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S] 임병철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 : 연재를 마치며
혼란과 불안 속에 핀 화려한 꽃
‘앙스트블뤼테’로서의 르네상스
문명의 붕괴라는 위기감 속에서
더 나은 인간과 사회문제 천착
혼란과 불안 속에 핀 화려한 꽃
‘앙스트블뤼테’로서의 르네상스
문명의 붕괴라는 위기감 속에서
더 나은 인간과 사회문제 천착
18세기에 제작된 베르나르도 루첼라이의 초상화. 위키피디어
불안 속에도 피어나는 꽃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이야기했듯이, 르네상스를 읽는다는 것은 때론 서툴고 또 간혹은 화합조차 할 수 없어 보이는 지적 투쟁기를 더듬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르네상스인들은 하나의 공동체에 모일 수 있었다. 폰타노를 존경했던 피렌체의 귀족정주의자 루첼라이가 주도하여 만든 이 모임에서, 설령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지만, 피렌체 공화주의의 대표 주자로 성장하는 마키아벨리와 귀차르디니가 자신들의 생각을 맘껏 표출하고 이를 동료들과 나누었다는 것은 이 점을 웅변하는 징표다. 어쩌면 르네상스 문화는 ‘앙스트블뤼테’, 즉 불안 속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르네상스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14세기 중반부터 15세기 초, 이탈리아에 불어닥친 혼란이 그 묘판이었다. 흑사병의 창궐로 하릴없이 내동댕이쳐진 인간 생사와 윤리의 문제, 교황권이 약화되면서 감지되기 시작한 보편적 권력 질서의 붕괴 등이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문명 자체가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으로 다가왔던 탓이다. 물론 15세기 중반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은 그 불안한 마음에 기름을 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이 감지했든 못 했든, 르네상스인들의 다양한 지적 실험은 이 문명적 위기감 속에서 태어났다. 의미심장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눈에 비친 문명의 붕괴가 어떤 특정한 제도나 체제가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타락에서 비롯되었다고 진단했고, 그에 따라 윤리적 개선을 통한 더 나은 삶을 꿈꾸었다. 르네상스의 아버지 페트라르카가 기계적이고 추상적이며 또 사변적이고 공허할 뿐 결코 인간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당대의 모든 가치를 배격하면서 옛 고전 시대로 눈을 돌린 것이 그 때문이었다. 이후의 르네상스인들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고전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와 같은 페트라르카의 지적 세례 덕분이었다. 하지만 고대의 모든 것을 흠모하면 할수록 그들은 형용하기 어려운 모순에 빠지곤 하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옛사람들과 자신들의 차이가 더욱더 분명해졌던 탓이다. 우리가 살펴보았던 포조나 스칼라가 얼핏 서툰 상대주의자나 설익은 역사주의자처럼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다면 시대착오라는 개념을 통해 과거를 분석한 발라는 차치하더라도, 역사를 일관된 내러티브로 엮어내기 시작한 브루니부터 그를 계승한 마키아벨리, 그리고 그들과는 다른 정치적 맥락에서 군주의 삶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밀라노의 데쳄브리오는 모두 그와 같은 맹아적 역사의식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더욱이 이런 그들의 생각은 인간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고, 또 교육이라는 세계로 그들을 이끌었다. 초기 르네상스 교육사상가 베르제리오가 인간의 덕성을 키워 사회를 개선하려 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더욱이 교육을 통한 인간의 개선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존재’라는 새로운 인간 관념으로 이어졌다. 마네티와 피코에게서 발견되는 인간존엄 사상은 바로 그것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문명적 위기의 극복이 인간성의 회복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면, 인간에 대한 성찰이야말로 그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윤리학이 정치의 문제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대개의 르네상스 지식인들은 모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인간의 본성 또한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이에 따라 그들은 인간을 공동체 속에서 살 수밖에는 사회적 동물로 간주했고, 따라서 공동체의 안위와 평화 그리고 공공의 덕을 개인의 덕성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겼다. 이것이 그들이 고대 로마에서 그리스로,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스파르타로, 그리고 심지어는 그 너머의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좋은 공동체의 모델을 찾아 헤맨 이유였다. 물론 우리가 살펴보았던 살루타티의 공화사상에서 브란돌리니의 공화국 비판 그리고 폰타노의 군주의 위엄에 관한 논의에 이르기까지 분명 그들의 고민은 다양한 스펙트럼 위에서 부유했다. 하지만 그들 모두 ‘공동체’의 가치에 주목했다는 점에는 큰 차이가 없다. ‘리퍼블릭’(republic)은 ‘공공의 것’(res publica)이라는 생각이 공유된 탓이었다.
16세기 초 피렌체의 지식인들이 정기 모임을 하며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던 루첼라이 정원. 위키미디어 코먼스
‘인간으로서’ 더 나은 삶이란 한마디로 르네상스는 고대를 지향하면서도 새로운 시대로 발걸음을 옮긴 ‘역설의 문화운동’이자, 혼돈 속에서 화려한 싹을 틔운 ‘앙스트블뤼테’였다. 때론 난해하고 모순적이며 때론 난삽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르네상스인들의 지적 쟁투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울림을 주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 테다. 마치 유행어처럼 문명의 위기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오늘날 우리가 ‘인간으로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애써 말문을 닫아버리곤 하기 때문이다. 비판 없는 글쓰기를 참지 못했던 발라부터 서로 다른 생각마저 함께 나눌 수 있었던 루첼라이 정원의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르네상스인들은 더 나은 삶을 위해 인간과 사회의 개선을 화두로 던졌다. 그렇다면 “누가 르네상스를 두려워하는가?” 지난 세기 후반 신화의 세계에 박제되었다는 세간의 비판에 맞서, 역사상의 르네상스를 다시 돌아볼 것을 권고하며 한 르네상스학자가 던진 말이다. 그의 이 질문과 함께 이 연재를 마치고자 한다. 지난 2년 동안 변변치 못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신화 속의 르네상스가 살아 숨 쉬는 역사 속의 르네상스로 다가갔기를, 그리고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려던 르네상스인들의 치열한 숨결이 느껴졌기를 희망한다.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와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르네상스는 말과 글을 통해 고대 세계를 부활시키려던 지적 운동이었다. 14세기 이후 백가쟁명의 지성사를 검토하는 ‘르네상스와의 대화’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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