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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코뮤니즘 ‘발견’하고 현실화를 ‘발명’하라

등록 2008-02-22 19:14

1968년 5월 파리 바스티유 광장에 모인 학생 시위대. 프랑스 좌파는 ‘68혁명’을 계기로 ‘탈중앙·탈집중화’ 의제에 눈을 떴다. 조정환 강사는 이 운동이 학생이나 여성·동성애자 등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인 움직임에 의해 전개되어 나갔다는 점에서 정치적 태도의 다양성과 분화를 특징으로 하는 현 시기 대안체제 운동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1968년 5월 파리 바스티유 광장에 모인 학생 시위대. 프랑스 좌파는 ‘68혁명’을 계기로 ‘탈중앙·탈집중화’ 의제에 눈을 떴다. 조정환 강사는 이 운동이 학생이나 여성·동성애자 등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인 움직임에 의해 전개되어 나갔다는 점에서 정치적 태도의 다양성과 분화를 특징으로 하는 현 시기 대안체제 운동의 모델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보였다. 〈한겨레〉 자료사진
‘코뮨주의’ 대안 맞나
우리시대 지식논쟁 /

③ 이미 실재한다

지난 두 주 고병권 연구공간 ‘수유+너머’ 대표와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코뮨주의’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두 가지 쟁점이 두드러졌다. 고 대표는 자격과 소속, 기반에 근거한 운동이 더는 의미를 갖기 힘들다고 봤다. 상이한 존재들의 공통운동과 같은 대안적 삶을 위한 실험과 그것의 소통만이 대안체제를 열 수 있다는 것이다. 심 교수는 이에 대해 “동질성 대 이질성, 공공성 대 공통성이라는 이분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관념적 도식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고 대표는 또 국가 개입은 삶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독점만 낳을 것이라며 탈국가적 태도를 분명히 했다. 반면 심 교수는 국가를 벗어나는 것과 극복하는 것은 다르다며 사회적 공공성 강화와 아래로부터의 자율적·자립적 동력 구성이 선순환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조정환 강사는 지구화하는 신자유주의가 아이러니하게도 ‘코뮤니즘’을 다시 불러내고 있다면서 새로운 삶, 새로운 정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대안적 요구에 붙일 이름으로 코뮤니즘보다 더 적실한 것이 아직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오늘날 가능한 코뮤니즘은 자본 관계 속에서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공통된 것’의 잠재태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할 조건을 창출하는 발명적 노력들 자체”라고 했다. 이런 노력들 속에서 발전된 코뮤니즘의 개념으로 그는 다중, 비물질노동,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등을 들었다. 다음주에는 이 주제의 마지막 논자인 정성진 경상대 교수가 의견을 밝힌다.

강성만 기자 sungman@hani.co.kr


신자유주의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삶의 곳곳에 깊숙이 도입되었고 이명박 후임정부에서 더욱 심화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자신이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정치적 집중점이라고 주장해 왔다. 최근 민주노동당의 선거 패배와 혁신, 탈당, 분당, 창당 급물살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민족주의적, 사회민주주의적 대응, 곧 복고적 대응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적 가치와 생태주의적 가치의 정치적 혼합 혹은 정치의 사회주의적 급진화 등의 주장이 새로운 대안처럼 제기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적 제국은 이러한 정치들에 대한 면역력과 포섭력을 이미 충분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치적 균열과 다종적 분기의 이 현상들이 새로운 삶, 새로운 정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대안적 요구가 실재함을 보여주는 징후들임은 분명하다. 그 요구가 무엇인가? 그것은 신자유주의 및 신보수주의 우파는 물론이고 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좌파들 모두가 한사코 억제하거나 회피하고자 하는 것인바, 그것에 붙일 이름으로는 코뮤니즘(communism)보다 더 적실한 것이 아직은 없다. 이것은 정확히 160년 전 마르크스가 불러내었으나 20세기의 각종 동구적·서구적·제3세계적 사회주의들이 먼 미래로 추방하거나 복지국가, 관료국가의 울타리 속에 가두는 데 성공했던 바로 그 괴물의 이름이다. 코뮤니즘을 추방하고 가두었던 저 역사적 울타리들을 파내면서 지금 코뮤니즘을 다시 불러내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구화하는 신자유주의다.

코뮤니즘은 우리가 미래에서 현재 속으로 도입해야 할 어떤 이상적 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본관계 속에서 발전하고 성장하는 사람들 사이의 (그리고 자연-인간-기계 사이의) 협력관계로, 나아가 착취관계의 틀을 부수려는 공통되기의 운동으로 이미 실재한다. 자본은 사회 속에 협력관계를 도입하고 촉진함으로써만 축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의 착취는 인간들 사이의 협력과 자연-인간-기계 사이의 협력에 대한 착취이기 때문이다. 착취가 노동시간에 대한 착취로 나타나는 순간에조차 그것은 ‘사회적인’ 노동시간, 곧 협력의 시간을 착취한다. 따라서 자본의 성장과 발전은 동시에 이 협력관계의 성장과 발전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다.

