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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이병훈 “내 드라마는 퓨전 아닌 현대적 사극”

등록 2008-06-09 21:12수정 2008-09-11 16:30

이병훈 피디
이병훈 피디
[한겨레가 만난 사람] 드라마 ‘이산’ 종영 앞둔 이병훈 피디
‘사극의 달인’ 이병훈(64) 피디는 현대극같은 사극을 만드는, 20대 감수성을 아우르는 60대다. 시청률 50%를 넘겨 ‘국민 드라마’ 반열에 올랐던 사극 <허준>과 <대장금>에 이어 오는 17일 종영하는 77부작 <이산>으로 다시 시청률 1~2위를 다퉜다.

그가 2000년대 들어 만든 작품들은 전통 사극 형식이면서도 현대적 가치관을 지닌 전문직 인물이 주인공이었다. 주인공들이 속한 직업 세계는 말투만 고풍스러울 뿐 현대 사회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현대의 느낌과 과거의 공간을 매끈하게 이어붙이는 방식은 <이산>에도 이어졌다. 하지만 <이산>에는 <대장금> <허준>과 다른점이 있다. 이 피디가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 이후 20년 만에 ‘왕 이야기’로 돌아온 작품이다.

지난 1일 이 피디를 만나 작품 세계와 <이산>에 대해 들어봤다. “<이산> 빨리 끝내고 잠 푹 잘 생각밖에 없다”면서도 그는 2시간 동안 침을 튀기며 이야기를 풀어놨다.

-1년 동안 밤샘을 밥 먹듯하는 체력이 놀랍다.

“20년 동안 홍삼을 먹고 있고, 아침에 맨손체조를 한 시간 한다. <대장금> 때 어깨뼈가 부러졌고, <이산> 때도 이마를 12바늘 꿰맸다. 시연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집사람이 이제 연출 그만하라고 한다. 다음 작품이 마지막이 될 거 같은데, 왕 이야기는 다시 안할 거다. <대장금> <허준>은 기록이 없어 시청자 항의가 없었는데 <이산>은 역사적 사실과 틀리면 아예 실록을 팍팍 퍼서 게시판에 붙여놓더라.” 그는 게시판에서 <이산>을 자주 비판한 누리꾼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작품을 관통하는 비슷한 분위기가 있다.

“<허준>을 만들기 전에 사극 한다니까 대학생 딸이 싫어했다. 젊은 애들이 좋아할 만한 사극을 만들자고 생각했다. 스토리를 빨리 진행하고 대사도 ‘전~하’가 아니라 ‘전하’로 샥샥 빨리했다. 사극으로는 처음으로 <허준>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 옷에 40여가지 색깔을 입혔고 화면도 화사하게 갔다. 음악도 클래식이 아니라 뉴에이지로 바꿨다.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통쾌한 장면을 꼭 넣었다. 통쾌한 걸 일찍 터뜨리면 통쾌하지 않고 너무 늦게 터뜨리면 시청자가 약이 올라서 ‘니들끼리 해먹어라’ 그런다. 화내기 직전에 터뜨려야지.”


책 보며 고증 지키려 노력
화려한 화면·빠른 전개로
젊은 시청자들 끌어들여

-왜 왕 이야기인 <이산>으로 갔나?

“전문직을 찾다 찾다 못 찾았다. 원래 김홍도 이야기를 하려고 책 15권을 읽었는데 자신이 없었다. 작가가 ‘사람들은 돈, 병, 음식에는 관심 있는데 가장 재미없어 하는 얘기가 예술하는 거’라고 하더라. 그래서 예전 ‘조선왕조 500년’을 하면서 제대로 못다뤄 아쉬웠던 정조와 홍국영 이야기로 갔다. 정조는 평생 암살 위기에 시달리면서도 큰 업적을 이뤘다. 또 군주로서 이 시대에 필요한 특징을 보여준다. 정치적으로 최고의 포용론자였고 자유로운 무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람이다. 애초 해보려던 그림 이야기는 시청자들이 좋아할지 자신이 없어서 테스트를 해보자고 <이산>에서 송연이가 일하는 곳을 도화서로 만들었다.”

-이산과 송연, 대수의 관계가 독특하게 현대적이다.

“‘조선왕조 500년’에서 8년 정치권력 이야기를 해서 그런 이야기는 지겨웠다. 권력 투쟁 이야기를 희석시키려고 인간 이산을 그리기로 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친구들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느낌이 어긋날 때도 있다. 송연은 꼭 전하라고 해야 하니까. 하지만 이산은 송연을 절대로 의빈이라고 안 부르고 죽을 때까지 송연이라고 이름을 부르게 했다. 주인공 이서진한테 송연과 대수를 만나는 장면은 다른 느낌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물들이 한복만 둘렀지 현대적인 가치관을 대변한다.

“1930년대 나온 채만식의 <탁류>라는 소설에서 초봉이라는 여자 주인공은 인고의 화신이다. 그 당시에는 미덕의 인물이지만 초봉이를 지금 드라마 주인공으로 삼으면 시청자들이 답답하다고 욕을 바가지로 할 거다. ‘죽으라면 죽겠어요’라고 여자 주인공이 나오면 요즘 시청자들은 ‘그렇게 살려면 차라리 죽어라’ 그럴 거다.”

-성공 스토리라고 다 성공하지는 않을 텐데…. 비결은?

