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손주를 죽이려 하고,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죽이려 하는” 것을 알게 된 남자는 탄식만 할 따름이다. 단순한 고부 갈등이 아니라, 절대 권력의 후계자를 선발하는 경쟁 과정에서 발생한 패륜이었기 때문이다. 기득권을 강화해줄 사람을 선발하겠다는 정략적 판단의 권모술수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만은 없다는 합리적 대응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비극이다. 한 나라를 책임질 역량을 검증하기 위해 실시 중인 경선의 취지마저 흔들리는 상황이다.
조선시대의 왕실 교육을 상상한 드라마 <슈룹>(티브이엔)의 한 장면일 뿐이니, 너무 놀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시대적 배경만 다를 뿐 주권재민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 선거를 둘러싸고 발생하는 정략적 권력 투쟁을 연상하게 한다는 점에서 문제적 상황인 것만은 분명하다.
적장자 계승 원칙이 명확했던 조선 왕실에서 세자를 책봉하기 위해 중전의 소생과 후궁들의 소생을 경합시킨다는 ‘택현’은 극적으로 설정된 상황이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작가의 상상력이 창조한 이호(최원영)는 후궁이었던 어머니(김해숙)의 처세술과 피바람을 동반한 계략 덕분에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왕이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왕권을 흔드는 대신들에게 맞서 백성을 위한 애민통치로 태평성대를 열었다. 하지만 어머니 대비의 수그러들지 않는 권력욕 때문에 세자가 희생되고, 택현으로 새로운 국본을 세워야 한다는 대신들의 요구에 시달린다. 대비의 정략적 공격으로부터 보호막이 되어주었던 세자를 잃은 슬픔에 황망해하던 중전 임화령(김혜수)은 곤혹스러운 처지의 임금을 위해 결단을 내린다. 택현을 받아들이는 것은 물론, 후궁들의 소생이 세자가 된다면 중전의 자리마저 내놓겠다는 임화령의 선언에 모두가 놀란다.
임화령의 자신감은 자식 교육을 책임질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한다. 정확한 사인도 모른 채 떠나보낸 총명한 세자와 달리 하루가 멀다 하고 사고 치는 자식들이지만, 제대로 교육만 한다면 얼마든지 훌륭한 왕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대비와 호시탐탐 중전의 자리를 넘보는 황귀인(옥자연) 세력이 협잡한다 해도 택현을 위한 경합이 공정하게 치러진다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합 과정에서 대비와 황귀인의 음모 때문에 자식의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대비에게 독성의 약초를 건네며 “아직은 수의보다 당의가 더 어울립니다”라며 은근하지만 섬뜩한 경고를 보낸다. 시어머니를 독약으로 겁박하는 것은 패륜적 행위에 가깝지만, 자식을 위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방증이다.
임화령은 수구 세력에 맞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왕의 아내 역할도 완벽하게 수행한다. 대비와 협잡하여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수구 세력의 음모를 간파하여 미리 대처하는 지혜를 발휘할 뿐 아니라, 후궁 소생 왕자들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포용력까지 겸비했다. 또한 상전에게 음해당하는 여종의 편에서 해결사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을뿐더러, 그들을 위한 거처까지 마련해줄 정도로 사회적 약자의 권익 보호에 관심이 많다. 수구 세력의 삿된 의도를 당당하게 격파하는 영웅적 면모에 자식의 앞날을 염려하는 어머니로서의 인간적 품성까지 모두 갖춘 꼴이다.
이처럼 “신분이 천하다 해서, 또 여자라 해서 그 삶이 다르지 않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무장한 임화령도 “자식 일 앞에선 이기적인 엄마일 뿐”이었다. 임화령의 경고와 단속에도 수구 세력은 최종 경합 심사를 맡은 유생들의 부모를 매수하여 부정행위를 획책한다. 다음 왕의 신하가 될 유생들이 기득권이나 정치색에서 벗어나 자신의 왕을 직접 뽑을 것이라 믿었던 임화령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부정행위에 동참한 그대들이 장차 관리로서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질책한다. 기득권 수구 세력을 향해서도 “무지한 자가 신념을 갖는 것도 무서운 일이지만, 신념을 가져야 할 자가 양심을 저버리는 무지한 짓을 하는 건 더 무서운 일입니다”라고 일갈한다.
공정성에 근거한 그의 질책과 일갈은 상당히 설득력 있지만, 이 또한 자식을 위한 행동이라는 점에서 그는 선택적 정의와 분노에 익숙한 요즘 학부모를 떠올리게도 한다. 임화령은 자식의 교육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중전이다. 임화령은 “엄마라 해서, 어른이라 해서 항상 맞는 것도 아니”라는 것과 “부모는 앞서 걷는 이가 아니라, 먼저 가본 길을 알려주는 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자식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것이 자식을 망치는 길이 될 수도 있다는 점도 역설한다.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면모의 어머니와 아내인 점은 틀림없지만, 그래서 문제적이다. 현대적인 시선으로 새롭게 상상한 조선시대의 임화령은 일제강점기부터 여성에게 강요한 ‘현모양처’의 틀에 여전히 갇혀 있다. 유쾌하고 통쾌한 성격에 능력 있고 책임감까지 완비했다고 하지만, 자식을 위하는 그의 행동거지는 사교육 시장을 쥐락펴락했던 학부모와 닮아 있다. 능력 있고 책임감 넘치는, 유쾌하고 통쾌한 성격의 임화령을 마냥 반길 수 없는 까닭이다.
대중문화평론가·충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