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필자(성유보)는 한달 남짓 만인 5월16일 아침 군사쿠데타가 발발했다는 소식이 믿기지 않아 광화문 네거리로 나가 확인해보았다. 그날 새벽 한강대교를 건너 서울시내로 진주한 해병대와 공수특전단 소속 군인들이 중앙청 앞에 탱크를 세우고 무장한 채 경계를 서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17)
나는 1961년 4월 초, 그야말로 푸른 꿈을 가득 안고 가족들의 축복 속에 서울대 문리대에 호기롭게 입성했다. 아버지가 경산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던 때라 여유가 있었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는 고려대와 함께 60년 ‘4월 혁명’을 선도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더구나 문리대의 학풍이 ‘데카당스적 자유와 낭만’을 자랑으로 여기는 터였다.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4월 혁명’의 민주화 열기를 바탕으로 61년 봄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를 외치며 남북학생회담을 제안하는 등 새로운 통일운동의 진원지로 등장하고 있었다.
‘고3 입시지옥’을 갓 치른 나는 무언가 새로운 인생 경험을 할 수 있겠다는 흥분으로 정신없는 신입생 한달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일어나 보니 방송에서 ‘군사혁명 정부’의 발표라며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 구호에만 그친 반공체제를 강화한다…!” 어쩌고 하더니, 뒤이어 “대학가에 휴교령이 내려졌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꿈인가, 생시인가? 헷갈린 나는 광화문 앞으로 나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무장한 군인들이 도열한 가운데 탱크가 위압스럽게 버티고 있었다. “군대가 정권을 잡았다?” 천만뜻밖의 현실에 너나 할 것 없이 황당한 기분이었다. 나 역시 ‘군인 정권’은 저 옛날 왕조시대에나 있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고려시대 정중부의 난에서 비롯된 무신정권이라든가, 고려 말 군벌 중의 하나였던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내세우며 고려 왕조를 타도하고 ‘이씨 조선’을 세운 일이라든가, 역사 속의 ‘고사’로만 알았는데 우리 시대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활화산 같은 국민의 힘으로 이승만 독재를 쓰러뜨린 지 이제 겨우 1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어쨌든 박정희 소장은 그렇게 ‘무혈 쿠데타’에 성공해 권력을 차지했다. 전국의 대학문이 다시 열렸으나 서울대 문리대는, 더이상 과학과 역사와 문학을 함께 논하는 ‘칼리지 오브 리버럴 아트 앤 사이언스’의 공간이 될 수 없었다. 내가 속한 정치학과라면, 당시 우리가 목전에 부닥치고 있는 ‘군사쿠데타’를 학문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할지에 대해 알아봐야 하는데, 질문하는 학생도, 설명해주는 교수도 없었다.
오늘날 ‘대학가’로 통칭되는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 있던 문리대에는, 지금은 복개되었지만, ‘세느강’이라 불리던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도 그때 그 시절 마로니에 나무는 남아 있지만, 그 나무 밑에 모여 앉아 온갖 세상사를 둘러싼 토론과 주장을 나누던 모습은 군사쿠데타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 그래도 우리는 그 나무 밑에서 간혹 얘기를 나누었다. 다만, 그 이야기들이라는 게 ‘저돌적 연애담’이라든가, ‘만취한 술꾼들이 저지른 무용담’이었고, 그런 흰소리에 모두들 공허한 웃음을 터뜨리고는 헤어지는 식이었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금 군사쿠데타의 의미를 살펴보니,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혁명은 피지배계급의 반란인 데 반해 쿠데타는 지배권력이 자기의 권력을 더 강화하기 위해, 또는 다른 사람이 장악하고 있는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수행된다. 쿠데타는 군대, 경찰 그밖의 무장집단 등에 의해 은밀하게 계획되고 기습적으로 감행되며 정권 탈취 후에는 군사력을 배경으로 계엄령 선포, 언론 통제, 반대파 숙청, 의회의 정지, 헌법 개폐 등의 조처를 취한다. 쿠데타의 전형으로는 1799년 제1집정이 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쿠데타와 1851년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제정의 길을 연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가 있다.”
그러나 ‘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힘은 군대’라고 믿도록 길러진 군인들이 정치 전면에 나서 ‘우리의 신념만이 정의’라고 주장하고, 정치가 아니라 ‘통치’하려고 했을 때, 이들이 나라를 제대로 끌고 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그 잘못된 길을 그대로 가고 있었다. 국회 해산, 정당 해산, 기성 정치인 매도, 군 출신 공무원 친위부대 형성, 비판 언론 재갈 물리기, 언론 통폐합, 주·월간지 대량 폐간, 노조 탄압 등이 거침없이 자행되었다. 모든 탄압과 숙정은 ‘반공’이라는 이름으로 집행되었다. 온 사회가 ‘겨울공화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 ‘냉동사회’를 가장 견디기 힘들어한 집단이 바로 문리대 학생들이었다. 우리는 대부분 니힐리스트(허무주의자)가 되어 갔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 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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