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제주 추자도의 추자중학교 도서관에서 전교생 19명이 모여 올 한해 써 엮은 시집 <자라고 있어 잘하고 있어>를 함께 받아 읽고 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2020년 말 성교육 동화책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등이 정부 사업도서(‘나다움어린이책’)에 포함되었다가 김병욱 국민의힘 의원이 ‘조기성애화’가 우려된다며 문제 제기해 전량 회수된 바 있다. 정부가 성주체성, 인권 등을 주제로 삼는 양질의 서적을 선별해 권장 확산시키려던 최소 3개 연도 민관 프로젝트는 단 한차례 시늉 끝에 와해된다. 당시 책 선정 과정에 참여했던 윤아름 초등학교 교사는 22일 <한겨레>에 “성교육도 사교육으로 해결하는 현실”이라고 말한다. 교육당국과 학교가 제구실을 우회하고 “학부모끼리 성교육 강사를 불러 강연받는 식”으로 책임을 외주한 결과다.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페르 홀름 크누센)가 덴마크에서 출간된 때는 1971년, 물경 반세기 전. 이듬해 덴마크 어린이도서상을 받았다. 지난달 <한겨레>가 찾아간 유럽의 어린이문학계에서 만난 기세는 ‘아이들을 어른들의 욕망에 가두지 말라’다. 가난, 기아, 환경, 노동, 전쟁 따위 위기에 처한 아이들은 어떤가. 지난 10월 우크라이나 전쟁터에서 들은 한마디. “부모가 오늘 아이들을 안심시킬 순 있다. 그다음은? 책이, 도서관이 한다.” 서구의 어린이문학은 현실에서 이탈한 순정주의, 현실에 포박된 비관주의와 다투고 있었다.
선진국의 어린이문학은 더 빠르고 예민하게 변하고 있다. 어린이의 그러한 생애 자체를 투영한다. 때로 전설과 신화에도 가차 없다. <초원의 집>의 작가 로라 잉걸스 와일더(1867~1957)를 기리는 어린이문학상(1954년 제정)에서 작가 이름을 빼버렸다. 4년 전, 주관하던 미국 어린이도서관협회의 만장일치 결정이었다. 작품에 내재한 반인권적 요소 탓이다. 국내에도 1990년대 후반 소개되어 베스트·스테디셀러가 된 <개구리와 두꺼비>(아널드 로벨) 시리즈를 놓고 최근엔 동성애적 관계로 두 주인공을 재해석하는 시도가 나온다. 영국의 유명 어린이문학 작가 재클린 윌슨은 말년에 커밍아웃을 했고 작품에도 퀴어서사를 이어간다.
세계 어린이문학의 척도라 할 콜더컷(칼데콧), 뉴베리상은 이제 ‘다양성’으로 수상 자격이 수렴된다. ‘미투’의 영향도 적잖아 특히 지난 5년이 그러하다. 이달 초 영국을 다녀온 윤아름 교사는 “많은 서점과 도서관, 미술관 책 코너에 퀴어 주제의 책들이 눈에 띄게 배치된 걸 보고 많이 놀랐다”며 “어린이 때부터 성정체성을 탐색하도록 돕는 책들이었다”고 말했다. 최현경 어린이책 편집자는 서구 어린이문학의 “대세는 페미니즘이라고 말하는 듯하다”고도 짚는다.