“내 드라마의 특징은 ‘롤 플레잉 게임’ 같은 점이다. 끊임없이 장애를 넘어서 최고가 된다. <대장금>이 외국에서도 인기를 끈 이유는 현대적인 느낌과 누구나 관심을 갖을 법한 요리라는 소재 때문인 듯하다. 그리스 비극부터 할리우드 영화까지 모든 이야기에 통용되는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를 정상적으로 구현해 낸 점도 한몫했다. 전체 줄거리로 큰 기승전결이 흘러가고 매회 작은 기승전결이 끊임없이 맞물려야 한다.”

-<이산>은 주인공이 왕위에 오른 뒤에 갈피를 잃은 듯했다.

“드라마에서 성공한 이후의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임금이 되니까 긴장감이 떨어졌다. 사실 내가 역사를 왜곡한 부분이 있다. (이산과 권력투쟁하는) 정순왕후가 군대 끌고 도성으로 들어온 것으로 그렸는데 그런 적이 없다. 위기감을 높이려고 그렇게 한 건데 무척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이산의 치적을 제대로 못보여준 점도 아쉽다.”

-촐싹 맞게 그려진 정약용 캐릭터도 왜곡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산’의 주인공 이서진, 한지민
‘이산’의 주인공 이서진, 한지민
전문직 찾다 찾다 못찾아
20년 만에 ‘왕 이야기’
다음 작품이 마지막 될 것

“그건 절대 아니다. 정약용을 훌륭한 학자로만 그려봐라. 아무도 관심 없을 거다. 정약용이 실제로 장난꾸러기였는지 근엄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명백히 기록된 사실을 바꾸면 왜곡이지만 미지수로 남아있는 부분은 작가 창작의 영역이다.”

-예전에 자신의 사극 속 3대 요소로 액션, 미스테리, 러브 스토리를 꼽은 적이 있다.

“액션은 골치 아프고 힘 들어서 주로 하진 못하고, 미스터리를 무척 좋아해서 그런 요소를 넣는 시도는 한다. 이산이 아버지에게 받은 그림의 비밀을 푸는 부분은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소설의 구성이나 캐릭터를 많이 가져온다.”

-항상 주인공은 바른 말만 한다. 좀 단순하고 뻔한 인물인데도 지겹지는 않지만.

“결코 선을 포기하지 않은 인물이어야만 끝까지 사랑 받는다. 캐릭터는 스토리로 극복한다. 그런데 이런 술수를 시청자들이 이미 다 알아버렸다. ”

-사극관 또는 사극의 매력은?

“이제 (나한테) 사극밖에 안 맡긴다(웃음). 현대물은 심리 묘사를 굉장히 섬세하고 새롭게 해야 한다. 사극에서는 평범한 러브 스토리도 시청자들이 용서해준다. 모르는 상상의 세계니까. 내 드라마는 퓨전 사극이 아니다. 퓨전 사극은 고증을 무시하지만 나는 지키려고 한다. 정조에 대한 책 20권을 봤다. <허준> 때 사극에서 처음으로 의녀를 그리려고 의녀에 대한 논문을 다 훑었다. 그러다가 대장금에 대한 기록도 본 것이다. 내 드라마로 온가족이 함께 역사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길 바란다.”

-30년 동안 사극을 연출했다. 바뀐 건 뭔가?

“고액 출연료. 한류 붐이 불면서 <대장금>을 할 때보다 스타들의 몸값이 6배 이상 뛰었다. 그러면 다른 인물들의 수를 줄이고 스토리가 아니라 스타에 의존하게 돼 작품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산>으로 김종학 프로덕션은 15억원 적자를 봤다. 작품의 질이 떨어지면 그만큼 한류도 단축된다.”

■ 이병훈 피디는 허준·대장금 등 만든 ‘사극의 달인’

20대라도 체력이나 정서에서 60대인 이병훈 피디와 큰 세대 차이를 느끼기 어려울 듯하다. 보통 대작 사극은 밤샘 촬영을 밥먹듯이 하고 촬영지도 냉난방이 안 되는 오지가 많아 보조 연출자와 함께 찍는다. 그런데 이 피디는 “남이 찍는 걸 잘 못믿는 성격 탓”에 <이산> 직전 작품인 <서동요>까지 혼자 찍었다. 그러고도 밤샘 뒤 촬영장에서 가장 팔팔한 인물로 뽑혔다.

그는 사극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사극만 하지는 않았다. 1974년 문화방송 드라마 <113 수사본부>로 데뷔해 <수사반장> <제3교실> 등 현대극도 연출했다. <암행어사>(1981)가 인기를 끈 게 계기가 돼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를 8년 동안 연출했다. 이후 90년대를 드라마국 부국장·국장으로 보내고 1997년 현장으로 복귀해 일일극 <세번째 남자>를 만들었는데, 시청률에서는 큰 재미를 못봤다.

‘젊은 사극’을 내건 <허준>(1999)은 당시에 파격적이었다. 배경도 색다르게 왕실 밖으로 나왔고 주인공은 전문직에 종사했다. <허준>은 시청률이 64%까지 치고 올라갔다. 이어 만든 대상인 임상옥의 이야기 <상도>는 <여인천하>에 맞서는 바람에 시청률이 20%대에 그쳐 이 피디가 “가장 아쉬운 작품”으로 꼽는다. 이영애가 주연한 <대장금>은 50%를 넘기고 60여 나라에 수출돼 그의 대표작이자 한류의 대명사가 됐다. 김소민 기자

글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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