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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열외취급’ 재일동포, 일본 건축 ‘대가’로 인정받다

등록 2010-10-25 09:22수정 2010-11-09 19:22

재일 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이 지난달 초 자신이 설계하고 지은 도쿄의 하네기뮤지엄 앞에 섰다. 40년째 도쿄와 서울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건축사무소를 두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칠순이 넘은 나이를 잊은 듯 의욕에 넘쳤다.
재일 한국인 건축가 이타미 준이 지난달 초 자신이 설계하고 지은 도쿄의 하네기뮤지엄 앞에 섰다. 40년째 도쿄와 서울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건축사무소를 두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칠순이 넘은 나이를 잊은 듯 의욕에 넘쳤다.
[한겨레가 만난 사람] 최고 권위 ‘무라노 도고상’ 받은 이타미 준
일본 최고 권위의 ‘무라노 도고상’ 첫 외국인 수상자, 이타미 준. 일찍이 1970년대부터 한국과 일본은 물론 세계 건축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한국의 혼을 지닌 일본 건축가’로 명성을 쌓아온 재일동포 2세 건축가 유동룡(73)이 바로 그다.

지난 5월 일본 언론에서도 그의 무라노 도고상 수상 소식은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됐다. 어느 분야보다도 보수적이고 배타적인 일본 건축계가 마침내 스스로 금기를 깨고 ‘한국 국적 유동룡’을 ‘대가’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국내 언론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수상 소식을 뒤늦게 전해들은 것은 우연이었다. 지난 8월 말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이 모인 서울 이태원의 갤러리카페 비숍에 들렀을 때였다. 건축가이자 요리연구가인 아내와 멀티디자이너 남편이 손수 설계하고 꾸민 이색공간의 한쪽에서 그의 소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의 수상을 축하하고자 딸 유이화(ITM&A 소장)씨와 사위 박수우씨 부부가 마련한 조촐한 기념전이었다.

특이한 것은 건축가인 그의 전시회에 설계모형이나 상 받은 건물의 사진 같은 건축작품이 아니라 드로잉, 그림, 조각, 도자기 등 아기자기한 순수미술 작품들이 선보이고 있는 것이었다. 전방위 예술가로 알려진 그의 경계를 넘어선 작품세계를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그만큼 궁금증도 커졌다.

요즘 제주국제영어교육도시 프로젝트를 맡아 한국과 일본을 바삐 넘나들고 있는 그와의 인터뷰는 지난달 도쿄 사무소인 하네기뮤지엄과 서울 비숍에서 토막토막 이어졌다. 인터뷰·사진/김경애 사람팀장 ccandori@hani.co.kr

수 미술관. 이타미 준 건축사무소 제공
수 미술관. 이타미 준 건축사무소 제공

뒤늦게나마 축하한다. 일본 최고 권위라는 무라노 도고상과 그 의미가 궁금하다.


“일본 근대 건축의 아버지로 꼽히는 무라노 도고(1891~1984)를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상이다. 후보 작가의 3년치 작품을 대상으로 심사하는데, 심사위원 10명의 만장일치제여서 무척 까다롭다. 지난 3월 말 무라노기념회 대표이자 심사위원장인 이케하라 요시로의 전화를 받는 순간 ‘심장이 뛰어 말이 잘 나오지 않을 정도로’ 놀라고 기뻤다. 40여년 만에 일본에서 한국인 건축가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비일본인이 수상자가 되기는 외국인과 재일동포를 통틀어 처음이다. 하나의 경계를 허문 셈이다. 이케하라도 말했다. 일찍부터 상을 주고 싶었는데 첫 후보 추천 때부터 심사위원 한 사람이 반대했다. 일본인이 아니므로 심사 대상이 아니란 이유에서였다.”

수상작인 제주도의 두손 미술관과 수·풍·석 미술관에 대해 소개를 한다면?