국내 어린이문학의 성장세라면 올해만큼 두드러진 해는 없다. 어린이문학 100돌을 기념하려는 듯 시간이 교차했다. 하지만 이는 어린이문학계에선 되레 낮춰 보던 그림책 부문의 성과라 해야 더 정확하다. 2020년 백희나 작가의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알마상), 2022년 이수지 작가의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수상은 영화계 오스카상, 칸 감독상만큼이나 놀랍다는 평가가 많다. 그 작은 세계에서 애면글면 구축해온 역량이고, 대중들은 잘 알지 못하는 새 최대 규모의 어린이출판 국제 행사인 볼로냐 어린이도서전에서 2009년부터 2022년까지 2016년만 빼고 해마다 볼로냐 라가치상을 받아왔던 저력이 마침내 정점에 이른 것이다. 국외 평가는 도드라진다. 캐시 쇼트 미국 애리조나대 교수는 “한국 그림책 작가들의 작품은 이전 미국 그림책에서 볼 수 없던 것들이다. 그림책에 대한 놀랍고 혁신적인 것들이 한국에서 오고 있다”고 말한다. 내년 알마상엔 이상교·이영경 작가가 후보로 올라 국제적 평가를 기다린다. 김유진 어린이문학 평론가는 <한겨레>에 “동화도 번역의 한계가 있을 뿐, 국제 수준에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난 12일 제주 추자도의 추자중학교 도서관에서 전교생 19명이 모여 올 한해 써 엮은 시집 <자라고 있어 잘하고 있어>를 함께 받아 읽고 있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국내 어린이문학의 양적·질적 성장이 시장성으로 연결되는 건 아니다. 책은 넘쳐도 책과의 거리는 더 멀어지는 탓이다. 이는 유럽에서도 관찰되는 현상이다. 정부와 도서관, 커뮤니티별로 숱한 ‘수작’을 꾀하는 이유다. 단지 ‘좋은 책’이 아니라, 좋은 책의 ‘물리적 공급’이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의 목표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한국에선 올 하반기부터 국민의힘 쪽 지자체 단체장을 중심으로 지역 도서관 사업 축소 움직임이 뚜렷하다. 서울 영등포구처럼 중장기 과제로 추진해오던 도서관 사업을 새삼 재정을 이유로 삽시간 뒤집거나 마포구처럼 도서관 전체 예산 삭감을 전제로 작은도서관을 독서실로 전환하려다 역풍을 맞는 사례가 이어진다. 시인이기도 한 김유진 평론가는 “사립을 포함해 30여개나 되는 지역 도서관에는 내가 찾는 동시집이 거의 없었다” “(인터넷서점 검색 결과 2021년 10월~2022년 9월 나온) 신간 동시집은 230여종 중 고작 5종, 그나마도 총 10권이 안 됐다”며 “도서관에서조차 찾기 힘들다면 그 많은 동시집은 어린이 독자의 손에 들리기를 과연 꿈꿀 수 있을까”(<창비어린이> 올 겨울호) 묻는다.
게다가 한국의 경우, 취학연령대에 군림하는 것은 학습지다. 편향성, 차별의식 등을 둔감히 답습해 강화시킨다. 최현경 어린이책 편집자가 지난해 하반기 분석한 결과, 국내 인물학습만화 <who?> 시리즈 196권 중 여성은 35권(18%), 시리즈 55권 중에선 11권(20%)에 불과하다. 남성은 미국 기업가 일론 머스크와 같이 ‘실시간’ 발굴되는 반면, 여성은 오래전 역사적 인물에 머문다.
어린이문학의 세계를 좇아 지난 6개월 동안 <한겨레>가 듣고 본 국내외 풍경을 개략하자면 이러하다. 2022년은 세계 최초 어린이 인권선언으로 평가되는 ‘어린이날’ 선언이 나오고 소파 방정환이 번역동화(<사랑의 선물>)를 국내 처음 펴내며 큰 사랑을 받은 지 100년이 된다.
“1. 어린 사람을 빈말로 속이지 말아주십시오. 2. 어린 사람을 늘 가까이하시고 자주 이야기해주십시오…” 1922년 5월1일, 서울 종로 탑골공원에 청소년들이 직접 뿌린 선전문의 글귀다. 여성 해방도 요원한 시대 갈급된 조선의 어린이 해방은 바로 문학, 이야기와 함께했다. 소파 연구자인 염희경 박사는 <한겨레>에 “30~40년 빠른 일본 어린이문학의 영향도 있었으나 독자적으로 이미 (방정환 등이 속한) 천도교 사상운동이 있었다”고 말한다.
