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는 세상이다. 거대 자본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재능이 뛰어나도 그것을 펼칠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없으면 계층 이동에 성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교육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사교육이 공교육을 압도하는 현실에서는 언감생심이다. 경제적 약자를 위한 제도와 정책이 있다지만, 현실은 돈이 없으면 꿈을 펼치기는커녕 꾸기조차 힘들다. 자본이 문화적 소양과 학벌까지 담보하는 현실이 참담할 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사기 행각에 대한 문제 인식이 빈약한 현실은 사회적 괴물들을 만들어내는 토양이 되기 쉽다. ‘연약한 자존심’에서 시작한 ‘거짓말’ 때문에 타고난 재능과 후천적 노력마저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인생을 그린 드라마 <안나>(쿠팡플레이)의 이유미(수지)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욕망이 만들어낸 사회적 괴물이다.
중학생 이유미는 “엄마가 언어 장애인이고 돈이 없어서 발레를 그만둔다는 소문이 사실이냐”는 친구의 질문에 부정하려고 거짓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별다른 죄의식은 느끼지 않는다. 어린 시절, 미군 부인을 통해 “사람들은 다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는 부인의 마지막 조언도 거짓말에 관한 그의 생각을 왜곡시켰다. 음악 교사와의 연애가 들통난 사건을 계기로 진실이 부정당하는 경험도 했다.
원하는 대학에서 떨어진 뒤 이유미는 조금씩 지쳐갔다. 재수에서 실패했지만 내년에는 반드시 합격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거짓말을 했다. 현실을 부정하기 위한 거짓말은 자기 합리화로 가장한 기만의 시작이었다. 거짓으로 입학식을 치르고, 하숙집 선배의 권유로 교지 편집부에 들어가면서 그의 인생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급선회하였다. 가짜 대학생 정체가 탄로 나면서 결혼을 약속한 남자와의 미국 유학이 취소되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어머니의 치매 발병까지 겹치면서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그는 미술관 이사 이현주(정은채)의 개인 집사로 취직한다. 그곳에서 이유미는 이현주의 미국 대학 석사학위가 부모의 재력으로 사들인 학벌에 불과하고, 미국에서 그와 함께 어울리던 사람들이 한국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는 현실 앞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결국 이유미는 이현주의 개인 정보를 도용해 유학원 강사로 취직한다. 이름마저 이현주의 미국 이름인 이안나로 개명한다. 이유미는 여러 유학원을 통해 관련 정보를 습득한 뒤 철저하게 내면화하여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능력을 인정받는다.
이유미의 타고난 재능과 노력은 그의 사기 행각에 날개가 되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가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 그게 문제지”라는 선배의 말을 따라 가짜를 진짜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유학원 강사에서 대학의 평생교육원 교수로, 유망 벤처기업 대표와 결혼 이후 미술대학 교수가 되기까지 모든 것이 가짜였지만, 그의 재능과 노력 덕분에 별다른 문제 없이 순조로웠다. 그의 남편이 정치에 입문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언론 노출이 잦아지면서 그의 과거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기고, 마침내 그가 훔친 이력의 주인 이현주가 나타나 협박하면서 그의 사기 행각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유미는 자신을 수행하는 비서에게 읊조린다. “자기도 부모님께 주눅 들지 마요. 부모의 실망에 죄책감을 갖지 않는 것부터가 시작이에요. 난 그게 제일 후회돼.” 하지만 이 말 또한 진실이라고 믿기 어렵다. 어려서부터 “마음먹은 건 다” 했던 그가 부모에게 주눅 들었을 리 없다. 후회의 순간에도 그의 거짓말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인생이 불행했던 것은 어쩌면 거짓말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정말 무엇을 원했던 것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는 “진실은 간단하고 거짓은 복잡”하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다.
불편한 진실보다 달콤한 거짓말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모두가 거짓말을 하지만, 모든 거짓말이 사기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사소한 거짓말은 없다. 의도가 아니었다는 변명이나 사과로 끝날 거짓말도 없다. 학벌과 문화적 소양을 담보하는 자본이 없다고 해서 성공을 향한 욕망의 사기 행각을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만큼 박사학위 논문의 표절 시비에 관한 진실 규명 요구를 정치적 공세로 치부하는 현실이 거짓과 기망의 사회적 괴물을 탄생시킨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충남대 국문과 교수·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