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주자 K를 지지하지 않으면 네가 한 짓을 PTGF 하겠다”
[프라이버시의 종말] 개인의 삶과 과거까지 들춰내는 세상을 향한 콩트
연예인 문학평론가 스포츠스타 인권운동가에게 날아든 협박메시지 소동
연예인 문학평론가 스포츠스타 인권운동가에게 날아든 협박메시지 소동
<한겨레>는 디지털 시대에 개인정보가 무차별 노출돼 발생하는 사회현상을 깊이 있고 지속적으로 다루기 위해, 새해부터 격주로 화요일치 ‘디지털세상’면에 ‘프라이버시의 종말’이라는 꼭지를 운영할 예정입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무서운 나라인 줄 아시죠? 한 번에 가실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한 협박자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무박도전 트루먼쇼>에 비밀 캐스팅 된 걸 알고 있습니다. 정치인 K를 지지하는 발언을 해주세요. 편집 되면 안 됩니다. 무조건 나와야 됩니다. ‘국민오빠’ 소리를 듣는 당신의 입에서 정치인 K를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메시지가 방송돼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 동영상을 PTGF 할 겁니다.”
‘국민오빠’ 초고속은 어떤 미친놈의 협박메시지 이후 전개되는 동영상을 보고 졸도 하는 줄 알았다. 가수, 예능인, 엠시(MC), 배우, 탤런트 등을 거치며 초고속으로 스타자리에 오르는 동안, 문제가 될 만한 일은 단 한 번도 저지르지 않았다. 정말로 조심, 또 조심했다. 그것이 진실이든 아니든, 단 하나의 소문에 휘말려 정상에서 추락한 스타들이 하나둘인가. 과거 또한 아주 깨끗하다고 믿었다. 영화 <트루먼쇼> 수준으로 과거를 낱낱이 해부해도, 자신만큼은 문제 될 뭔가가 없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동영상을 보자 단박에 기억이 났다. 15년 전 고3 때 분명히 이런 일이 있었다. 수능시험을 본 날, 회포를 푼답시고 맥주도 몇 잔 했고 같은 반 여자애랑 키스도 했다. 사랑해서 한 게 아니라 술김에 해방감에 그냥 한 번 해봤을 뿐이다. 그걸 누가 촬영했다는 사실은 오늘에야 알았다. 초고속은 며칠 전 ‘국민여동생’ 소리를 듣는 국민적 스타와의 결혼을 발표했다. 초고속은 꿈에서라도 연예인을 희망하지 않았던 과거 한때의 동영상이 어떤 사태를 초래할지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몹시 두려웠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게 대중들의 마음이다. 어쨌든 이런 동영상은 무시무시한 사이버 세계에 올라가서는 안 된다! 초고속은 협박자의 요구사항을 검토해보기로 했다. 정치인 K가 누구지?
연예인만큼이나 유명한 원로 문학평론가. 문학평론가 생활 30년 동안 문학판에도 존재가 미미했다. 그가 연예인급 스타가 된 것은 평론 때문이 아니라 방송에서 거침없이 내뱉은 독설 때문이었다. 그의 독설은 진보도 후련하게 만들고 보수도 속 시원하게 만드는 교묘한 것이었다. 예능 프로에 진출해 ‘국민 엠시’ 소리를 듣는 스타들을 상대로 화려한 말발을 선보인 것을 계기로, 별의별 프로그램에 다 출연해서 대중들이 하고픈 말을 대신 해줬다. 그에게 전송된 동영상은, 음주강의 모습이었다. 유명하지 않던 시절, 그는 시간강사로 밥벌이를 했는데, 툭하면 술 취한 채 교수들과 문학계를 향해 욕지거리를 퍼부었고 자기가 신뢰하지 않는 문학을 옹호하는 학생들을 구타하기까지 했다. 평론가는 자기가 주인공인 동영상을 보다가 뇌까렸다. 저거 완전히 미친개구만! 그렇지 않아도 안티팬이 시나브로 늘어가고 있었다. 저 동영상까지 퍼져나간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K? 정치하는 것들 중에 이런 놈도 있었나?