운동권 586세대가 출판사로 유입된 1980년대 중반부터 창비어린이, 웅진출판 등의 가치지향적 어린이 서적 출판이 활성화되고, 1990년대 중반부턴 우수 국외 그림책도 폭넓게 소개된다. 이 세대와 그 문화 토양 위에서 자란 엠제트(MZ) 세대 간 격차가 지금처럼 벌어진 건 아이러니이고, 더는 어른의 가치와 정치성으로 어린이문학이 표명될 수 없음을 일러준다. 기성세계의 가치 주입, 어른 자신의 순수 대체재(낭만주의)로서, 말하자면 어린이를 위한 어른의 어린이문학이라는 근대의 극명한 종언인 셈이다. 하물며 입시로 더 가두고 분절시키는 퇴행의 종속.
동화 작가이기도 한 김서정 평론가는 “일반 문학이 이야기, 노래 등으로부터 시대 변화에 따라 자연발생한 것이라면, 어린이문학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게 가장 큰 특성”이라고 말한다. ‘만듦’은 ‘쓰임’을 전제로 한다. 그 쓸모는 이제 무엇이어야 하는가.
추자중학교 1학년생 김나윤의 올해 시. <자라고 있어 잘하고 있어> 갈무리
추자중학교 정의현 학생이 올해 쓴 시. <자라고 있어 잘하고 있어> 갈무리
지난 12일 <한겨레> 취재진은 제주발 추자도행 여객선 산타모니카에 올랐다. 이윽고 13~14일, 섬은 풍랑에 갇혔고 흔들렸다. 드나드는 배 한 척이 없었다. 섬엔 해마다 전교생 수학여행을 떠나는 추자중학교가 산 아래 있다. 코로나가 닥친 지난 3년은 그러지 못했다. 아이들은 탓할 수 없는 것들을 기어코 불러세웠다.
“바람이 추자도를 못 나가게 막는다/ 바람은 추자도를 많이 좋아한다//…/ 바람은 오늘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바람은 치타처럼 빠르게 돌아다닌다”(‘바람’ 중, 2학년생의 2021년 시)
“나는 왜 추자도 밖을 나가지 못할까?/…/ 추자도에 나갈 수 없는 유리막이라도 있는 걸까?”(‘추자도 밖’ 중, 3학년생, 2021)
올 9월에야 여건이 달라졌다. 전교생 19명이 그토록 고대하던 3박4일 서울 나들이의 항공권 예매까지 완료됐다. 이윽고 출발일, 섬은 태풍에 갇혔고 흔들렸다. 하루 한차례 오가던 배가 끊겼다. 수학여행은커녕, 열아홉 중 셋은 1시간 뱃길 제주도로도 올해 나가보질 못했다. 비범한 세계에선 평이한 세계가 절실하고, 아이들 말하길 그 “쓰기 싫다”던 시나 써야 두 세계는 겨우 만나는 모양이다.
“밤새 꺼지지 않는/ 조명들 사이로/ 퇴근하고// 틈새조차도 없는/ 사람들 사이로 출근하고// 도시의 바쁜 사람이 되고 싶다.”(‘도시의 별’, 2학년생)
‘도시의 별’과 함께 전교생이 올 한해 쓴 시 104편이 시집 <자라고 있어 잘하고 있어>로 묶여 ‘저자’들에게 배포된 12일 오후, 학생들은 웃었고, 부끄러워했고, 서로를 놀렸다.
3학년 한 학생이 말했다. “(내 시를 읽으니) ‘현타’(현실을 자각하는 시간)가 와요.”
1학년 한 학생이 말했다. “기분이 나빠져요. 내용이 이상하고, 그때가 (지금과) 그대로이니까요.”
한 학생이 또 말했다. “여긴 유치원, 초등학교까지 같이 다니니까 서로 정말 다 안다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어떤 시는 쓴 사람을 못 맞히겠더라고요. 모르는 게 많았어요.”
