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한국 극장 간판을 채웠던 주요 작품들 중 하나가 일본영화였다. <링>으로 시작된 일본 공포영화에 대한 관심이 <주온>(2003)의 100만 관객으로 이어졌고 독립영화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전국 5개 스크린에서만 개봉했지만 ‘엔(N)차 관람’ 바람을 일으키며 화제를 낳았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관심은 서서히 꺾여 갔고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일본과의 정치적 마찰과 이어진 ‘노 재팬’ 불매운동도 극장가에 영향을 미쳤다. 그렇게 사라진 듯한 한국 내 일본영화 시장이 올 초부터 다시 일어나고 있다. 모든 한국영화가 흥행에 참패한 1분기 극장가를 일본 애니메이션 <더 퍼스트 슬램덩크>(468만명) <스즈메의 문단속>(552만명)이 접수했다. 더 놀라운 건 실사영화의 약진이다. 지난해 말 개봉한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는 10대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면서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일본 실사 영화 역대 흥행 2위에 올랐다.
이 영화를 수입한 일본영화 전문 수입사 미디어캐슬의 강상욱 대표는 “10대 관객이 20대 관객보다 1% 정도 많았다”면서 “영화를 많이 본 세대에게는 기억상실증이나 시한부 소재가 뻔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젊은 관객에게는 새롭게 다가가는 듯하다. 또 원작 소설도 40만부가량 팔렸는데 라이트노벨에 대한 젊은 세대의 익숙함도 영화의 흥행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강 대표는 <더 퍼스트 슬램덩크>와 <스즈메의 문단속>이 나란히 흥행한 것도 일본영화에 가졌던 관객들의 편견이 빠지는 데도 일정 정도 역할을 했다고 짚었다.
다른 일본 실사 영화들도 덩달아 힘을 내고 있다. 5월24일 개봉한 <남은 인생 10년>은 개봉 12일 만인 이달 6일 관객 10만명을 돌파했다. 할리우드 대작과 <범죄도시3>가 스크린의 대부분을 차지한 점을 감안하면 의미있는 기록이다. 10년 시한부 인생을 사는 20대 여자 주인공이 삶을 포기한 남자를 만나면서 사랑을 하고 삶을 의미있게 정리해나가는 실화 바탕의 영화다. 7일에는 <이윽고 바다에 닿다>가, 14일에는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 개봉한다.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미디어캐슬 제공
일본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남은 인생 10년>의 남녀 주인공인 사카구치 켄타로와 고마츠 나나를 비롯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과 <이윽고 바다에 닿다>의 주인공인 키시이 유키노 등 일본의 스타 배우들도 줄줄이 내한하고 있다.
세 영화는 장르는 모두 다르지만 20대 여성이 주인공이고 일본 영화 특유의 섬세함과 서정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작품들이다. <오늘 밤…>처럼 10대와 20대 여성 관객이 주요 관객층이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수입한 디오시네마의 한동희 대표는 “독립영화는 20~30대, 특히 30대 여성 관객이 주축이었는데 최근 일본 영화 개봉작들에는 10대와 20대 초반까지 새로운 관객층이 유입되고 있다”면서 “일본영화에는 서로 다른 내용과 스타일이 있지만 예측 가능한 느낌이 있다. 예상을 뛰어넘는 감동을 받지 않더라도 대체로 기대하는 수준의 정서적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젊은 여성들 관객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는 듯하다”고 분석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청각장애를 가진 여성 복서(키시이 유키노)가 혼란과 고민 속에서도 자신의 미래를 묵묵히 찾아가는 20대 성장담이다. 한동희 대표는 “개봉 전에 배우와 미야케 쇼 감독을 초청해 관객과의 대화 이벤트를 열었는데 주인공 또래의 많은 여성 관객들이 고민을 털어놓는 모습을 보면서 일본영화의 담담하면서 현실적인 주제의식과 감성이 공감을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