“서귀포시 안덕면 상천리 일대 72만㎡ 규모의 주택단지인 핀크스 비오토피아(biotopia, 생태와 낙원의 합성어)에 지은 4개의 작품이다. 이름 그대로 두손 미술관은 기도하듯 합장한 손 모양을 딴 것이고, 수·풍·석 미술관은 각각 물과 바람과 돌을 주제로 한 작은 체험형 미술관이다. ‘창조의 정념이 디자인을 초월해 건축의 내외부에 아름답게 배어나와 있다’는 심사평을 받았다. 제주 출신 재일동포 2세인 일본 최대의 도시락체인업체 ‘혼케 가마도야’(본가 부뚜막) 김홍주 회장의 의뢰로 설계한 핀크스 골프장 클럽하우스(98년)와 게스트하우스 포도호텔(2003년)에 이은 연작들이다. 95년 고베대지진 때 많은 이재민 구호에 나서서 일본 열도를 감동시킨 김 회장이 그 무렵 전화를 걸어 ‘꼭 해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핀크스 리조트단지는 지난 8월 에스케이네트웍스가 인수해 에스케이핀크스로 바뀌었다.)

모국 제주땅에 지은 수·풍·석 미술관
‘창조의 정념 아름답게 배어있다’ 평가
비일본인 첫 수상…“동포들 희망 생길것”

그는 1997년 도쿄 국제아트포럼에서 주최국인 일본 공간 전시회의 오프닝 작가로 선정됐다. 당시 그의 개인전 ‘먹의 공간, 물의 공간’은 건축계를 발칵 뒤집을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재일동포로는 드물게 일본건축가협회 정회원이다. 2003년엔 프랑스 파리의 국립 기메 동양박물관에서 개관 104년 만에 첫 개인초청전으로 ‘이타미 준, 일본의 한국 건축가’전을 열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당시 기메미술관은 그를 ‘현대미술과 건축을 아우른 작가, 국적을 떠나 국제적인 건축세계를 지닌 건축가’로 평가했다. 2005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훈장 슈발리에도 받았다.

풍 미술관. 이타미 준 건축사무소 제공
풍 미술관. 이타미 준 건축사무소 제공

세계적인 인정에 비하면 ‘무라노 도고상’ 수상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재일 한국인 차별이 그렇게 심한가?

“2~3년 전 ‘마이니치 디자인상’ 최종심사에서도 ‘외국인, 외국어 작품이다’라는 이유로 반대론이 나와 선정되지 못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편협한 심사에 반발해 한 심사위원이 탈퇴하는 파문도 있었다. 이번 나의 수상으로 경계가 허물어졌으니 앞으로 2000여명에 이르는 후배 재일동포 건축가들에게도 희망이 생길 것으로 기대한다. 사실 내가 무사시노공대 건축학과를 졸업하던 1964년 무렵에는 경기도 나빴지만 ‘조센진’(조선인)이란 이유로 받아주는 건축사무소조차 없었다.”

후배 동포 건축가들에게 해줄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내겐 그 열외 취급이 역설적으로 힘이 됐다. 작은 동네 커피숍이나 레스토랑 같은 생활밀착형 설계부터 기꺼이 시작했다. 구석에서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 개인전 형식으로 작품을 발표하기도 하고 떠돌이처럼 혼자 유럽 건축여행을 다니며 감각을 익혔다. 그렇게 입소문이 나면서 4년 뒤에는 내 이름을 건 건축사무소를 차릴 수 있었다. ‘건축은 여행이다’라는 인식은 평생 내 작품의 자산이 됐다. 요즘 동포 2, 3세들은 적어도 자신이 한국인임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다. 자긍심과 투지를 가져야 한다.”

내친김에 한국의 젊은 건축가들에게도 한마디 해준다면?

