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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시국춤 출때 에밀레종 같은 민초들 소리 들어…민생정치도 그런 것”

등록 2012-12-30 19:47

승무예능보유자(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인 이애주 교수는 태평무에도 일가견이 있다. 일찍이 스승 한영숙으로부터 태평무를 배운 그는 새해 1월9일 세종문화회관 신년음악회에서 ‘이애주류 태평춤’을 선보인다. “태평춤을 처음 공연한 사람이 한영숙 선생님의 할아버지 한성준인데, 그 맥을 잇는 춤을 추고 싶습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승무예능보유자(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인 이애주 교수는 태평무에도 일가견이 있다. 일찍이 스승 한영숙으로부터 태평무를 배운 그는 새해 1월9일 세종문화회관 신년음악회에서 ‘이애주류 태평춤’을 선보인다. “태평춤을 처음 공연한 사람이 한영숙 선생님의 할아버지 한성준인데, 그 맥을 잇는 춤을 추고 싶습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정년퇴임하는 ‘시대의 춤꾼’ 이애주 교수

우리 시대의 춤꾼 이애주가 내년 2월 서울대 체육과 교수직을 정년퇴직한다. 만 65살. 박정희 딸의 대통령 등극만큼이나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그렇다고 쓸쓸해만 할 일은 아니다. 다섯살 때부터 춤을 췄으니 춤 인생으론 한 갑(60년)을 지났다. 법랍의 의미를 빌려 무랍(舞臘)이라 표현해도 좋을 세월의 내공이 쌓였을 터이니, 그의 춤을 보는 이들의 정신은 더욱 풍요로워질 게 아닌가. 지난 11월8일 서울대에서 있었던 고별강연에서 제자들은 스승에게 예를 드리는 ‘예의 춤’과 강남스타일 말춤까지 신나게 춘 뒤, 본질적 한류라고 할 수 있는 북춤 군무로 강연회를 신명의 한마당으로 만들었다. 13일 문화패 선후배들이 열어준 퇴임기념 학술대회에선 이애주 춤의 역사성과 예술성에 대한 진심 어린 찬사가 이어졌다. 생각해 보면 이애주라는 춤꾼이 없었다면 한국 민주화의 여정에서 우리 민족의 서사가 그처럼 극적으로 형상화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987년 6월항쟁의 한복판에서 추어진 ‘시국 춤’이야말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마땅히 있어야 할 현대사의 명장면이자 후대에게 전해야 할 값진 정신의 문화유산이 아닐까. 인터뷰는 지난 12월20일 밤 경기 과천의 이애주 춤연구소에서 있었다. 이애주 교수는 인터뷰를 마친 다음날 새벽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났다.

인터뷰/ 이인우 기자 iwlee21@hani.co.kr

-요즘 근황은?

“정년이라고 하니 오히려 더 바쁜 것 같다. 서울대 고별강연도 처음엔 민교협 차원에서 하려던 건데 총학생회와 무용부, 체육교육과 등이 후원에 나서면서 거교적 행사가 됐다. 퇴임기념 학예굿(춤 학술대회)도 잘 마쳤다.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어느새 이애주가 정년퇴임이라니, 세월이 흐르긴 흘렀나 보다, 싶은 분들께 특별히 더.”

-지난가을부터 대학로에서 인문풍류마당을 열고 계시는데?

“교분 있는 명사들을 초대해 인문적인 시각에서 우리 시대와 삶을 이야기해 보자는 취지의 강연마당(문의 02-3377-9137)이다. 1기 마당이 2월 중순까지인데 신경림 시인과 서영대 교수, 조국 교수 등이 강연할 예정이다. 3월부터는 2기 마당이 속개된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좋은 말씀을 듣고 갔으면 한다.”

-주역의 대가인 대산 김석진 옹으로부터 역을 공부했다고 들었다.

“정확히는 홍역학(洪易學)이다. 춤꾼이 웬 역이냐고 하실 분이 있는데, 전통 속에서 춤과 사상은 같은 맥이다. 우리 사상이 우리 몸짓으로 빚어진 것이 우리 춤이다.”

이애주 교수는 우리나라 근대 주역학자로서 홍역학(<주역>과 <서경> 홍범편을 바탕으로 한 동양철학)의 창시자인 야산 이달의 제자 김석진 옹으로부터 <주역>, <대학> 등 동양 고전을 두루 배웠다. 야산의 후학들이 설립한 동방문화진흥회 부회장이기도 한 이 교수는 대산으로부터 정선(井鮮)이란 호를 받기도 했다.

-여성대통령이 나왔는데 주역에선 어떻게 보는가?

