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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EU ‘민족 넘어 공존’ 가르친다

등록 2006-09-14 17:20수정 2006-09-15 18:28

2004년 3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대학생들이 유럽연합과 국경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있다. 유럽연합은 탈민족 다문화주의와 다문화교육을 EU의 존속을 위한 기본 과제이자 원칙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유럽연합을 위한 새로운 정체성 확립의 토대다. <한겨레> 자료사진
2004년 3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폴란드 대학생들이 유럽연합과 국경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있다. 유럽연합은 탈민족 다문화주의와 다문화교육을 EU의 존속을 위한 기본 과제이자 원칙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유럽연합을 위한 새로운 정체성 확립의 토대다. <한겨레> 자료사진
동질성 형성 국제질서 새판짜기 준비 국제이해교육, 평화교육, 다문화교육에 심혈
힘의 논리와 폭력 앞세운 영웅사관 밀어내고 공유 가능하고 비폭력 중심 새 가치관 이식

안과 밖

현 세계질서에서 미국의 패권주의에 제동을 걸만한 세력은 중국과 러시아, 유럽연합(EU) 정도일 것이다. 이중에서 EU는 걸프전쟁, 또 이라크 침공 때 미국에 나름대로 제동을 걸어보려고 했다. 당시는 유럽연합 회원국 15개국 중 13개국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집권한 시기였다. 오늘날엔 상황이 다소 바뀌었다. 회원국 대부분이 우파 정권을 선택했고,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도입을 모색하고 있으며, 더구나 영국과 새로 회원이 된 동유럽 국가들은 미국을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겉으로 보면 EU 국가들은 미국의 세계질서 주도에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EU 회원국들, 적어도 서유럽 15개국들은 자국 문화를 보호하려는 문화다양성 정책, 유전자조작 미국 농산물 수입 반대, 영어의존 탈피 언어정책 등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면 EU 회원국들은 자국민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즉 학교교육을 통해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면서 국제질서의 새로운 판짜기를 준비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정체성 확보에 실패한다면 유럽연합이 이상적인 시스템을 설정했다 하더라도 운영에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EU는 새로운 가치관과 동질성을 지닌 국민을 형성하기 위해 청소년들에게 국제이해교육, 평화교육, 다문화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사실 이 3원칙은 한 우물에서 나온 샘물이기도 하다.

국제이해 교육이란 한마디로 탈민족주의 교육이다. 유럽연합 국가들의 초등학교 교과과정에 나오는 위인들의 이야기를 보자. 과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에 유럽 각국은 민족 고유의 영웅들을 만들어 교과서에서 그들의 위대성을 열심히 가르쳤다. 프랑스는 잔다르크· 나폴레옹·드골을, 영국은 넬슨·처칠·세실 로즈를, 독일은 프리드리히 대왕·비스마르크를 각기 대표적인 간판스타로 내세웠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군국주의 성향이 아주 강한 스페인은 콜럼버스·코르테스·피사로·펠리페 2세·프랑코에 대해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교과서에 드골·나폴레옹 없어


하지만 새 EU 교과서에는 이런 위인들의 그림자들은 찾아볼 수 없다. 자국 영토를 넓히기 위해 타국을 침략한 사람, 식민지 영토를 넓힌 정치가와 군인들 등 힘의 논리를 관철한 인물들은 모두 사라졌다. 대신 유럽 전체를 상징하는 인물, 갈등과 분쟁에서 협상을 이끌어내고 평화를 추구한 인물, 유럽문화를 발전시킨 인물들이 대두했다. 르네상스 시기 유럽 지성을 대표했던 에라스무스, 예술을 대표한 레오나르도 다빈치, 유럽사상의 기초를 놓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EU 태동의 산파역을 맡았던 장 모네와 콘라트 아데나워, 20세기의 지성인 귄터 그라스, 전 세계인이 좋아하는 음악가들인 모차르트와 푸치니, 도밍고, 여기에다 뉴턴, 다윈, 퀴리 부인과 같은 과학자들, 68혁명의 주역이자 환경주의자인 다니엘 콘벤디트, 영화계를 대표한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아자니, 축구의 달인 지네딘 지단 같은 사람들이 유럽연합 시대의 중요한 인물들로 떠올랐다. 회원국들이 자기들만의 위인들을 타 회원국들에게 강요하기보다 서로 공유할 수 있는 인물들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위인들의 변화는 사실상 가치관의 변화를 말하며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다.