“마찬가지다. 일본인은 베니스 비엔날레 같은 국제무대에서 건축상을 받는데 왜 한국인은 그 못지않은 재능을 지니고도 제대로 발휘를 못하는가? 요즘 제주 프로젝트팀에게도 계속 소리치고 있다. 물론 한국 건축계의 현실은 여전히 척박하다. 일본은 건축과 2년 과정이면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기는데 한국은 적어도 5년은 걸리고, 군복무로 공백도 있다. 인재는 많지만 공부에 집중할 기회가 절대 모자란다. 안타깝지만 건축인들 스스로 현실을 바꿔가야 한다.”

지난 8·15 때 <통일신보>에 실린 이우환 화백과의 대담에서도 그렇고, ‘경계인’이란 표현을 즐겨 쓰고 있던데.

“나 같은 재일동포 2세들은 한국에서는 일본인으로, 일본에서는 한국인으로 늘 경계에 서 왔다. 왜 내가 일본인이냐고? 도쿄에서 나고 자랐으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가슴속에 늘 태극기를 품고 살아왔지만, 2개의 조국 사이에서 2개의 정체성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귀화하지 않았고, 귀화할 생각도 없는 나는 한국인이다. 경남 거창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고려시대 유금필 장군의 후예인 무송유(庾)씨 34대손이란 자부심이 강했다. 7남매의 장남인 내게 늘 ‘도망을 칠 때라도 족보만큼은 꼭 지녀라. 일본에서는 이방인이지만 그 족보가 너의 뿌리를 증명해줄 것’이라고 당부했다. 나처럼 대부분의 2세들은 1세대의 고생을 지켜보며 어두운 유년시절을 보냈다. 해방 뒤 귀국하고 싶었으나 밀항선을 타야만 하는 위험 때문에 포기하신 아버지도 늘 술을 마시고 울분을 토로하곤 했다. 술중독으로 병이 난 어머니 간병하느라 가고 싶었던 도쿄대 예술대학 입시에서 2번이나 낙방하기도 했다.”

두손 미술관. 이타미 준 건축사무소 제공
두손 미술관. 이타미 준 건축사무소 제공

그런데 이름이 2개가 된 사연이 있다고 들었다.

“대학 때까지는 유동룡으로만 쓰다가 건축사무소 열면서 ‘비즈니스용 브랜드’로 이타미 준을 내걸었다. 사무소를 관청에 등록하려는데 일본어에는 내가 쓰는 ‘유’가 없었다. 한국을 오갈 때 자주 이용하는 오사카 이타미 공항에서 성을 따고 의형제 사이로 친했던 작곡가 고 길옥윤씨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빌려 지었다.”

길옥윤씨와 어떻게 특별한 인연을 맺었나?

“어릴 때 허약했던 나를 위해 부모님은 도쿄 남쪽 시즈오카현 시미즈로 이사를 했는데 후지산이 한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애초 화가가 되고 싶어 그 풍광을 자주 그려 사생대회에서 입상도 곧잘 했다. 하지만 넉넉잖은 형편에 장남에 대한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건축으로 방향을 돌려야 했다. 그 아쉬움에 대학시절에도 미술이나 음악 쪽을 자주 기웃거렸다. 특히 재즈에 빠져 지냈는데 그러다 도쿄에서 재즈악단 크루 캐츠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던 길옥윤 형을 알게 됐다. 우리 둘은 생김새도 비슷해서 당시 부인이던 패티김씨도 잘 구별을 못하겠다고 농담할 정도였다. 한국에서 내 첫 작품도 70년대 초 옥윤 형 부부가 서울 팔레스호텔에서 문을 연 디스코텍의 설계였다.”(길씨는 1950년 일본으로 밀항해 음악활동을 하다 66년 사업 실패로 귀국했고 그 무렵 가수 패티김과 결혼했다.)

