100병만 갖고 온나”

반주 ‘한잔’으로 시작한 낮술 문화
“낭만세대 상징으로 백과사전 오를만”

“야, 소주 100병만 갖고 온나!”

김용태 전 민예총 이사장을 위한 헌정 문집 <산포도 사랑, 용태 형>(현실문화 펴냄)에는 ‘술’과 ‘바둑’에 얽힌 일화가 편편마다 빠지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소주 100병’과 ‘낮술’은 용태 형은 물론 그 시절 문화운동판의 상징이었다.

1978년 출판문제연구소를 거쳐 작가 동인 ‘현실과 발언’ 태동기부터 함께 활동한 ‘절친’ 주재환은 “소주 100병의 저작권자는 김용태이며, 저작권 분양자는 이 시대 최고의 소주파 거장 손장섭이다. 거나하게 술기운이 오르면 용태는 흉내내기 어려운 특유의 경상도 목소리로 ‘소주 100병만 가져오라’고 흥얼거렸다. 말의 파급력은 상당해서 ‘선생님, 소주 100병 가져갈까요?’ 이렇게 전화가 오면 나 역시 ‘왜 그리 통이 작아. 1000병이야’ 이렇게 농칠 때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소주 100병이란 말이 마지막 낭만세대를 대표하는 상징어로 백과사전에 오르길 바란다”고 썼다.

당대의 술꾼이자 술이야기꾼으로도 활약중인 김학민(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낮술이 땡기던 시절’에서 용태 형과 술 마신 기억들을 회고한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이듬해 2월 풀려났으나 학생운동권의 제적생이자 불온분자로 찍혀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그는 신경림 시인의 추천으로 일하게 된 미술전문지 <미술과 생활>에서 기자로 ‘용태 형’과 만났다. 이 잡지는 김용태가 수년 전부터 혼자 꾸려오던 전시회 안내 전문 월간지 <프로그램>의 판권을 교과서와 참고서 전문 세운문화사에서 인도해 재창간한 것이기도 했다.

“황명걸 편집장은 출근하면 잠깐 회의라고 하고는 거의 매일 관철동 한국기원으로 다시 ‘출근’하여 어둑어둑해질 때에야 들어왔다. 신경림, 강민 선생 등 문인들과의 내기 바둑에 빠져서다. 자연 편집실은 김용태 선배를 중심으로 일하게 되고, 저녁이 되어 황 편집장이 돌아오면 하루 종일 자리를 비운 것이 좀 미안했는지, 그때부터 이것저것 일을 챙긴다. 그러나 일은 무슨 일? 곧 수고들 했다며 나가서 한잔하잔다. (…) 편집회의도 마찬가지였다. 편집장이 늘 자리를 많이 비우다 보니 시간을 잡지 못해 점심시간에 식사 겸 회의를 하게 되는데, 김용태 선배의 반주 한잔 하자는 제의에 이의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 언제나 ‘한잔’은 ‘여러 잔’으로 끝났다.”

77년 11월호를 끝으로 7개월 만에 ‘미술과 생활’은 폐간됐지만 ‘낮술의 끈’으로 용태 형과 평생토록 교유한 그는 “김용태는 곧 낮술이나니, 낮술이여 부디 영원하시라!”고 예찬했다.

마당극운동을 함께 한 채희완(민족미학연구소장)은 ‘소주 한잔 뒤풀이-용태형류로’라는 축문으로 낮술의 추억을 노래했다. “오늘도 시작이다 점심나절부터/ 미술패 저리 두고 딴따라 불러내니/(…) 간밤에 가랑비가 쐬주 맥주 막걸리 되고/아침 해 빈대떡같이 떠오르는 날, 오늘이 그날이다/ 산포도 따다주던 산포도 처녀(…) 해장술 한 잔 받아 항도부산 찾아가자/ 민예총의 호랑나비야 너도 가자/ 낭만표 범나비야 너도 가자/ 자거라 깨거라, 자나깨나 ‘낮은 어둡고 밤은 길어’/ 부어라 마셔라 깰 때까지 마셔보자.”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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