추자중학교는 2019년부터 이맘때 전교생 시집을 내왔다. 모르는 마음들이 집 밖으로 나갔다. 섬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의 등은/ 아버지와 나 사이에 벽이 있는 것처럼/ 딱딱했다.// 그 피로를 풀려고/ 식당에 들어가/ 술을 마신다.// 다음날이 되면 그 피로가 날아간다./ 그리고/ 아버지의 등은 여전히 딱딱했다.”(‘아버지의 벽’ 중, 3학년생)
“흰색을 보면/ 어릴 적 나를 하루만/ 돌봐주신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는 하루만 있다/ 내가 모를 때 사라졌다/ 흰색만이 엄마의 기억이다/…”(‘흰색은 엄마’ 중, 1학년생)
모르는 마음들이 마음 안으로 왔다. “그대여 오늘은 콩 키우기 딱 좋은 날이오/ 그대는 생각하겠지/ 완두콩, 강낭콩, 검은콩/ 나는 다른 콩을 키우고 싶소/ 그대랑 나에게 정말 어울리는 콩이오/ 그 콩이 무엇인지 아오?/ 바로/ 알콩달콩이오”(‘콩’, 2학년생, 2021)
최성숙 추자중 국어교사는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굉장히 솔직하게 표현하는 점이 다른 중학교 학생들과 다르다. 정말 놀라울 정도다. 좁은 지역이라 더 안 하는 얘기, 절대 건드리지 않는 부분이 있는데, 그런 고민들까지 볼 수 있어서 시의 쓸모라는 게 나한테도 있었다”고 말한다. 코로나 원년에 부임한 뒤 학교의 외벽부터 밝게 칠하고, 1만권 도서관에 개인 관리 서고를 만든 현원필 교장은 “이 시들을 부모님들도 같이 봤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정현종 시인의 시마따나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면, 때때로 시, 그림, 더 긴 글이 그 섬을 오갈 배가 되는 셈이다. 김지은 서울예대 교수(문예학부)는 “자본가가 보기 불편할 때 노동자 목소리에 가까울 수 있듯, 어른이 더 불편하고 당혹스러울 때 어린이 목소리에 가까울 수 있다”며 “‘나’도 말하고 싶을 때 그 시작에 문학과 책이 있다. 특히 (한국적 교육 환경에서) 어린이 청소년들이 상상친구, 사고실험 해가며 ‘대화하는 사람’으로 문학이 만든다”고 말했다.
바꿔 말하자니, 아이와 어른의 집단적 대화, 과거와 미래의 대화다. 작가 한강은 <소년이 온다>의 후기(‘여름의 소년들에게’, 2017)로서 ‘5·18’ 3년 뒤인 1983년 읽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동화 <사자왕 형제의 모험>에 대한 강한 인상을 회고, “아이들을 위한 책으로서는 놀랍게도 처음부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며 사랑과 절망, 존엄과 고통의 동반자적 관계를 되짚고 “그렇게 거의 불가능한 방식으로 때로 우리가 만남을 경험하는지도 모른다”고 썼다.
추자중학교 전교생들이 2019년부터 만들어 온 시집
전쟁 속 아이들을 두고 소설가 김연수는 <한겨레>에 이렇게도 말했다. “전쟁 상황에서 비관적 이야기가 지배적이지만 대안적 이야기도 많다. 먼저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렇다. 결정적 순간에 다른 이야기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문학의 역할이 아닐까.” 이 마음과 저 마음의 대화.
‘어린이의 어린이에 의한 문학’의 가능성이 궁금한 기자에게 추자도 아이들은 기자의 헤어스타일만 궁금해했다. “처음 봤다”는 거다. 이 작은 섬에 도대체 왜 왔는지만 궁금해했다. “시 쓰는 것도 안 좋아하는데….”
추자도(제주)/임인택 최원형 기자, 김은형 선임기자
imit@hani.co.kr
※본 기사는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