골프, 수영, 피겨스케이팅 등 한국인이 세계 정상이 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종목들을 차례로 한국인이 정복했다. 마침내 테니스에서도 세계 1인자가 나왔다. 자랑스러운 동만아가 메이저대회에서 깜짝 우승을 한 것이다. 동만아는 순식간에 수영 청년과 피겨 여왕을 능가하는 국민적 스타가 됐다. 그는 전송돼온 자신의 과거를 보고 기가 막혔다. 고등학교 때 패싸움을 했다가 반성문을 쓰게 됐는데, 반성문이 아니라 분노문을 제출했던 것. 선생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었고 부모한테는 패륜아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는 개소리를 잔뜩 적었다. 대학교 때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탈락한 적도 있다. 무슨 사이트인지 기억도 안 나는데, 암튼 그때도 무슨 게시판에다가 이런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다고 마구 써 갈겼다. ‘한국이 싫다’보다 백 배는 심한 말을 열 번이나 적어놓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 사진은 또 뭔가. 군입대 전날 총각딱지 뗀답시고 들어갔던 안마 시술소에서 거의 다 벗은 여자랑 찍었던 인증샷 아닌가. 그리고 문자메시지 묶음. 그것은 동만아가 이별을 선언한 여자친구에게 하루 동안 보낸 93건의 장문메시지였는데, 거의 전부가 성희롱적 욕설이었다. 동만아는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협박자들이 첨부한 정치인 K의 관련자료를 다운받았다.
대선을 2년 앞둔 그해 초, 스스로 생각해봐도 자신이 유명하다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당장이라도 웬만한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 순위에 오를 수 있는, 그런 각계 스타들은 모두가 ‘과거’를 전송받았다. 폰으로도 오고 메일로도 오고 트위터로도 오고 페이스북으로도 오고, 올 수 있는 모든 곳으로 와서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트위터에 연재한 종교시로 무척 유명해진 어떤 종교인은, 신도들의 이름과 재산과 전화번호 등의 신상명세가 빼곡하게 적힌 장부를 다른 종교인에게 산 적이 있었는데, 그 장부와 매매계약서가 한장 한장 촬영된 사진 꾸러미를 전송받았다.
수십 년간 헌신적인 봉사로 널리 사랑받던 어느 인권운동가는 어떤 여인의 ‘유서’를 전송받았다. 여인은 그 운동가를 짝사랑했던 모양이다. 운동가의 매정함을 비난하는 글을 블로그라는 곳에 남기고 목을 매단 것이다. 협박자들은 10년 전 그 여인이 목을 매단 처참한 사진까지 함께 보내왔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다고 할 때, 먼지가 가장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정계, 재계, 법조계, 언론계 인사들은 차마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만큼 ‘과거’를 받았다. 인터넷이 상용화된 1990년대 중반 이후의 행적은 당연하고, 도대체 그런 것들을 누가 어떤 경로로 입수했는지 상상하기도 벅찬 1990년대 중반 이전의 행적도 찬란했다. 누구인들 방황하지 않았겠는가. 누군들 한번쯤 일기로든 편지로든 사이트에든 자기 속마음을 써 갈기지 않았겠는가. 누군들 한번쯤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행하지 않았겠는가. 자기가 나중에 유명해지리라고 장담할 수 없던 그 힘들던 시절에, 별생각 없이 썼던 글이고 어쩌다보니 저지르거나 겪은 일이었다. 누가 봐도 이런 죽일 놈이 가면을 쓰고 있었네, 하며 분개할 만한, 과거의 추악함이 확실한 스타들이 있었다. 그러나, 사실 유명하지만 않다면, 아무 문제 될 것 없는 사소한 과거를 전송받은 스타가 대다수였다. 이를테면 어떤 언론계 인사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선생님, 첫 키스 언제 하셨어요?”라고 물었던 장면이 찍힌 동영상을 받았는데, 그가 스타 언론인이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 동영상 속에 나오는 싸가지 없는 녀석이 바로 그 언론인이라는 걸 누가 굳이 왜 밝혀냈겠는가. 협박자들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것을 요구했다. 