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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여행은 자연의 품에 스며드는 시간

등록 2009-08-07 22:11

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윤수 문화평론가




정윤수의 문화 가로지르기 /

지난달 22일, 일식이 있었다. 그날 오전에 달이 해를, 잠깐이나마 집어삼켰다가 곧 토해냈다. 우리의 하늘 위에서는 부분일식이 진행됐지만 인도, 중국, 네팔 등 일부 아시아 지역에서는 500년 만에 가장 긴 개기일식이 펼쳐졌다. 이 대장관을 보기 위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즐거운 소동이 벌어졌음은 우리 모두가 그날의 목격자였기 때문에 확연히 기억하고 있는 사실이다.

오늘날은 모름지기 과학의 시대, 곧 저 우주천문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디엔에이(DNA)까지 천하만물을 샅샅이 밝혀낸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일식과 같은 운행을 올려다보는 그 순간에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를 거룩하게 승인하게 된다. 그것은 일식의 원리나 지구와 달과 태양의 물리적 관계를 넘어서는 어떤 존엄한 상태를 숭앙하며 바라보는 행위다.

과학은 이 행위의 아름다운 조력자다. 지구와 달과 태양 사이에 ‘힘’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으로 인하여 자전축이 유지되고 조수 간만의 거룩한 차이가 발생하며 수많은 동물들이 달의 공전 주기에 맞춰 생명을 이어간다는 사실을 과학이 밝혀주었고 이 해명이 또한 거대한 우주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미약하면서도 존엄한가를 역설해준다. 부분일식이 진행되던 그날 오전에 우리가 바라보았던 것은 해를 삼킨 달이 아니라 그것을 지극한 정성으로 올려다보는 우리의 마음이었던 셈이다.

여행이란 꼭 그와 같은 일이다. 역사의 오래전에, 인간이 미처 자연의 원리를 다 깨닫지 못하여 천하만물의 생동에 신의 섭리가 어김없이 임재하였다고 믿었던 때에, 그 무렵의 삶은 신성이 인간의 일상까지 굽어보는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신성이 말갛게 소멸되었다. 종교 생활 여부와 상관없이 오늘날의 자연 변화는 물리적인 탐사의 세계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행을 떠난다. 이맘때의 일사불란한 도시 탈출은 우리가 회색의 콘크리트 안에서만 살 수는 없는 자연의 한 존재임을 스스로 증명해내는 악착같은 행렬이다. 광막한 바다 앞에서, 담녹색의 계곡 사이에서, 험준한 산령 위에서 우리는 거룩한 신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연성의 따스한 위로를 받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여행이 아니라면 이즈막의 휴가는 물론이요 철마다 제공되는 다종다양한 여행 정보는 도심 한복판에서 거침없이 먹고 마시는 과잉 문화 소비와 다를 바 없는 일이 된다. 물론 우리는 저 18세기의 바이마르 재상처럼 훌쩍 이탈리아로 떠나 한 시대를 뒤바꾸게 될 여행서를 집필할 정도는 되지 못한다. 19세기의 영국 학자처럼 해양 측량선을 타고 생태의 기원을 탐사할 만한 위인도 되지 못하며 20세기의 어느 인류학자처럼 현대의 시공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그 나름의 문명을 일구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재간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2박 3일의 피서든 한나절의 운행이든 적어도 아이들과 함께 떠나는 여정이라고 한다면 반드시 자연성의 회복이라는 명제 하나쯤은 생각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지금 아이들을 유혹하는, 아니 그들의 조급한 부모들을 유혹하는 것은 영어 캠프나 극기 훈련 같은 프로그램이다. 며칠 동안 원어민 영어교사들과 함께 오직 영어만 사용하면서 생활하는 일, 혹은 ‘안 되면 되게 하라’라는 철지난 구호를 복창시키며 축소된 형태의 유격 훈련을 받게 하거나 땡볕의 국도를 오래 걷게 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것은 신성이나 자연성 여부를 떠나서, 인성의 황폐함은 물론 실질적인 교육 효과까지도 의심스러운 과욕이다.


더 늦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문화예술 여행을 한번쯤 떠나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지금 하고 싶은 것이다. 이 여름 다 가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책과 그 책이 가리키는 곳을 가만히 밟아보는 일 말이다. 물론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고 지리산 일대를 순례하거나 황석영의 <몰개월의 새>를 읽고 이제는 옛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포항의 몰개월 거리를 답사하는 식의 ‘문학 답사’라면 지나치게 교훈적이고 계몽적이다. 그런 교과형 여행이 아니라, 그저 가만히 자연의 품으로 스며드는 차분한 걸음걸이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경북 영덕군 창수면에서 영양으로 넘어가는 고개, 창수령은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의 한 대목으로 인하여 기억할 만한 곳이다. 소설가는 “무겁게 쌓인 눈 때문에 가지가 찢겨버린 적송, 그 처절한 아름다움을 나는 잊지 못한다”라고 썼다. 함민복의 시는 강화도 갯벌을 거룩하게 한다. 시인은 “부드러움 속엔 집들이 참 많기도 하지”라고 썼다.

그리고 또 어디인가. 이 산하 곳곳이 문학 작품으로 인하여 거룩한 자연성을 회복하지 않은 곳이 달리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니 이 여름, 더 늦기 전에, 아이 손 맞잡고 차분하게 걸어볼 이유가 있다. 설악산을 넘으며 시인 고형렬은 썼다. “나는 캄캄한 밤하늘로 올라가 돌아오지 않는 빛의 영혼들을 본다.” 그런 여행이 필요하다. 그 여정을 밤하늘의 달이 어김없이 밝혀줄 것이다. 비록 몇 십년 만의 일식은 아닐지라도….

정윤수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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