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피치 미술관에 남아 있는 스칼라의 초상화.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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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겨울 추위가 맹위를 떨치던 1483년 2월 초, 통풍으로 고생하던 스칼라에게 반가운 친구가 찾아왔다.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의 아버지로 더욱 유명한 피렌체의 법조인 베르나르도 마키아벨리였다. 때마침 외교적 이유로 로렌초 데 메디치는 피렌체를 떠나 있었고, 그에 따라 모처럼 스칼라도 격무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바로 이때 베르나르도가 그를 위로할 겸 찾아왔고, 으레 그렇듯이 그들은 이런저런 담소를 나눈 듯하다. 그리고 이후 스칼라는 자신들이 나눈 이야기를 휴머니스트 특유의 대화록 형식을 빌려 기록한 후 로렌초에게 헌정했는데, 그것이 바로 <법과 법적 판단에 관하여>라는 논고다.
스칼라는 르네상스의 역동적인 사회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르네상스기를 통틀어도 그만큼 극적인 신분 상승을 경험한 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1430년 토스카나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보잘것없는 방앗간 임차인의 아들로 태어난 스칼라는 서른다섯 즈음 공화국의 제1서기장이 되었고, 이후 피렌체의 최고정무관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이를 고려하면, 그와 걸핏하면 다툰 당대의 시인 폴리치아노나 16세기 피렌체의 역사가 귀차르디니 등이 그에게 퍼부은 냉소와 비아냥거림마저 자연스러워 보일 정도다. 아무튼 스스로의 변호에 잘 나타나듯이, 그의 삶은 “변변치 못한 가문 출신”으로 “명성이나 후원자”는 고사하고 “땡전 한푼 없이” 르네상스의 메트로폴리탄에 발을 들여놓은 한 시골뜨기의 놀라운 성공담처럼 보인다.
19세기에 제작된 스칼라의 측면 흉상. 위키피디아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이런 스칼라의 성장에는 그가 20대 중반부터 쌓아온 메디치 가문과의 돈독한 관계가 크게 한몫했다. 메디치가는 마치 20세기 초의 마피아처럼 15세기 후반 피렌체 정치극장의 배후에서 그 모든 것을 연출했고, 이런 그들에게 스칼라는 도시민 그리고 정계의 유력인사들과 자신들을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였다. 한마디로 그는 메디치 정권을 지탱하던 중심축 가운데 하나였다. 암묵적이든 명시적이든 스칼라가 남긴 여러 저작들에 남다른 현실감각과 정치적 감수성이 한껏 도드라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법과 법적 판단에 관하여>도 예외일 수 없다.
이 논고에서 그는 법이 이성과 정의의 구현물이라는 베르나르도의 이상론에 맞서, 현실 세계에서 법적 판단이 이루어지는 실제 현상을 거리낌 없이 간연한다. 물론 이런 둘 사이의 차이에는 전문 법률가로 생계를 유지하던 베르나르도의 입장과 현실 정치에 깊이 몸담고 있던 스칼라의 실용적 관점이 자리를 잡고 있다. 만약 사회의 안전을 도모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 법의 존재 이유라면, 스칼라가 그 어떤 법률적 판단도 무수히 많은 법전의 자구나 그것을 다루는 전문 법률가의 손에 맡겨놓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스칼라는 설령 실정법이 없더라도 자연의 명령에 따라, 달리 말해 자연법에 근거해, 법적 문제를 훌륭하게 판단해오던 고금의 역사적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고 이야기한다.
아마도 이런 그의 입장에는 동일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실정법과 그것을 지탱하는 법률 지식이 공동체의 조화를 훼손하곤 한다는 휴머니스트 특유의 비판의식이 담겨 있다. 이를 고려하면, 소위 능력 있다고 간주되는 법률가의 서재로 시선을 옮기며 그를 희화하는 스칼라의 논의는 한층 눈여겨볼 만하다. 그에 따르면 법학자의 서재에는 세 부류의 책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소송에서 이길 수 있는 논거를 담고 있는 책들, 그에 반하는 논리를 보여주는 책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결정을 유보하고 연장시키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이, 필요에 따라 사용될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분명 고매한 법률 지식과 산더미 같은 법률 서적이 그저 특정 사건을 자신의 이해에 맞추어 조작하기 위한 법률가들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조롱이다.
이에 따라 그는 법률가들이란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하기보다” 이윤만을 탐하며 “소송에서 이기려고” 애쓰는 위선자일 뿐이라고 비난한다. 진정한 법의 가치는 인간을 올바른 삶으로 이끄는 것이고, 따라서 그 어떤 실정법이나 성문법보다 자연법이 그것의 근본 원리가 되어야만 한다는 일견 전통적인 논리에서다. 현학적이면서도 위선적인 법학자의 서재가 보여주듯이, 하나의 문제에 대해 상반된 판단을 내리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법이라면, 그것은 “선한 삶”을 위한 보편적 모델이 되기보다 그저 누군가의 “도덕적 타락”을 위장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현실주의자의 날 선 질책이 아닐까.
스칼라가 15세기 후반 피렌체의 보르고 핀티 지역에 구입해 머물던 팔라초 델라 게라르데스카. 베르나르도와의 대화는 물론이고 고전 전통에 기초한 다양한 연회가 이곳에서 열렸다. 위키피디아
한편 베르나르도는 법은 명예와 보상을 통해 인간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고귀한 기예라고 항변한다. 이에 따라 그는, 적어도 어원적인 차원에서 볼 때, 나약한 본성 탓에 타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도와’(iuvare) 그를 올바른 삶으로 이끌고 공동체의 ‘정의’(iustitia)를 구현하는 것이 바로 ‘법’(ius)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바로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고금의 모든 법은 어떤 ‘신성한 것’(divinum)에서 기원하며, 그것은 곧 스칼라가 이야기하는 ‘자연’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설령 현실 세계의 법이 오용되었다 해도, 그것은 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의 문제라는 일갈인 셈이다. 그렇다면 스칼라가 법보다는 ‘선한 사람’의 ‘선한 판단’이 법률가의 판단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일 테다.
분명 이런 주장들에는 코시모와 로렌초 등 메디치 가문의 수장을 옹호하는 친-메디치 지식인의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법이 신성한 자연의 원리에 근거해야 하고, 그 자연법에 기초해 사회와 개인의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휴머니스트 특유의 도덕관 역시 그 속에 깊게 침윤되어 있다. 실정법과 도덕 사이의 균열이 현실주의 정치인의 비판의식 속에서 똬리를 트는 의미 있는 순간이 아닐까? 또한 우리는 자연과 신성을 동일시하는 스칼라의 논의에서 흐릿하게나마 15세기 후반 피렌체의 지식인 세계에 침투하던 에피쿠로스의 물질주의 세계관의 흔적 또한 감지할 수 있다. 다음 세기 마키아벨리의 현실주의 세계관 그리고 17세기 유럽인들의 이신론적 자연관이 그리 멀지 않은 듯하다.
르네상스는 말과 글을 통해 고대 세계를 부활시키려던 지적 운동이었다. 14세기 이후 백가쟁명의 지성사를 검토하는 ‘르네상스와의 대화’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만난다.