정치인 K에 대한 노골적인 지지 발언. 도대체 정치인 K는 누구란 말인가. 각계의 스타들은 다른 업계의 스타들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정치인이야말로 이 나라의 으뜸 버금을 다투는 안줏거리니, 스타급 정치인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아, 그 사람” 했을 테다. 그런데 대부분의 스타가 “누구지?”라고 했으니 유명하지 않은 정치인인 건 확실했다. 협박자들은 친절하게도 정치인 K에 대한 거의 모든 자료를 함께 보내왔다. K가 엄마 뱃속에 있던 시절의 사진부터, 지난해 말 국회 격투기에서 대활약하던 동영상까지, 모조리 다 보려면 3박4일은 걸릴 분량이었다. 협박자들의 친절은 끝이 없어, 바쁜 각계스타들을 위해 ‘정치인 K 핵심편집본-바쁜 사람은 이것만 보세요!’라는 50분짜리 동영상도 있었다. 대통령선거 때 당선자가 나오면 방송 3사가 며칠 동안 질리도록 보여주는 당선자 다큐멘터리 같았다. 대통령으로 당선될 것을 대비해 미리 찍어두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데 K의 55년 평생은 국회의원치고는 참으로 평범했다. 국회의원치고 어릴 때 천재 아닌 사람이 없었다는데, 초·중·고 내내 반에서 10등 정도에 턱걸이하는 수준이었고, ‘지’방의 ‘잡’스러운 ‘대’학을 다녔다. 대학 때도 초·중·고 시절처럼 안 끼는 데 없고 안 가는 데 없이 노는 데만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군대는 흔히 ‘땅개’로 불리는 육군 보병으로 박박 기었고, 대학 졸업 후에는 세계를 떠돌아다니다가 무슨 여행기 하나를 써서 조금 유명해졌다. 대안학교 교사가 돼 학생들과 잘 노는 선생 노릇을 하다가 ‘소통’과 ‘통섭’을 주장하는 에세이를 써서 아주 유명해졌다. 이쯤에서야 동영상을 보던 각계 스타들은 정치인 K가 그 에세이를 쓴 K임을 알았다. 그 유명세로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고, 아니 놀랍게도 무슨 시민단체가 평점을 매긴, 국회의원 의정활동평가 1위에도 올랐다. 다시 한번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고, 현재 국회의원 중에서도 최고의 의정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각계 인사들을 진정으로 놀라게 한 건, K의 삶이 아니었다. K 동영상을 만든 이들에 대하여 소름이 끼치도록 놀랐다. 동영상으로만 봐도 K에게 사생활이라는 것은 없었다. K가 직접 만들었을까? 그건 분명히 아닌 것 같았다. K는 곧잘 PTGF(폰, 트위터, 구글, 페이스북)를 성토했다. 소통을 위해 태어난 PTGF가 오히려 소통 불가능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영상을 보건데 K의 PTGF 다루는 수준이 누가 봐도 찌질했다. 저런 찌질한 실력으로, 이토록 완벽한, 55년 인생의 사생활 완전 분석 핵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것은 불가능해보였다.
그해 5월, 어느 방송사의 여론조사에서, 정치인 K는 차기대권주자 중 지지율 11%를 기록했다. 각계의 스타들은 툭하면 정치인 K를 입에 올렸고, 대중들도 자연스레 K를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같은 것은 꿈에도 안 꾸던 K는 협박자들에게 무시무시한 ‘과거’를 전송받았다. K는 자신의 과거를 보는 동안 간장이 오그라들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황당 여성편력사’라고 할 수 있는 후줄근한 ‘과거’였다. 곧이어 그에게 이런 협박메시지가 날아왔다.
“너, 왜 자꾸 대선 출마 안 할 거라고 개겨? 네 더러운 과거에도 불구하고, 너를 택한 것은 그나마 네가 깨끗하기 때문이야. 오죽하면 널 골랐겠니. 이번주 안으로, 대선 출마 무조건! 확실히! 할 거라고 선언해라! 안 그러면, 네 과거를 PTGF 하겠다.”
김종광/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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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광/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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