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성근 배우(왼쪽)와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 원장.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라는 강수연 배우의 말은 연기와 영화예술에 대한 강렬한 자긍심의 표현이었습니다. 그 말은 강 배우 살아있을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후배들에게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오랫만에 문성근씨가 ‘주연배우’로 극장 무대에 등장했다. 7일 오후 서울 성동구 메가박스 성수에서 열린 배우 강수연(1966~2022) 1주기 추모전 상영작 <경마장 가는 길>(1991) 관객과의 대화(GV)였다. 영화 <베테랑>(2015)에 대사로 나오면서 유행어가 된 이 말은 강수연이 젊은 시절부터 영화계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 자주 했던 말이다.
너무 빨리 세상을 떠난 강수연을 기억하기 위해 그를 그리워하는 영화인과 팬들이 모였다. 6~9일 서울 마포구 한국영상자료원과 메가박스 성수에서 열리는 추모전 ‘영화롭게 오랫동안’은 강수연의 대표작 11편을 상영하고 강수연에 대한 기억을 나누는 자리다. 1991년 개봉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이날 처음 다시 봤다는 문성근은 “강수연은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다. 나는 내 연기 하는 데만 정신이 없어서 주변을 못봤는데 강 배우는 늘 여유있게 현장을 살피면서 촬영했던 걸 기억한다. 곱게 늙어서 할머니 연기도 했어야 하는데 너무 아쉽다”고 털어놨다.
또 그는 “강수연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술”이라며 “태흥영화사에서 제작이 결정된 직후 강수연씨가 술 한잔 하자고 했다. 나를 압구정동의 술집으로 데려가서 위스키를 원샷하자고 하더라. 그때 강수연씨는 월드스타고 나는 영화를 막 시작했을 때라 출연료 차이가 15배 정도 났을 때인데 먼저 마시고 마시라니까 거절할 수도 없어 8잔까지 마시고 난 실신했다. 친해지는 과정도 강수연다웠다. 참 멋있는 배우였다”고 회고했다.
문성근은 이 영화의 5분 넘는 롱테이크 베드신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연출부가 풀까지 먹여온 이불에서 열흘 정도 찍다보니 무릎이 까져서 밴드를 붙였는데 그게 일부 떨어떨어져 나간 게 화면에까지 잡혔다”며 “여자배우들에게 베드신은 정말 괴로운데 강수연 배우가 이전에 찍었던 영화에서 지켜야 할 선을 넘은 남자배우에게 ‘한 번만 더 이러면 죽여버려! 개XX야!’라고 소리 지른 적이 있다는 말을 했다. 당시 분위기에서 그 역시 강수연이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라고 말했다.
<경마장 가는 길>을 연출한 장선우 감독은 코로나에 걸려 이날 참석하지 못했다. 장 감독은 대신 ‘<경마장 가는 길>보다 오래 전 그녀를 위해 <남한강>이라는 시나리오를 썼는데 영화화되지 않았다. 누군가 영화로 완성해서 그녀에게 헌정했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봉준호(같은 좋은 감독이)’ 라는 문자 메시지를 김홍준 한국영상자료원 원장에게 보내 아쉬움을 달랬다.
6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임상수 감독의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상영 뒤 강수연의 ‘다음세대’인 배우 김아중과 소설가 겸 시나리오 작가 정세랑의 ‘스페셜토크: 강수연의 선택들’이 영화평론가 손희정의 진행으로 열렸다. 김아중은 “<미녀는 괴로워>(2006)가 개봉한 뒤 개인적으로 가깝지 않던 강수연 선배님한테 식사자리에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고 떠올렸다.
“최은희, 안성기, 전도연 선배님 등 마치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분들이 모여 계셔서 어리둥절한 상태로 식사를 하게 됐는데 강수연 선배가 ‘참 잘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상 받아서 힘들지? 질투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신경쓰지마’라고 응원해주셨어요. 상 받을 때보다 이 자리를 통해 ‘내가 정말 배우가 됐나 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김아중은 “업계에서 여배우들에게 바라는 분위기가 있다. 튀기보다는 사랑받고 아름다운 그림같은, 액자형 배우가 되어야 하나 고민하면서 위축되기도 하는데 강수연 선배는 그 액자를 뚫고 나와 배우이자 한 인간으로 목소리를 낼줄 아는 사람이었다”며 “저런 사람이 진짜 여배우구나, 영화산업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줬다”고 평가했다.
왼쪽부터 손희정 영화평론가, 정세랑 작가, 김아중 배우.
강수연의 열혈팬으로 장편소설 <이만큼 가까이>에서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오마주하기도 했던 정세랑 작가는 “이 영화는 개인의 자유에 공권력이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 첨예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인데 강수연이라 가능한 연기력으로 영화적 매력에 무거운 질문을 녹여냈다. <씨받이> 역시 다른 배우가 했으면 민속적 풍경의 재현에 그칠 수 있었는데 강수연 배우를 통해 여성의 욕망과 삶의 의지가 드러나며 작품으로서의 영원성을 획득했다”고 평했다. 그는 “<정이>에 출연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내 시나리오에도 강수연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었는데 무척 아쉽다”고 말했다.
손희정 평론가는 “강수연 배우의 필모그래피에는 에로티시즘(<감자> <씨받이> 등)과 페미니즘(<그대 안의 블루> <처녀들의 저녁식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등)이라는 모순돼 보이는 두 갈래 궤적이 있다. 그런데 강수연 배우가 인터뷰(1990년 <영화예술>)에서 <씨받이>의 옥녀를 어려운 시대와 상황을 열심히 살아낸 여자로 보고 또 당시 대리모 문제가 사회이슈가 되기도 해서 출연을 결정했다고 말한 걸 읽으면서 강수연 배우의 에로티시즘과 페미니즘은 모순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7일 저녁 메가박스 성수에서 열린 추모전 개막식에는 고인의 동료배우 안성기와 박중훈, 예지원을 비롯해 정지영 감독, 임순례 감독, <그대 안의 블루>의 기획자로 참여했던 심재명 명필름 대표 등 영화인들이 대거 참석했다. 문소리, 이정재, 이정현 등 참석 못한 후배 배우들은 영상으로 강수연에 대한 기억을 보탰다. 동생 강수경씨도 무대에 올라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사진 강수연추모사업추진위원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