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주말부부 3년째, 남편집 비밀번호가 바뀌었다

등록 2012-11-02 15:17수정 2012-11-02 21:13

[토요판] 가족
어느 주말부부 이야기
▶주말부부의 증가로 부부 10쌍 중 1쌍이 따로 살고 있다는 통계청 발표가 얼마 전 나왔습니다. 먹고살기 팍팍한 세상, 잘살기 위한 방법으로 택한 주말부부 생활이 결국 안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김미영 서울가정문제상담소 소장은 “주말부부 생활을 원활히 유지하려면 주말에 만나 그동안 미뤄놨던 일만 하느라 시간을 보내지 말고, 서로의 마음을 채우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충고합니다.

쓸쓸해도 애틋해서 좋았다
그런데 남편 핑계는 점점 늘고
만나는 횟수는 줄어들었다

남편집을 깜짝 방문하던 날
대문 비밀번호가 바뀌었다
“들어가서 기다릴게”
“집 앞 식당에서 만나자”
얼마 뒤 스르르 열린 문으로
낯선 여자가 걸어나왔다

 

두려움 반, 설렘 반이었다.

‘남편 집’으로 향하는 고속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김현희(가명·48)씨의 마음도 함께 흔들렸다. 김씨는 남편과 ‘주말부부’로 살고 있다. 공기업에 다니는 남편이 3년 전, 전라도의 한 소도시의 지사로 발령을 받은 뒤부터다. 서울에서 네댓시간이나 떨어진 곳, 아직 학업을 마치지 못한 두 아이를 생각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편더러 회사를 관두라고도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김씨 부부는 “애들을 위해서” 당분간 주말부부로 지내기로 결정했다. “착실하고 가정적인 남편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결단”이었다.

주말부부 생활은 남들 얘기만큼 나쁘지만은 않았다. “가끔 쓸쓸한 것을 빼면, 오히려 더 좋은 점이 많은 듯했다.” 매주 금요일 밤, 서울로 올라오는 남편을 마중하러 고속버스 터미널에 나갈 때면 공연히 마음이 설레었고, 일요일 저녁 남편이 돌아갈 때면 한없이 쓸쓸한 게, 연애할 때처럼 애틋한 마음이었다. 자주 못 만나니 자연스레 사소한 잔소리는 웬만해선 참게 됐다. ‘혼자 밥이나 제대로 챙겨먹었을까’ 하는 마음에 남편이 오는 날엔 반찬 하나라도 더 신경을 썼다. 남편도 “신혼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다”며 좋아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라며 주말부부 생활을 만류했던 친구들에게 으스대고 싶은 맘도 들었다. “우리 남편은 다르다”고.

