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이유로 고소·고발이 남발된다. 법만큼 공정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법정을 찾으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한때 무법의 시대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법치주의가 실현된 것 같아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개인과 사회의 갈등을 대화로 해결하기보다 전적으로 법에 의지하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이다. 법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서민들이 예기치 못하게 법률적 조력이 필요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변호사 선임 비용도 문제다. 경제적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국선변호사 제도가 있지만, 법적 조력을 제대로 받을 수 있다고 신뢰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근간을 흔드는 경제사범들이 수임료 비싼 전관예우 변호사를 선임하여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받고 집행유예를 선고받는 사례가 많은 사법 현실 또한 여전히 문제다.
대한민국 법정은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죄 추정의 원칙과 증거 제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을 경우에도 무죄로 추정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하지만 검찰 일각에서는 이해관계가 첨예한 피고인 또는 피의자의 진술이나 자백을 증거로 입건하고 법정형을 구형하여 인권을 침해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또는 ‘유권무죄 무권유죄’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경우까지 고려하면 문제가 심각하다. 일말의 의심도 없이 존중해야 마땅한 법 집행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는 까닭이다. 이런 사법 현실을 모티브로 하는 드라마 <천원짜리 변호사>(에스비에스·SBS)의 ‘천지훈’(남궁민)은 법률 조력을 받을 만큼 여유가 없는 의뢰인들을 위해 단돈 천원만 받고 사건을 수임하여 동분서주하는 변호사이다.
천지훈은 혼외 자식으로 태어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한 채 성장했다. 그래도 검사 출신 국회의원으로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아버지를 존경했고, 아버지 같은 검사가 되고 싶었다. 건설회사 비자금 수사 중 아버지가 연루된 사실을 알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수사에 협조적이었던 아버지가 투신자살하자 충격을 받고, 그 죽음의 배경을 파헤치려고 수사를 계속했지만, 아무것도 밝히지 못한 채 검찰을 떠나 변호사가 되었다.
수임료는 천원이지만, 천지훈은 치밀하고 날카로운 변론으로 의뢰인의 억울함을 해소한다. 그가 수임하는 사건들은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현실에서 비롯한다. 사채업자에게 빚 독촉을 받다가 극단적 선택을 결심한 의뢰인의 사연은 터무니없는 이자로 서민을 울리는 고리대금업의 실상을 폭로한다. 서울역 화장실에서 비틀거리는 취객을 부축해주다가 절도 전과 이력 때문에 소매치기로 몰린 의뢰인의 억울함은 갱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사회적 편견과 혐오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아파트 경비원한테 주차를 맡기고, 주차 잘못으로 차량에 흠집이 생겼으니 수리비를 내놓으라는 입주민의 횡포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을 관계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진실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려고 천지훈은 사건 현장을 누비면서 철저하게 검증한다. 소매치기 절도사건 발생 상황을 직접 재현하면서 찾아낸 단서를 바탕으로 의뢰인이 주장하는 내용의 진위를 파악하여 무죄를 입증하는 방식이다. 다소 괴짜 같은 그의 변론 방식은 물증 없이 회유로 자백을 받아내어, 전과자이니 가중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검찰의 행태에 제동을 건다. 그 결과 법률적 조력이 절실하지만, 경제적 이유로 변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사람들이 ‘천원’의 변론 비용으로 삶의 희망을 되찾는다.
천지훈은 사건의 본질을 꿰뚫고 실체적 진실을 포착하는 통찰력으로 “죄를 지은 사람을 처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헌법의 가치를 구현한다. 이와 함께 ‘범죄의 수사, 증거의 수집, 공소의 제기·유지, 법원에 대한 법령의 정당한 적용 청구’ 등 국가 업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부 권력 지향적 검찰을 상대로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한 진실 규명,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훼손한 사법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수임료가 비싼 검사 출신 전관예우 변호사가 아닌, 천원이 상징하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천지훈의 행보를 주목하는 시선이 많다. 가장 공정해야 할 법조계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일 것이다.
충남대 국문과 교수·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