“내가 뭘 알겠는가? 혹시 우리 선생님께 여쭤보면 몰라도. 선생님에 따르면 2012년 임진년은 주역 64괘 중 44번째인 천풍구(天風女后)의 해다. 괘사에 ‘여장, 물용취녀’(女壯, 勿用取女)라고 나와 있다. 뜻은 각자가 잘 새겨볼 일이다.”

-아무튼 국민의 뜻으로 뽑혔으니 성공한 대통령이 되길 바라야지요?

“매사 쉬운 일이 없겠지만, 민생 최우선론으로 당선됐으니 민생을 잘 돌본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길 바란다. 민생정치가 뭐 별것이겠는가? 백성의 소리를 잘 들어서 실천하면 되지 않겠어요?”

1987년 이한열 열사 운구행렬속
‘바람맞이 춤’ 추며 쓰러질 때
아줌마·할머니들 목소리 귓전에
지금 생각하면 그게 바로 ‘민의’

1987년 7월9일 연세대 이한열 장례식장. 이애주의 ‘바람맞이’ 춤이 펼쳐졌다. 망자의 원혼을 달래고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는 길을 닦는 의식으로 흰 광목을 찢어내는 장렬한 묘사는 이미 박종철의 한풀이굿에서 선보여 대중의 가슴을 격동시킨 바 있었다. 서울시청 앞 노제를 위해 운구행렬이 연세대 정문 앞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그 자리에 이르렀을 때, 이애주의 ‘바람맞이’ 춤이 다시 한번 펼쳐졌다. 흰 광목 한 쌈이 바다를 가르듯이 찢어지고 영매 같은 이애주가 바닥에 널브러지자, 누군가가 달려나와 쓰러진 이애주를 부여안고 서럽게 울었다. 이한열의 이름을 부르며.

“나중에 보니 한열이 누나야. 조금 있으니까 이번엔 어떤 할머니가 걸어 나오시더니 나를 일으켜 안으며, 한열이, 인자, 그만 일어나야지, 일어나서 얼른 가야지, 그래. 시장통 아줌마들의 몸뻬 차림 그대로였어. 난 그때 그런 소리를 들었어. 만약 내가 에밀레종 안에서 춤을 춘다면 에밀레 에밀레 하는 종소리가 내 귀에 들릴 거 아냐. 그런데 그때 내 귓전에 울리던 그 할머니의 목소리가 에밀레종 소리야. 지나놓고 생각해 보니 그게 민의 소리였어… 아무튼 민생정치란 그런 사람들의 소리를 가슴으로 듣는 일이겠지….”

-정년퇴임이라고 하니 그동안의 춤 인생을 돌아보게 되지 않나? 춤은 언제부터 추기 시작했나?

“다섯살 때부터이니 60년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배우지도 않은 춤을 어떻게 그렇게 추고 다녔는지.(웃음)”

-집안에 춤꾼 내력이라도?

“그건 아니고 어머니가 예술에 조예가 깊으셨다. 경기고녀를 나오셨는데, 내가 춤에 소질을 보이니까 열심히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그때 어머니 친구 중에 운현궁에 살던 왕족이 있었는데, 거기 놀러 가 김보남 선생님 같은 이왕직 아악원 출신 정통무용가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춤꾼의 출발로는 운이 좋은 편이었지.”

이애주는 창덕여중고를 나와 1965년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무용 전공 학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무용과가 설치된 대학이 없다가 이화여대에 무용과가 생겼는데, 이애주는 여대 무용과를 마다하고 서울대를 선택했다.

“어느 대학을 가야 하나 나 혼자 이리저리 알아보고 다녔는데, 서울대 체육과에서 무용 전공을 뽑는다고 해. 그래서 두말 않고 갔어. 40명 중 7명이 여자였는데 무용 전공은 나 혼자였지.”

이 선택은 나중에 그가 민중문화운동에 투신하는 계기의 하나가 되었지만, 체육과 속의 무용 전공자라는 학제의 한계가 무용가로서 세속적인 확장에는 장애가 되었다. 이애주는 학교에서보다는 국립국악원과 명동의 국립극장 등에서 당대의 춤꾼들에게 우리 춤과 가락의 기본기를 갈고닦았다. 68년에는 당시 문화공보부 주최 신인예술상에서 최우수상을 받으며 신예 무용가로 주목을 받았다. 이애주는 이 상을 계기로 당시 한국 고전무용계의 일인자였던 벽사 한영숙(1920~1989)의 부름을 받고 승무 전수자가 된다. 서울대 대학원을 마친 뒤 1971년에는 서울대 국문과에 편입해 국문학을 비롯해 미학 이론, 국악 실기 등을 좀더 깊이 공부하기도 했다.

