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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재범의 낙서…몰매…창백한 사회

등록 2009-09-18 19:32

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문화 가로지르기 /

‘정확한 수 읽기, 명쾌한 갈파, 문장의 긴박함’. 백우영 전 <한국일보> 문화부장이 한평생 바둑에 정진하며 그 미묘하면서도 장쾌한 세계를 고졸한 문장으로 써온 박치문에 대해 평가한 말이다. 해설이나 비평을 일로 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런 경지의 덕담을 듣고 싶을 것이다. 그 박치문이 얼마 전에 조남철, 조훈현, 이창호 등을 회고하면서 “이런 사람들을 지켜보며 바둑 동네의 구경꾼으로 평생을 보낸 내 인생도 그리 헛된 것은 아니었다”는 칼럼을 쓴 일이 있다. 아름다운 마음이다.

우리는 박지성과 함께 이 남루한 시대를 살아가는 행운을 안고 있다. 최근 맨체스터유나이티드와 성공적으로 재계약을 마쳤기 때문에 우리는 박지성이 올드트래포드를 누비는 풍경을 3년이나 더 볼 수 있게 되었다. 또 우리는 조용필과 한 시대를 살아가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노래방에서도 자기 노래만을 부른다는 이 거장의 노래를 부르면서 이 헛헛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보기 드문 행운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연주회에 가면, 무대 가까이 앉아 있는 올드팬들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무척이나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정경화는 왼손 검지 부상으로 4년가량 공개 무대에 오르지 못했는데 서서히 완쾌되면서 활동 재개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저 가난했던 시절의 클래식 애호가들에게 정경화는 밤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였다.

곧 음반 데뷔 40주년이 되는 정경화는 ‘거장’이라는 말이 강변의 조약돌처럼 흔해빠진 이 시대에 진정으로 거장이란 칭호를 들을 만하지만, 정경화는 이 말의 성찬을 사양하는 준열한 음악가다. 정경화는 해발 8000m 이상의 히말라야 고봉을 오르듯이 신중하고 꾸준한 음악가의 길을 걸어왔다. 이런 음악가를 알게 되고 또 정경화의 몸을 통하여 울려 퍼지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면서 40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늙어간다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반면에 ‘극단을 향해 한 걸음만 더!’ 하고 성원했던 예술가가 피치 못할 내면의 사정으로 제자리에 머물 때는 더없이 안타깝고 때로는 그가 마땅히 걸어갔으면 하는 방향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걸음을 내디딜 때는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다.

대중음악의 다양한 장르에서 제 몫을 했던 가수들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일이 잦아졌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로커들을 비롯하여 뛰어난 작곡 실력을 보여줬던 발라드 가수나 새로운 세기의 ‘안티 히어로’였던 힙합의 ‘전사’도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의 특성상 그들이 해당 프로그램에 나와서 록이나 발라드 혹은 이 세상에 대한 불만을 생생한 구어체로 피력했던 힙합 정신을 보여주기는 어렵다. 그들은 프로그램의 성격에 맞게 시종 독특한 화술로 유쾌한 시간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그것대로 즐거운 일이고 또 개개인마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나름의 소신이나 사연이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거짓과 허위의 세상을 향해 분노의 샤우팅과 격렬한 풍자를 보여줬던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기에 마냥 즐겁게 구경할 수만은 없다. 더욱이 과거 그들의 예술 속에 담겨 있던 비장한 감성들이 오늘의 헛헛한 농담 속으로 뭉개져 버리는 것은 단순한 안타까움을 넘어 짙은 연민까지 느끼게 된다. 이 거대한 미디어 구조 속에 ‘착하게’ 순응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1970년대를 대표했던 포크 가수들 중에 몇몇이 방송 진행을 하면서 매우 진부한 설교나 틀에 박힌 현실 인식을 보여줄 때, 문화적 순응이란 결코 개별 프로그램의 성격이나 개인 사정이 아니라 한 시대의 거대한 ‘구조의 힘’이라고 느끼게 된다. 어쨌든 공개적으로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착한 말’을 하거나 ‘우스갯소리’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인기 그룹 투피엠(2PM)의 리더 박재범과 관련된 일들 역시 ‘착하게 살아가야’ 하는 방송과 연예의 생리, 더 나아가 이 시대의 지배적인 정서를 집약하여 보여준다. 미국에서 태어나 17년 동안이나 현지에서 성장하다가 댄스그룹의 연습생으로 국내 활동을 하면서 자신의 일기장이나 다름없는 곳에 ‘나쁜’ 소리를 몇 마디 한 것이 결코 소속 팀 탈퇴와 미국행이라는 급속한 결말을 낳은 것은 기본적으로 이 땅의 과잉된 ‘애국주의’와 연관이 있다. 그러나 문화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인기 정상의 아이돌 스타가 알고 보니 ‘착하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는 순간 맹폭이 가해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연예인들의 여러 가지 ‘나쁜’ 언행이 돌출될 때마다 나타나는 현상이다. ‘착하게 길들여지는’ 사회만큼 핏기 없고 환멸스런 세상도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18살 때 끼적거린 낙서조차 허용하지 못하는 사회다. 아직 서른 살도 안 된, 갈 길이 먼, 첼리스트 장한나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겠다”고 ‘착한’ 말을 하는 시대다. 이렇게 해서는 온 정열을 바쳐 열렬히 지지할 만한 빛나는 감성이나 용맹정진의 예술가를 가질 수가 없게 된다. 참으로 헛헛하다.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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