국제이해 교육은 그 목적을 국제경쟁사회에서 이기기 위해 다양한 능력을 갖춘 인물을 양성한다는 차원보다 국제관계가 긴밀한 상황에서는 상호이해와 상호협조를 위한 국제시민의 양성이 더 중요하다는 차원으로 옮기고 있다. 이러한 목표는 구체적으로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을 통해서도 이미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마드리드 대학의 알폰소는 에라스무스 장학금을 받아 다음 학기에는 로마 대학에서 학점을 이수하고 이탈리아어 실력을 업그레이드하면서 친구들을 사귈 수 있을 것이다. 리용 대학의 앙리는 베를린으로 옮겨 EU 각국에서 온 친구들과 기숙사 식당에서 식사하고 맥주를 마시면서 EU의 앞날을 토론할 것이다. 에라스무스 프로그램은 기득권 계층의 자녀들만이 자유롭게 외국으로 유학을 나가는 것과는 거리가 먼 교육정책이다. EU의 미래를 책임질 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는 것은 현재 EU 지도자들의 의무이기 때문에 막대한 예산을 투자하면서 학생들의 교환과 교류를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국내 인문사회과학에서 가장 시급하면서도 가장 취약한 분야가 아마도 국제이해 분야일 것이다. 국제화를 그렇게 외쳤지만 현재의 성과는 부정적임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럽연합은 초중등학교에서 평화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어떠한 원칙에서 무엇을 진행하고 있는가? 유럽연합 주도로 지난 10여 동안 국제사회에서 평화교육에 대한 선언들이 있었다. 1995년 세계 각국의 교육부 장관들은 유네스코 총회에서 ‘평화, 인권 민주주의 교육에 대한 선언’을 발표했다. 핵심은 교육을 통해 비폭력에 의한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할 능력을 지닌 인물들을 개발하자는 것이었는데, 구체적으로 학생들이 지니고 있는 평화에 대한 내적 열망을 자극하여 이들이 톨레랑스, 공감, 약자에 대한 배려와 같은 가치를 지닌 인물들로 키워야 한다는 권고였다. 국제사회는 또 1999년 헤이그 만국평화회담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헤이그 호소>(Hague appeal)를 발표했다. 그 안에는 평화와 관련된 50개의 의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세계 각국이 평화교육을 의무적으로 교과과정에 포함시키고 세계평화 네트워크를 구성하자는 것이었다.

국방비 삭감해 교육예산 확대

EU 회원국들이 교과서와 특별활동의 평화교육을 통해 전달하려는 핵심내용은,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정의로운 비폭력사회가 인류에게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해야만 민주주의, 협상을 통한 갈등해결, 희망적인 미래사회, 지속 가능한 발전, 국제연대를 이루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의 연장선에서 EU 회원국들은 결국 국방비를 삭감하여 교육비와 사회공공부문 예산을 확대하고, 의무병역제를 폐지하며, 군사 병력을 감소하는 실질적인 성과들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다문화주의 교육은 자유로운 역내 이동으로, 그리스 노동자가 스웨덴까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진출하게 되면서, 또 외국인 노동자들이 EU 내로 대거 유입되면서 채택된 교육이다. 이질적인 문화와 종교, 관습을 가진 이웃과 함께 살기 위해서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는 것이 다문화주의다. 프랑스만 봐도 과거 지중해권 유럽 국가들로부터 이민이 시작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북아프리카로부터, 1990년부터는 동유럽으로부터 이주민들이 밀려 들어왔다. 이로 인한 다민족 사회와 복합인종, 이질문화 문제들이 대두되었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터키 노동자들의 유입과 통합 후의 동독 주민들, 최근의 동유럽 국가들로부터 이민들이 밀려오면서 초등학교 1반에 10여 개국 출신의 아동들이 모여 있는 것은 흔한 일이 되고 말았다. 당연히 여기에는 소수집단과 다수집단이 존재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이질적인 이주민들을 자국의 문화로 통합할 것인가, 아니면 다문화가 공존하는 사회를 수용할 것인가 라는 것이고, EU는 과감하게 후자를 선택했다. 그들은 민족주의를 포기하고 공존하는 방식을 채택했고 그러한 원칙은 당연히 초등학교 교육 프로그램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가 되었다. 다문화주의와 다문화교육은 EU의 존속을 위한 기본 과제이자 원칙으로 인식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노동시장을 개방하여 양질의 동유럽 노동력을 값싸게 도입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입국한 외국 노동자들은 본국으로의 단순 귀국은 사실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영국과 아일랜드는 예를 들면 폴란드어나 리투아니아어 강좌를 무료로 개설했다. 외국노동자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조국의 언어를 배우면서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유도하여 언제라도 본국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우리도 다문화 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영어에만 의존하는 외국어 교육을 고집하고, 주류 사회와 의견이 다른 소수집단의 공존을 허용하지 않으려 하며, 이주 노동자 정책에서도 단기적이고 착취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더구나 연수생들의 귀국은 불가능한데도 그것을 계속 무리하게 밀고 나가면서 마찰을 빚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단일문화에 고집은 EU의 다문화주의 정책과는 정반대의 대척점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권교육은 선택 아닌 의무

이학수/부산교육대 강사·역사이해
이학수/부산교육대 강사·역사이해
유럽연합의 이러한 움직임, 즉 비폭력과 평화를 확산시키려는 노력이나, 힘의 논리나 폭력을 통한 방법보다 타협을 통한 문제 해결을 위한 평화교육과 인권강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미국, 일본, 이스라엘처럼 힘의 논리를 추구하는 패권주의를 아무리 선호해도 강대국들을 결코 이길 수는 없다. 대신 그들의 패권구도에 열심히 봉사하게만 될 것이다. 반면 우리가 평화와 인권, 다문화 등을 통해 국제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있을 때 아시아 여러 국가들과 국제사회가 한국을 지지할 것이고 그때 비로소 미국과 일본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국제적으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도 이주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족을 구성한 결혼 이주자들의 인권문제를 시급히 해결하는 게 중요하다. 이제 우리가 오랫동안 추구했던 가치들을 재검토하여 새로운 가치들로 대체해야 될 때가 왔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의무다.

이학수/부산교육대 강사·역사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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