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문화 가로지르기 / 어느 여대생의 ‘루저’ 발언이 남긴 파문이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지난 9일, <한국방송> 2티브이의 <미녀들의 수다>에 출연한 그 여대생은 ‘키가 작은 남자는 루저(실패자)’라는 발언을 하였고 이 말은 곧 인터넷을 넘실거리면서 말 그대로 드넓은 ‘파문’을 남겼다. ‘루저’ 발언이 남긴 파문에는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결들이 얼핏 보인다. 그 첫째는 키가 180센티미터가 되지 않는 남성에 대해 실패자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가 하는 상식적인 이의제기다. 이 발언이 있은 후에 방송인 손석희씨나 영화배우 이준기씨가 ‘그렇다면 나도 실패자인 셈’이라며 씁쓸한 소회를 밝혔는데 사실 그들의 키는 178센티미터이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키가 162센티미터라고 밝힌 어느 남성이 한국방송을 상대로 1000만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등 실질적인 반응까지 나왔고 이에 한국방송은 해당 프로그램의 제작진을 전원 교체하기도 했다. 천성으로 태어난 키와 용모로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규정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다시금 확인한 경우가 되었다. 그런데 이 발언이 남긴 씁쓸한 물결은 비단 키 작은 남성과 관련된 편견이나 비애로 그칠 일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 사회의 일반적인 ‘수다’의 풍경은 물론이고 방송 매체가 관습적으로 흩뿌려 놓은 이미지는 여성 신체에 대한 남성적 시각의 일방적인 대량 유포였다. 이 점이 우리가 주의해야 할 둘째 파문이다. 이번 경우는 ‘미녀’에 해당하는 어느 여대생이 키 작은 남성을 ‘실패자’라고 우스갯소리를 한 셈이지만 이보다 더 많이, 더 집요하게, 더 노골적으로 이 사회의 남성은 사적인 자리에서나 공적인 방송 매체에서나 늘 여성의 신체를 대상으로 ‘수다’를 떨어 왔다. 신체의 굴곡이 훤히 드러나는 옷차림을 한 이른바 ‘걸 그룹’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온갖 방송 매체의 단골 출연진이 되고 있다. 오락 프로그램은 그렇다 치더라도 스포츠 뉴스나 날씨 보도, 심지어 정규 뉴스에서도 여성 진행자의 몫과 차림새는 같은 몫을 맡는 남성에 비하여 더 많은 꾸밈을 요구한다. 어디 그뿐인가. 영화제라도 열리면, 레드 카펫 위를 걸어가는 여배우의 차림새에 대한 공세적인 카메라와 현란한 편집 그리고 이를 해부학적으로 호들갑스럽게 전달하는 말들이 넘쳐난다. 아찔한 차림새를 한 여배우들은 사방의 카메라를 향해 앞뒤로 돌고 이런 장면은 연예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정규 뉴스에서도 생생히 흘러넘친다. 한여름의 해수욕장에서 유독 비키니 차림의 젊은 여성만 포착했던 카메라는 이번에는 여배우들의 얼굴 아래와 무릎 위를 샅샅이 훑는다. 이렇게 여성의 신체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가 매일같이 펼쳐지지만 이런 일들은 어느덧 이 사회의 ‘미풍양속’이 된 것처럼 별다른 이의제기를 받지도 못한다. 키 작은 남자를 ‘루저’라고 언급한 것은 틀림없이 경솔한 언행이지만 이번 파문의 행간에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이 사회의 공격적인 남성의 시선이 오히려 견고한 관습처럼 굳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21살의 여가수를 ‘꿀벅지’라고 태연히 부르는 사회다.
이번 발언이 남긴 마지막 파문은 ‘수다’ 그 자체에 있다. 참으로 우리는 ‘수다’스러운 사회에서 살고 있다. <미녀들의 수다>만이 수다를 떨고 있는 게 아니다. <세바퀴>, <강심장>, <놀러와>, <상상더하기>, <해피투게더> 등 얼핏 생각나는 프로그램만 해도 한둘이 아니다. 하나같이 다수 출연진에 의해 끊임없이 십자포화를 쏘아대는 말의 허튼 풍경이다. 출연자들은 카메라에 한 번이라도 더 포착되기 위한 듯 앞다퉈 사적인 체험을 폭포수처럼 쏟아낸다. 출연자들의 다급하면서도 적나라한 수다 경쟁은 이 사회의 살벌한 적자생존까지 생각나게 한다. 그리하여 다음날이면 우후죽순 늘어난 다양한 매체에서 전날 밤의 수다들을 연예 뉴스로 취급하여 신속하게 기사로 쏟아내고 이를 인터넷 포털 사이트들은 대문에 배치한다. 우리 또한 이메일 온 게 없나 하고 인터넷을 열었다가 대문에 걸려 있는 수많은 수다들을 클릭하기 시작한다. 버스에서는 등교하는 중고생들이 어젯밤의 수다들을 복제하고 지하철에서는 퇴근하는 회사원들이 낮에 인터넷으로 검색했던 수다들을 재현한다. 주고받는 말은 많지만 헛헛하기 짝이 없는 수다의 풍경이다. 조선 중기의 명의 허준이 선조의 하교를 받아 편찬한 <동의보감>은 올여름에 유네스코의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 책을 한의학자로 구성된 ‘동의과학연구소’가 철학자, 자연과학자 등과 함께 장장 10여년에 걸쳐 번역하였는데, 마침 이런 구절이 있다. “말을 적게 하여 속에 있는 기를 길러라. 걸으며 말하지 말아야 하는데, 만일 말을 하고 싶으면 잠깐 걸음을 멈추고 말을 한다. 걸으며 말을 하면 기운을 잃는다.” 지금 우리는 핏기 없는 말들의 교차사격 아래에서 헛헛한 수다를 주고받으며 기운 없이 살아가고 있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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