전통속에서 춤과 사상은 같은 맥
홍역학에 국문학·미학이론 배워
지금도 대학로서 인문 풍류마당
혼의 춤 가르치는 춤대학 열고파

“한영숙 선생님이 승무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신 얼마 뒤 나한테 ‘애주야, 너 나한테 와라. 니가 첫 전수자를 해야겠다’ 그러셔. 그게 나한텐 천지개벽 같은 사건이었어. 얼마나 배우고 싶었으면, 그때 대학 전임으로 나가라는 걸 뿌리쳤으니까. 대학교수 안 하려고 일부러 서울대 국문과에 편입을 했어. 집에다가는 공부 더 한 뒤 교수 하겠다는 핑계를 댔지.”

아무튼 이 선택은 이애주의 춤 인생을 크게 바꿔놓는다. 당시 서울대 국문과 정병욱 교수 연구실에서 시인 정희성과 함께 조교로 있으면서 김지하·채희완·김석만·임진택·이상우·장선우 등 서울대 민중문화운동권과 자연스레 교분을 맺게 된 것이다. 이들을 통해 이애주는 민중문화운동이란 틀 속에서 당대의 시대정신을 흡수하고 사회의식을 호흡하게 되었던 것이다.

-무용가로서 이애주의 본격적인 출발은?

“1974년 첫 개인 발표회를 했는데 공연 제목이 ‘이애주 춤판’이었다. 자기 이름을 내건 공연은 당시로는 대단한 파격이었다. 공연 1부에서는 그동안 내가 배우고 익힌 우리 춤사위와 가락을 전부 토해냈고, 2부에서는 그 춤사위들을 가지고 무용극 ‘땅끝’을 공연했다. 남해 외딴섬에서 섬 주인을 상대로 소작인들이 벌이는 소작쟁의를 축으로 젊은이들의 투쟁과 사랑을 담은 내용이었다. 내가 춤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때 이미 다 해버린 것 같아, 생각해 보면.”

이 공연의 주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74년이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고, 시인 김지하가 사형선고를 받는 살벌한 시기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 이후 80년대 들어 이애주류의 시국춤이 본격화되었지요?

“1982년 서울대 체육교육과 전임이 된 뒤 서울대 춤패 동아리 한사위 지도교수를 맡아 83년에 첫 공연을 했다. 춤 잘 춘다는 소문이 북쪽에까지 났다고 할 정도였지. 1984년 춤패 신을 창단해 첫 공연으로 ‘나눔굿’을 올렸고 1985년 두번째 공연으로 ‘도라지꽃’을 했지.”

이애주 교수
이애주 교수
간명한 법도 안에 좋은 춤 있어
단순함 인내하고 견뎌내야 해
고구려 역동성·백제 아름다움
신라의 역사성 그렇게 이어져

-석촌호수에서 한 ‘도라지꽃’ 공연이 유명했다.

“석촌호숫가에서 오윤 등 민미협 작가들이 그린 걸개그림을 병풍처럼 치고 횃불을 밝혀놓고 공연을 했는데, 장관이었어. 도라지꽃은 봉건시대에서 근대의 여공까지 조선 여성사 전체를 다룬 서사시와도 같아. 마지막에 모두 쓰러져 죽지만 결국 ‘그날이 오면’(문승현 작곡) 노래가 울려펴지는 가운데 한 사람씩 되살아나며 새날을 여는 게 대단원이야. ‘드넓은 평화의 바다에/ 정의의 물결 넘치는 꿈…’ 지금도 그 노래 들으면 그때 공연 생각이 나고 눈물도 나. 허허.”

-이애주의 춤 하면 ‘바람맞이’를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이한열 장례식과 노제 때 춘 그 춤.

“87년 1월 춤패 신을 문닫고 몸도 아파 겨우내 끙끙 앓고 있었는데 박종철군 고문치사 소식이 들려왔다. 소름이 쫙 끼치고 무서웠다. 아, 이런 느낌, 이런 한을 나는 어떻게 내 춤에 담을까? 그때 김민기·김석만 등이 나에게 연우무대 대학로 이전 기념 공연을 해달래. 나도 막 속이 뒤틀리던 때라 흔쾌히 승낙했지. 그때 만든 게 ‘바람맞이’야.”

1987년 6월26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대중들에게 선보인 이 춤은 이애주 춤판의 한 절정을 이룬다. 티없이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작열하는 뜨거운 태양열 속에서 땅을 박차고 하늘로 솟구치는 듯한 이애주의 역동적인 몸짓은 한 사진기자의 앵글에 포착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한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장면으로 각인되었다. 공연이 끝난 뒤 수많은 학생들이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섰던 그날 전국적으로 1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독재타도를 외쳤다. 이애주의 이날 공연은 그 6월항쟁의 장중한 서곡이었던 것이다.