조선 민화에 반해 한국 고미술 수집광 돼
자연안에 스며드는 건축물 남기는 게 꿈
“한국 국립미술관서 총정리전 열고 싶어”

1975년 그가 펴낸 <조선민화>(고단사 펴냄)는 요즘 초판 발행가의 10배가 넘는 값에 팔릴 정도로 그 자체가 희귀고전이 됐다. 그는 도쿄 건축사무소와 함께 있는 하네기뮤지엄에서 해마다 조선 미술품 소장전을 열어왔고, 2005년엔 일제 때 조선 민예 전문가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름을 딴 뮤지엄에서 한국 고미술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건축가이기에 앞서 조선 민화 수집가이자 전문가로 먼저 알려졌는데.

“처음 한국에 온 것이 1968년이었다. 내 뿌리를 알고 싶어서 무작정 돌아다녔다. 거창의 아버지 고향마을에 두번 가봤는데, 마치 이상향에 온 것 같은 신비스러우면서도 편안한 첫 느낌을 잊을 수 없다. 그 이듬해 여름 시즈오카현의 재즈카페에서 우연히 조선 민화를 봤을 때의 느낌도 나를 매료시켰다. 마치 그림이 내가 있는 공간으로 살아서 밀려오는 듯했다. 그때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전국을 돌며 고건축을 답사하고 민화를 정신없이 모으기 시작했다. 그다음엔 고가구와 벼루가 눈에 들어오더니 백자로 이어졌고 달항아리에 꽂혔다. 스스로 생각해도 ‘집념 어린 수집정신’인 것 같다. 한번은 가진 돈 다 털어 골동품을 사는 바람에 하네다공항에 내렸을 때 택시비도 없을 정도였다. 조선 백자 컬렉션은 500점이 넘어섰다. 그 가운데 달항아리 진품 50여점은 아마 일본 안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다 모은 것 같다. 지금도 진품 백자를 발견하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날 때처럼 가슴이 두근거린다.”

석 미술관. 이타미 준 건축사무소 제공
석 미술관. 이타미 준 건축사무소 제공

그는 88년 서울 방배동 자신의 아틀리에 ‘각인의 탑’을 설계하면서 국내에서도 ‘스타 건축가’로 떠올랐다. 국내 대표작으로는 ‘온양미술관’ ‘학고재 화랑’ ‘포도호텔’ 등이 있다. 2002년 경기도 성남의 ‘금토동 주택’으로 한국건축가협회 작품상, 2006년 제주도 미술관 프로젝트로 김수근문화상을 받았다. 특히 포도호텔은 제주의 오름과 전통 초가의 모양새가 잘 녹아든 건물로 나라 안팎의 관광명소가 되었다.

2004년에 써낸 자전에세이 <돌과 바람의 소리>에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처럼 ‘폐허가 되어도 가치를 지니는 건축’을 남기고 싶다고 했는데, 어떤 의미인가?

“조선 민화나 고가구, 백자 항아리처럼 튀지 않고 자연과 환경에 스며들어 빛나는 아름다움이 내 미의식의 기원이자 예술혼의 고향이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지만 자연은 무한하다. 그래서 인간 내면의 의식엔 비애와 함께 영원성의 갈망이 있다. 컴퓨터로 사유하는 현대에는 모든 게 오브제로 복제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럴수록 손으로 만드는 감각은 못 따라온다. 야성미·온기·감성 등등 건축은 새로운 세계의 창조 작업이니만큼, 자연과 대립하면서도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 또 여러 예술 장르를 잇는 중계매체이자 공간과 사람, 자신과 남을 잇는 소통과 관계의 촉매제여야 한다. 그 안에 역사와 전통과 문화가 결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 계획과 꿈이 있다면?

“진짜 개인전은 한국의 국립미술관에서 열고 싶다. 내 모든 걸 다 보여주고 싶다. 우선은 2016년 완공 예정인 제주국제영어교육도시에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어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한국인 후배들을 위해 내 설계 드로잉 200점을 따로 모아뒀는데 이를 전시할 공간도 마련하고 싶다. 10년쯤 더 일에 몰두한다 해도 시간이 너무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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