코뮤니즘이라는 사람들간의 협력관계
착취의 틀을 부수려는 공통되기는
자본 등 세계화 속에서 이미 성장·발전
그 잠재된 실재의 발견이 최우선

마르크스는 착취관계의 발전을 규명하면서도 그 이면에서 발전하는 협력관계를 밝힐 개념들을 발명했다. 생산 확대에 따른 욕망의 사회문화적 확대, 노동의 사회화, 일반지성의 형성 등이 그것이다. 아니 ‘추상노동’부터가 사회적 협력을 지시하는 개념이다.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비물질화와 혼종(뒤섞임)을 통한 노동의 공통되기, 금융화를 통한 자본의 공통되기, 네트워크적 제국화를 통한 주권의 공통되기가 전개되고 있다. 물론 이 공통되기는 적대적으로 발전한다. 점점 공통화하는 삶에 대한 공통적 식민화가, 다시 말해 공통된 것의 지구화에 대한 공통적 착취의 지구화가 진행된다. 주식회사가 자본의 사회주의였듯이 초국적 금융자본과 제국은 자본의 코뮤니즘의 형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반혁명적 코뮤니즘이다. 우리는 자본의 코뮤니즘이라는 거울상을 통해 삶의 코뮤니즘의 실재성과 그 성숙을 엿볼 수 있다. 코뮤니즘은 발명되기에 앞서 우선 먼저 발견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정치가 이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적 사회주의 운동들은 당대의 협력관계와 공통된 것을 발견했지만 그것을 자본주의적 추상 내부에서 주체화하고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관리하려 했다. 오늘날 사회주의 정치는 코뮤니즘의 실재성을 부정함으로써 코뮤니즘의 현실화를 봉쇄하는 자본주의적 위기관리 방책으로 기능한다.

따라서 문제는 코뮤니즘이다. 코뮤니즘이 현실화하고 활성화해야 할 ‘공통된 것(the common)’은 자본관계 속에서 발전해온 산물이라는 점에서 전자본주의적 공유지(commons)들과는 다르며 전자본주의의 지역적 소공동체들인 코뮌(commune)들과도 다르다. 파리 코뮌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전국적 정치공동체들도 오늘날의 ‘공통된 것’을 표현하기에는 충분치 않다. 모든 공동체들은 외부와의 관계 속에서 그 동력을 획득하지만 오늘날 공통된 것은 그 어떤 외부도 존재하지 않는 삶의 내재적 공통화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가능한 코뮤니즘은 자본관계 속에서 적대적으로 발전하는 ‘공통된 것’의 잠재태를 발견하면서 그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전화할 조건을 창출하는 발명적 노력들 자체이다. 특이적 공통으로서의 다중, 비물질노동, 네트워크들의 네트워크 등은 이러한 노력 속에서 발전된 코뮤니즘의 개념들이다.

‘소공동체들의 소통 중시한 코뮨주의’와
‘국가를 정점에 둔 다층적 코뮌주의’는
새로운 발명 아닌 실험·관리에 그쳐
실질적 창조로서 기능할 코뮤니즘 필요

고병권과 심광현은 기존의 자본주의 정치들과는 다른 새로운 정치를 발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필자와 공통적이다. 고병권이 코뮤니즘을 “다양한 존재들의 자유로운 협력과 소통을 발명하려는 이론적·실천적 노력”으로 정의할 때 그것은 나의 코뮤니즘 개념의 뒷부분과 일치한다. 하지만 그에게서 코뮤니즘적 발명은 잠재적 코뮤니즘의 발견에 정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소속, 자격, 근거 등의 동일성들을 버리는 과정에서 바로 그것들 속에서 잠재하는 코뮤니즘의 실재성까지 버려 버린다. 그래서 코뮤니즘의 발명은 발견된 실재 위에서의 그것의 발명적 현실화로서보다는 의지적 실험으로 축소된다. 그 실험의 정치는 지금 소공동체로서의 코뮨들을 도입하고 촉발하고 연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는 ‘코뮨-주의’로 발전되고 있다.

심광현은 이것의 위험성을 ‘고립된 공동체주의’라는 말로 표현해 낸다. 이 위험을 벗어날 심광현의 ‘코뮌주의’적 묘수는 무엇일까? 그것은 실험적 코뮌들의 발명의 층위 위에 비국가적 공공성의 발명이라는 층위을 얹는 것이다. 이 두 발명의 층위들은 국가를 민주화할 층위들인데 국가는 이들의 상층에 놓인다. 그런데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이 삼층의 선순환 구조야말로 지금까지 자본이 협력을 흡혈하고자 사용한 바로 그 구조가 아닌가? 그리하여 심광현은 다중의 전 지구적 공통되기를 코뮌적 발명들로 환원한 후 그 위에 몇 겹의 중층적 구조물을 얹어 그것을 관리하는 정치를 ‘코뮌주의’적 정치라고 한다. 다중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은 고병권의 실험적 위험보다 더 큰 구조적 위험을 삶에 도입하는 것이다. 역사적 경험은 이 변형된 사회주의가 ‘호혜적 협동 속에서 대중 스스로 수행하는 문화적 실험’들의 성과까지 체계적으로 금력(金力)으로 전화시킬 연금술적 장치로 기능할 것임을 앞서 보여준다.


조정환 강사
조정환 강사
이 위험들로부터 우리는, 코뮤니즘적 발명들이 실험이나 관리를 넘는 실질적 창조로서 기능하려면 발견되는 코뮤니즘의 발명적 현실화여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조정환/다중지성의 정원 상임강사


조정환 강사는 1956년에 태어났으며,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이탈리아 자율주의 운동 등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탈근대적 사회운동 연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제국기계 비판〉(갈무리, 2005) 〈아우또노미아〉(갈무리, 2003) 등의 저서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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