물론 주말부부 생활이 쉽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번이라지만, 왕복 8시간 넘는 거리를 매주 오가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일에 시달려 파김치가 된 남편은 집에 와서도 주말 내내 잠만 자다 가는 일이 잦아졌다. 남편이 안쓰러워 김씨가 남편 집으로 갈 때도 있었지만, 수험생인 아이들은 오히려 주말에 엄마 손을 더 필요로 했다. 아주 큰 부담은 아니었지만 교통비도 만만찮았다. 그러다 보니 부부의 만남은 2주에 한번, 3주에 한번꼴로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아쉽긴 해도 큰 문제는 아니라고 여겼다. 남편은 한결같이 착실했으며 가정적이었고, 아이들도 별 탈 없이 잘 자랐으니까. ‘이상’을 감지한 건, 둘째 아이가 대학에 입학한 뒤부터다. 이제 애들도 제 앞가림할 만큼 키워놨겠다, 김씨는 남편과의 관계에 더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보, 여행삼아 이젠 내가 매주 내려갈게.” 김씨의 말에 남편은 달가워만 하는 것 같진 않았다. “고생스럽게 뭘 그러느냐”며 말렸다. 자상한 남편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출장이다” “휴일 근무다” 핑계가 잦아지다 보니 김씨가 내려오는 걸 꺼린다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번에도 남편은 “바쁘다”며 다음주를 기약한 터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김씨가 남편에게 말도 없이 ‘깜짝 방문’에 나섰던 건 불안감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남편의 집 앞, 김씨는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삑~!” 잘못된 번호를 눌렀다고 알리는 경고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비밀번호를 왜 바꿨지?’ 철렁 내려앉는 가슴을 달래며 김씨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뒤에야 전화를 받은 남편은 “회식중”이라고 했다. 그런데 남편의 목소리가 전해지는 수화기엔 회식 자리의 떠들썩한 소리가 전혀 없다. 사방이 고요하다. “집에 들어가서 기다릴 테니 비밀번호를 알려달라”고 해도 남편은 “집이 더러워서 안 된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핑계지만, 김씨는 그냥 “알았다”고만 답했다. 남편은 “곧 갈 테니 함께 저녁을 먹자”며 집 앞 식당 이름을 댔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김씨는 자리를 뜨지 않고 그냥 문 앞에 서 있었다. 10분, 20분… 몇 분이 지났을까. 아무도 없어야 할 남편의 집 문이 열렸다. 회식 자리에 있어야 할 남편이 처음 보는 여자와 함께 문을 나서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제자리에 우뚝 선 남편, 김씨는 그냥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호기심에 만난 술집 마담”이라며 남편은 싹싹 빌었다. “주변 사람들이 바람피운 얘길 예사로 하니, 더 나이 들기 전에 ‘능력’을 한번 시험해보고 싶은 기분도 있었다”고 해명했다. 남편은 “이혼만은 절대 안 된다”고 애원했다. 하루에도 여러번 맘이 바뀌었다. ‘어떻게 날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수 있을까’ 싶어 부르르 몸이 떨리다가도,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오기 싫었겠지, 직장 동료들과 술 마시다 보니 그렇게 됐을 수도 있겠지…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오락가락했다. ‘여태 성실한 남편이었고 아이들에겐 더없이 자상한 아빠가 아니었나.’ 김씨는 결국 남편을 용서하기로 했다. ‘그 여자’의 전화번호를 스팸번호로 등록하고 다시는 연락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앞으로 남편의 카드와 은행 계좌, 휴대전화 문자·통화 내역을 김씨가 모두 다 볼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그렇게 되돌아온 듯한 주말부부의 일상. 남편은 전보다 더 착실하고 가정적인 듯하다. 하지만 보이는 모습이 전부일까. 김씨는 요새도 “자주 불안하다.”

이정애 기자 hongbyul@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들어야 한다, 안타쳐도 박수를 치지 말라
[나·들] 피범벅 환자 옆엔 탈진한 연예인…
말하는 코끼리 ‘코식이’, 외로워서 한국말 배웠다
주말부부 3년째, 남편집 비밀번호가 바뀌었다
거대석상, 뒤뚱걸음으로 옮겼나 눕혀 옮겼나
캐릭터가 들어오자 연기력이 사라졌다
[화보] 내곡동 진실 밝혀질까?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김건희가 박찬욱에게, 날 주인공으로 영화 한편 어때요 했다더라” 1.

“김건희가 박찬욱에게, 날 주인공으로 영화 한편 어때요 했다더라”

25년 경호 공무원의 조언 “대통령 ‘개인’ 아닌 ‘공인’ 지키는 것” 2.

25년 경호 공무원의 조언 “대통령 ‘개인’ 아닌 ‘공인’ 지키는 것”

건강한 정신, ‘빠져나오는 능력’에 달렸다 [.txt] 3.

건강한 정신, ‘빠져나오는 능력’에 달렸다 [.txt]

영화인들 “‘내란 공범’ 유인촌의 영진위 위원 선임 철회하라” 4.

영화인들 “‘내란 공범’ 유인촌의 영진위 위원 선임 철회하라

70여년간 젊은 여성 3만명이 감금당한 이유 [.txt] 5.

70여년간 젊은 여성 3만명이 감금당한 이유 [.txt]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