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의 머슴으로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살해당한 청년이 그 집안의 막내 손주로 다시 태어나면서 벌어지는 판타지 복수극 <재벌집 막내아들>(제이티비시∙JTBC)에서 배우 이성민은 순양그룹 창업주 진양철 회장을 연기한다.
그의 주름진 얼굴 곳곳에 피어오른 검버섯은 정미소 쌀을 나르기 위해 사들인 용달차 두 대가 전부였던 운수회사를 발판으로 석유와 화학, 기계와 소비재 유통으로 사업을 확장하여 재계 서열 1위를 다투는 재벌그룹이 되기까지의 간난을 상징한다.
진양철은 “돈을 잃었으면 유죄, 돈을 벌었으면 무죄”라고 말하면서 ‘정도경영’의 핵심이 돈이라는 생각을 숨기지 않는 장사꾼이다. 돈의 향방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눈빛은 한국 산업화와 근대화의 민낯이 돈을 향한 탐욕 그 자체였음을 방증한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군사정권에 순양운수를 헌납당하는 고초도 겪지만, 진양철은 ‘사업보국’을 명분으로 정치권과 결탁하여 거액의 자산을 축적하였다. 정경유착의 당사자인데도 “전에는 내 주머닛돈을 노리는 놈이 군인 한 놈이었다면, 인자는 민간인 세 놈아로 늘었다. 그게 민주화”라고 비꼬며 정치권을 혐오한다.
그의 태도는 이율배반적이지만, 고도로 압축 성장한 한국 경제의 명암을 여실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간단치 않다. 정치계와 언론계 그리고 법조계를 돈으로 좌지우지하는 진양철의 경제관념이 배우 이성민의 표정과 몸짓은 물론, 상황에 따라 음역을 달리하는 목소리를 통해 섬뜩하게 형상화된다.
진양철의 돈에 관한 감각은 동물적 본능에 가깝다. 1980년대의 진양철은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농성을 지켜보며 “사람 장사는 끝”났다고 판단한다. “앞으로는 기술 장사해야 먹고 산다. 반도체는 우리 순양의 미래 먹거리”라고 단언하면서 주변 사람 모두 모험이나 도박이라고 생각하는 반도체 기업을 인수하여 공격적인 투자에 나선다.
1990년대 말 국제통화기금(아이엠에프∙IMF)에 구제 금융을 요청한 외환위기 상황에서는 부도 처리된 업계 2위 아진자동차를 인수하여 업계 만년 꼴찌 순양자동차를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는 글로벌 자동차 회사로 반드시 성장시키겠”다고 선언한다. 자동차는 더는 중공업이 아니라 전자라는 동물적 안목과 “전자, 반도체는 우리 순양이 제일 잘하는 깁니다”라는 자신감에서 비롯한 결정이었다.
외환위기 이후에는 자본 시장의 변화를 예감하고 금융지주회사를 세워 순양그룹의 지배구조를 개편하기도 한다. 전자와 반도체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자리매김한 재벌그룹의 창업주와 승계자가 연상되는 극적 상황이다.
“나라를 위해선 돈 한 푼이 아까바도, 돈 한 푼을 위해선 목숨이 안 아까운 위인” 진양철이 불법 비자금으로 경영권 승계를 위한 순양그룹 지배력 강화에 나서는 것도 실제 현실과 다르지 않다. 당연히 납부해야 할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 천문학적 규모의 회계 부정을 저질러도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한 점을 참작한 사법부가 집행유예로 풀어주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적당한 때에 사면 복권시켜주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분식회계’로 일컬어지는 재벌그룹의 회계부정행위 때문에 소액 주주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순양그룹 전체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순양물산의 주식 매집 비용 900억 원을 마련하기 위해 순양생활과학을 매각하여 소액 주주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진양철의 모습이 낯설어 보이지 않는 것도 그래서이다.
진양철은 오장육부 외에 돈에 대한 ‘욕심’, 부리는 사람 믿지 않는 ‘의심’, 누구든 배신할 수 있는 ‘변심’으로 순양그룹을 일으켰다고 자부한다. ‘사업보국’과 ‘정도경영’의 허울로 포장했지만, 그의 속내가 오직 돈 뿐이라는 자백이다. 더 많은 돈을 갖기 위해 돈으로 정치권과 결탁하고 언론계와 법조계를 움직였다.
장남이 노동자의 고용 승계를 언급하자 “그기 다 돈이다. 전쟁에서 이겼으면 전리품부터 챙길 생각을 해야지, 곳간부터 열어제끼자 하는 장수는 내 필요 없다”고 야단친다. ‘장자 승계 원칙’을 깨고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는 막내 손주가 노동자의 고용 승계를 주장하자 “머슴을 키워가 등 따숩고 배부르게 만들면 와 안 되는 줄 아나? 지가 주인인 줄 안다. 정리해고, 별거 아이다. 누가 주인인지 똑똑히 알려주는 기다”라고 훈계한다. 진양철 같은 기업인을 한국 경제 발전의 주역으로 마냥 추켜세우기만 할 수 없는 까닭이다.
진양철이 세상을 떠난 뒤, 순양그룹을 승계한 장자는 주가조작과 배임 그리고 횡령죄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휠체어를 타고 법원을 나선다. 창업주 진양철은 겪지 않은 일이다. 2세 경영인들이 경제사범으로 법정에 출두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은 1987년 개헌으로 경제민주화가 헌법에 명시되면서 경제사범 형량이 엄격해진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재벌그룹 총수의 경제사범에 대한 최종 판결은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으로 선고되는 경우가 많다. 대다수 국민의 법 감정에 미치지 않는 솜방망이 처벌이라 마뜩하지 않다. “대한민국 법치국가예요, 순양공화국이 아니라”는 검사의 목소리가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윤석진 대중문화평론가∙충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