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영화 <타인의 삶>(2007)
[토요판] 김세윤의 재미핥기
타인의 삶을 감시하는 게 곧 자신의 삶이 되어버린 남자가 있었다. ‘HGW XX/7’이라는 복잡한 암호가 그의 이름을 대신했다. 하루 24시간 타인의 삶을 엿보고 엿듣는, 정말 엿같은 일을 하면서도 비밀경찰 HGW XX/7은 한 번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거나 상부의 지시를 거부한 적이 없었다. 국가는 그를 믿었고 그는 국가를 믿었다. 새로운 타인들의 삶을 엿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동독 최고 극작가 드라이만, 그리고 드라이만의 애인이자 인기 여배우 크리스타를 감시하는 새 임무. 체제를 위협하는 위험인물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직접 훔쳐본 진실은 달랐다. 더 인간적일 뿐 더 위험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암송하는 브레히트의 시가 궁금해서 몰래 집에 들어가 시집을 훔쳐낸 남자. “그 푸르렀던 9월의 어느 날/ 어린 자두나무 아래서 말없이/ 그녀를, 그 조용하고 창백한 사랑을/ 나는 귀여운 꿈처럼 품에 안았었다.” 혼자 소파에 누워 ‘마리아의 추억’을 읽으며 그는 난생처음 문학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타인의 삶’을 감시하면서 서서히 ‘타인의 앎’에 감화되었다. ‘조용하고 창백한 사랑을 귀여운 꿈처럼 품에 안고’ 사는 연인들이 안쓰러웠다.
독일 영화 <타인의 삶>(2007) 후반부에서 드라이만은 통일 뒤 문서보관소를 찾아간다. 암호명 HGW XX/7이 작성한 두툼한 보고서를 받아 열람한다. 그제야 알게 된다. 자신을 몰래 지켜보고 동시에 몰래 지켜주기도 했던 사람의 존재를. 위험을 무릅쓰고 상부에 거짓 보고서를 올린 그 이름 모를 ‘타인의 삶’에 감사하며 드라이만이 책을 쓴다. 첫 장엔 이렇게 써넣었다. ‘이 책을 HGW XX/7에게 바칩니다.’
지난주 <한겨레> 토요판 르포 기사(‘자료 남긴 동독 슈타지, 중정·안기부보다 나았네’)에서 기자는 ‘옛 동독 국가보안국 문서중앙관리청’(BStU·이하 문서중앙관리청)을 방문했다. 영화에서 드라이만이 자신의 사찰 기록을 열람하기 위해 방문한 바로 그곳이다. 기사에 따르면 “9만5000명의 공식 요원과 18만명의 비공식 요원들로 구성된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는 40년간 이웃, 친구, 가족 등을 통해 동독 주민을 감시”했고, 무려 “111㎞에 이르는” 방대한 감시의 기록이 고스란히 문서중앙관리청에 보관되어 있다. “당사자 공개 원칙에 따라 2012년 중반까지 290만명의 신청이 접수됐다”고 하니, 본인 자료 찾아 열람한 독일 국민 290만명 중 한명이 바로 드라이만인 셈이다.
영화에서 드라이만이 사찰 증거를 열람할 때, 저마다 자신의 자료를 찾아 읽고 있는 또다른 사람들이 한 장면에 담긴다. 그들은 또 어떤 사연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걸까. 수많은 ‘타인의 삶’이 한자리에 모여 말없이 한 시대의 삶을 증언하는 순간. 문서중앙관리청이라는 특별한 공간이 없다면 포착하기 힘든 순간이다. 드라이만이 그 자료를 토대로 책을 쓰고, 지금은 집배원으로 살고 있는 한때의 비밀경찰이 그 책을 사서 읽으며 ‘이 책을 HGW XX/7에게 바칩니다’, 과거 자신의 암호명을 향해 과거 자신의 감시 대상이 남긴 짧은 헌사에 잠시 눈길이 머무는 라스트 신. 그 아름답고 먹먹한 장면 뒤에도 역시 ‘111㎞의 기록’과 ‘290만명의 자료 열람’이라는 구체와 사실이 버티고 있다. ‘개인의 기억’을 넘어 ‘공공의 기록’을 딛고 던진 이야기는 관객 가슴에 더 묵직한 스트라이크를 꽂아넣었다.
<타인의 삶>을 보고 한 누리꾼이 댓글을 남겼다. “우리도 이런 영화 좀 만들어 보자.” 미안하지만, 우리는 아마 이런 영화 만들기 힘들 것이다. 그 이유가 기사에 나와 있다.
“국정원 과거사 조사 때 보니 중앙정보부부터 안전기획부에 이르기까지 정치공작 기획 문서 어느 것도 보관돼 있지 않았어요. 뒷날 혹시 책임이 돌아올까 두려워서 파기한 거죠. 자료가 없으니 진실을 명확하게 규명하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슈타지는 철저히 기록을 남겼고, 사회는 그 기록을 공개하자고 합의한 것이 대조적이네요.”(안병욱)
남겨야 할 기록을 없애더니, 이젠 보관해야 할 기록을 공개하고 앉아 있는 이 나라의 이상한 정보기관을 개혁할 명분은 많다.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내세우는 소박한 명분은 이거다. 나, <타인의 삶> 정말 좋아한다. 젠장, 우리도 제발 이런 영화 좀 만들어 보자!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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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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