“연우무대 같은 실내공연에서는 나 자신도 상상 못한 그런 춤사위가 저절로 나왔다. 신들린 것 같았어. 역시 예술은 현장과 관객과 춤꾼이 삼위일체가 될 때라야 신명이 폭발하는 것 같아.”

-춤이란 그런 거군요.

“원래 좋은 춤사위는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해. 서울대에 처음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칠 때 내가 조그만 돗자리 하나 펴놓고 그 위를 왔다갔다하며 춤추는 걸 가르쳤더니, 애들이 ‘선생님,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이런 고답적인 춤을 춥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 말라고. 요 작은 공간에 압축되고 함축된 의미를 모르면 본질을 보지 못하는 거라고. 자기 존재와 역사가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를 모르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한영숙 승무 전승자이지만
이제 태평춤 소화할만한 나이
다시 정통으로 풀어보려 해
한류도 우리 혼 담아야 오래가

-좋은 춤을 추기 위해선?

“법도라는 건 배우고 나면 아주 간명한 거잖아? 그 단순함을 인내하고 견뎌내야 해. 그래야 안으로 채워지는 게 있어. 그 간명한 법도 안에 고구려의 역동성, 백제의 아름다움, 신라의 역사성과 같은 수천년의 시간과 삶이 녹아들어 있는 거지. 정통성이란 그렇게 생겨나고 이어지는 거라고 생각해. 내면을 볼 수 없으면 제대로 춤을 춘다고 할 수 없어.”

-‘바람맞이’에서 광목을 찢어 길을 내는 묘사는 본인 아이디어인가?

“무슨. 원래 우리 굿에 있어. 길 닦는 의식. 망자가 승천하는 길을 닦는 뜻이야. 진도 씻김굿에선 쫙 펼쳐서 배가 떠가는 모습을 형상화해. 거긴 바다니까. 험악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살살 할 수 없잖아? 그래서 긴 광목을 세번에 나눠 삼진삼퇴로 갈라치는 것으로 갔지. 좌절하고 절망하지만 끝내는 민중의 길을 열고야 마는.”

-옛날 문화운동 같이 하던 분들과는 거리를 두고 있는데?

“1988년 남북청년학생회담 추진 시위 때 공연을 마지막으로 운동판에서 더 이상 춤을 안 췄어. 언제부턴가 몸으로 표현하는 기본기 자체가 안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몸으로의 실천에 뭔가 불일치를 느꼈다고 해야 할까…. 민예총 만들 때도 나 혼자 반대했지. 쓴소리도 좀 하고. 그러다 난 이쯤에서 정리하렵니다, 공부 좀 더 한 뒤 다시 봅시다, 그렇게 7~8장인가 절교장 써서 보낸 뒤 발길을 끊었어. 공식적으로 그러곤 지금껏이야.”

-새로운 춤 구상은?

“새 춤보다는 우리의 원래 춤을 회복해야지. 내가 한영숙 승무 전승자이지만 일찍이 선생님한테 태평춤의 내용을 배웠는데 그동안 태평무라고 하며 추게 됐었다. 그땐 승무 전승이 하도 급해서 지나치기도 했고, 선생님이 이 춤을 함부로 추는 걸 싫어하시기도 해서 안 췄지만. 그러나 선생님 돌아가신 지 20여년이 지났고, 내 나이도 태평춤을 소화할 만한 연배가 된 듯도 하고. 선생님이 유일하게 내게 주신 것 다 밝히고 정통으로 한번 풀어보려고 해. 마침 1월9일 세종문화회관 신년음악회에 태평춤 공연이 잡혀 있어. 많은 분들이 꼭 오셔서 봐 주셨으면 감사하겠다.”

-앞으로 계획은?

“이애주가 운동권이라고 제대로 우리 춤을 안 추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승무 인간문화재야. 1996년 승무 예능보유자로 지정이 되자 사람들이 그 애주가 그 애주냐고 그랬어. 춤꾼에겐 정년이 없어. 나이들수록 더 잘 출 수 있는 게 우리 춤이야. 나는 춤을 통해 우리 문화와 역사의 맥을 제대로 전승하고 싶어. 뭘 그렇게까지 거창하냐고 하실 분 있을까 모르겠지만, 춤이 바로 역사이고 문화인데 나 같은 춤을 춰온 사람이 아니면 누가 하겠어?

그래서 말인데 춤대학을 열고 싶어. 본격적으로 체계적으로 우리 혼이 담긴 춤을 제대로 좀 가르쳐 보고 싶어. 한류도 그냥 예쁘고 재밌기만 해서야 오래가겠어? 우리 혼을 담아야지. 춤대학은 꼭 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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